Share

다시 너의 세계로
다시 너의 세계로
Author: 우담

제1화

Author: 우담
서이담은 정하준을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늘 그녀는 여섯 살 난 딸을 데리고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다.

딸은 선천성 심장 질환이 있어 꾸준히 정기 검진을 받아야 했는데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 서이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높고 곧은 콧대 위에는 무테안경이 얹혀 있었고 하얀 가운은 눈처럼 새하얘서 전체적으로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고고하고 냉철해 보였다.

서이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원래는 심장외과의 권위자인 황준기 교수에게 진료받으려 했는데, 회진 일정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간호사의 권유로 담당의를 바꿨던 것이다.

간호사는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정 선생님은 황 교수님의 제자라며 심장외과 8번 진료실에 가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서이담은 그대로 굳은 채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고 급히 고개를 숙여 마스크를 꺼내 썼다. 머릿속엔 당장 딸을 데리고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벌써 7년이 지났다. 정하준은 언제 돌아온 걸까?

그동안 서이담의 삶은 조용하고 평범했다. 이제 와서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서이담은 본능적으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긴장한 탓에 등줄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낮고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정하준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마주한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이담의 숨이 흐트러졌다.

28살이 된 지금의 정하준은 21살 때의 하얀 셔츠를 입고 있던 소년의 모습과 겹쳤다가도 이내 멀어졌다.

당시 S대의 남신이라 불리던 그가 무려 90킬로가 넘는 뚱뚱한 여학생과 비밀 연애를 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서이담은 아무 말 없이 정하준과 눈을 맞췄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딸의 손을 잡은 채 도망치려던 발길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하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서하율이죠? 진료기록 좀 볼게요.”

서이담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얼굴을 만지려다 마스크를 쓴 게 느껴지자 그제야 조금 이성을 되찾은 듯했다. 그녀는 잠깐의 ‘가짜 평정’을 유지했다.

정하준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서이담’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고 더 이상 7년 전의 ‘강보람’도, 그 시절의 뚱뚱한 여자도 아니었다.

지금은 키 170에 겨우 50kg를 조금 넘는 몸무게로 외모도, 이름도 완전히 달라졌다.

딸은 의자에 앉아 진찰을 받았고 가까이에서 바라본 정하준은 여전히 낯익고도 낯설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타고 퍼져가는 듯한 느낌에 서이담은 무의식적으로 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서이담은 곁눈질로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무테안경을 쓴 얼굴은 여전히 냉담했고 하얀 가운 아래 흰 셔츠조차 고급스러운 질감이 느껴졌다.

정하준은 청진기로 진지하게 심장 소리를 듣다가 중간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일상적인 관리에 더 신경 써주세요. 2, 3년 안에는 수술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비용은 이미 알아보셨을 테고요.”

정하준은 서이담을 힐끗 바라보았다. 손에 든 검정 가죽 가방은 손잡이 부분이 닳아 해졌고 흰색 캔버스화는 살짝 누렇게 바랬으며 청바지도 색이 많이 빠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차림새였다. 이런 고가의 수술비를 감당하긴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병원에서야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이 여자를 한 번 더 바라보게 되었다. 마른 체형에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여자는 마스크를 쓰고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였지만 여섯 살 된 딸을 생각하면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긴 목선을 따라 몇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있었고 전반적인 인상은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딸 뒤에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조각상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묵묵한 수호자 같기도 했다. 커다란 마스크가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었고 보이는 건 아래로 살짝 떨어트린 눈동자뿐이었다.

서이담은 들어온 이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정하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제 진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소아청소년과 쪽으로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소아과에 허 교수님이 계실 테니, 그쪽 의견을 들어보셔도 됩니다.”

앞머리에 가려져 눈빛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진료기록을 정리해 조용히 딸의 손을 잡고 진료실을 나섰다.

정하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나간 후, 그는 안경을 다시 고쳐 쓰고 진료를 이어갔다.

그 뒤로 환자 두 명을 더 본 후, 잠시 짬을 내어 물을 끓이고 고등학교 시절 반장이던 노지성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이번 달 20일, 3반 동창회 있거든. 지금 우리 반 단톡방에 있는 성운 사는 애들은 다 참석 확정이야. 너 몇 년 동안 해외에 있었잖아. 이번에 겨우 돌아왔는데, 네가 안 오면 섭섭하지.”

“응.”

정하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날 일정 봐야 돼. 아직 당직표가 안 나와서.”

“야, 진짜 바쁘다 바빠. 동창회 몇 번이나 했는데, 너랑 강보람만 매번 안 나왔잖아.”

강보람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노지성의 입에서 말이 끊이질 않았다.

“너 강보람 기억 나지? 우리 반에서 제일 뚱뚱했던 애. 걔 대학 졸업하고선 완전 증발했잖아. 기억 안 나? 야, 야, 정하준 듣고 있어? 어라, 왜 아무 말도 없어? 신호가 안 좋나? 네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때 책상 위 전기포트가 펄펄 끓기 시작했고 뜨거운 물이 튀어나와 종이 몇 장을 흠뻑 적셨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정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든 자세 그대로 잘생긴 얼굴은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안경 너머 눈빛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진료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나가던 간호사가 황급히 들어왔다.

“어머, 물 다 쏟아졌네요. 괜찮으세요, 정 선생님?”

정하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긴 했지만 간호사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몇 걸음 걸어 창가로 다가갔다.

휴대폰을 쥔 손은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짜 한 번도 동창회 안 나왔어?”

정하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다.

“누구? 아, 그쪽 신호 안 좋은가 보다.”

노지성이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강보람 말이야? 응, 계속 연락 안 돼. 단톡에도 없어.”

노지성이 무슨 말을 더 했지만 정하준은 더 이상 들을 마음이 없었다.

젊은 간호사는 얼굴을 붉히며 책상을 정리해 주고 있었지만 그가 계속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걸 보고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정하준은 마치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듯 오롯이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있었다.

오전 진료가 세 명이나 더 남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진 정하준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마침내 오전 진료를 마무리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길쭉한 파란색 케이스가 있었고 케이스 안에는 검은색 만년필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며칠 전 떨어뜨리는 바람에 잉크가 새고 말았던 6, 7년째 써온 펜이었다.

사용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검은 펜 몸체엔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최근에 수리를 마쳤지만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소중하게 서랍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정하준은 이마를 문지르며 문득 온몸이 지쳐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

한편, 서이담은 딸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7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정하준의 생일이었다. 서이담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그가 있는 룸 앞까지 갔었다.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너무도 시끄럽고 자극적이었다.

“야, 저거 봐! 쟤 목에 저건 뭐냐? 키스 자국 아냐?”

“진짜야? 설마 진짜 그 뚱뚱한 애랑 잤어?”

“불 끄면 다 똑같다던데? 하하하!”

“진심이야? 나 방금 SNS 봤는데, 너 진짜 그 뚱뚱한 애랑 사귄다고?”

“그 뚱뚱한 애가 소연이 일로 하준이 협박해서 사귀게 됐다잖아. 아니었음 하준이가 그런 돼지랑 연애를 하겠냐고.”

그때의 말들은 강보람의 기억 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들려온 건 정하준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럽고 독특했는지, 음악 소리도, 조롱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응. 그냥 잠깐 즐긴 거야. 나 다음 달에 유학 가거든.”

룸 밖에 있던 서이담은 눈시울이 벌게졌고 숨이 턱 막힐 듯한 가슴 통증에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정하준은 최상위 재벌가에서 태어난 금수저였다. 그와의 미래를 바랄 수 없다는 걸 서이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곧 유학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냉소와 비웃음 속에서 산산이 무너져 버렸다.

정하준에게 선물로 줬던 검은색 만년필은 서이담이 두 달간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론 산 40만 원짜리 펜이었다.

서이담에겐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지만 정하준의 친구들에겐 그저 조롱거리였다.

“야, 이건 어디서 주워 온 거냐? 설마 그 뚱뚱한 애가 준 거야? 그런 펜을 왜 써?”

“너 같은 사람이 이런 싸구려 브랜드를 왜 써? 너 이미지만 떨어진다.”

...

“엄마.”

딸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서이담은 숨이 멎을 듯한 회상에서 깨어나 딸을 꼭 안아주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의 얼굴은 정하준을 똑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의 눈매, 입매가 점점 그를 닮아가는 것을 보며 서이담은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엄마, 오늘 나 진료해 준 그 의사 아저씨, 혹시 아빠예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다시 너의 세계로   제100화

    정하준은 진심이었다. 그의 답변은 진지하게 고민한 뒤에 나온 답변이었다....서이담은 오늘 어쩌다 지각을 했다. 라움은 탄력근무제이긴 하지만 미루다 미루다 결국에는 연말에 한꺼번에 몰아 업무를 마치는 일이 허다했다.서이담은 자리에 앉은 후 컴퓨터부터 켰다. 하지만 아직도 수리를 안 한 것인지 아무리 켜봐도 켜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가방에서 자신의 태블릿을 꺼냈다.하지만 태블릿으로 뭔가를 확인한 지 2분도 안 돼 금방 회의가 시작되었다.짧은 회의가 끝난 후, 백서연이 그녀를 불러세우며 보름 안에 드레스 하나를 디자인하라고 지시했다. 적절한 가격이었기에 서이담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구체적인 요구사항은 메일로 보내줄게요.”“네, 알겠습니다.”서이담은 자리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다시 뭔가를 하려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봉규남으로 잠깐 사무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래처의 브랜드 책임자가 앉아 있었다. 책임자는 중년 남성이었다.그는 다음 시즌의 디자인에 대해 논의하다가 서이담을 보고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그녀와 친구 추가를 하고 싶다고 했다.거래처 책임자가 디자이너의 연락처를 요구하는 건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이담은 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게 느껴져 연락처를 주는 게 조금 망설여졌다.그때 봉규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문제 될 거 있으면 톡으로 얘기하라고 했다.서이담은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봉규남은 다른 대표들과 달리 직원을 아낄 줄 알고 회식 자리에서도 강제로 술을 권하거나 하지 않았다.라움이라는 스튜디오는 그다지 큰 곳이 아니었지만 봉규남이라는 이름은 꽤 무게가 있었다.서이담이 봉규남을 존경하는 건 단지 그가 직원을 위할 줄 아는 참된 대표라서가 아니었다. 오래전, 그 어떤 회사도 그녀의 이력서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오직 봉규남만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면접 기회를 주었다.서이담은 그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9화

    “너는 누나가 돼서 그런 말을 하고 싶어?”최명희는 바로 정예진의 등을 때리며 그녀를 째려보았다.“나 다 알아. 성찬이 사촌 동생이면 봉규남이잖아. 규남이 할아버지는 깐깐하다고 소문난 교수님이고. 아마 성찬이 얘기를 들으면 교수님은 기절하실지도 몰라.”정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명희를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최명희는 겉보기에는 상냥하고 둥근 사람이지만 한때 정윤범과 비즈니스를 함께 진행했던 사람이라 전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정예진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러니까 만약에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하준이가...”“만약에도 안돼. 나니까 이런 얘기를 들어주지 만약 네 아빠가 들었어 봐. 바로 혈압 오르고 난리 났을 거야.”...현관문이 열리고 정하준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네모는 소파 아래에 엎드린 채 현관문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엎드려 눈을 감았다.노견이라 어릴 때처럼 사람을 반기는 게 열정적이지 않았다.리트리버는 원체 사람을 좋아하는 견종이라 어릴 때는 지칠 줄 모르는 기계처럼 정하준의 곁을 맴돌며 말썽을 부렸다.특히 네모는 사모예드와 리트리버가 섞인 믹스종이라 더더욱 그러했다.이갈이했을 때, 네모는 정하준이 아끼던 고서를 단숨에 찢어버렸고 서재의 벽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정하준이 2년간 해외에 있었을 때 네모는 본가에서 키워졌다. 그러다 정도현이 M 국으로 가게 되면서 네모도 함께 데리고 갔다.정하준은 졸려 보이는 네모의 곁으로 다가가 갈변한 사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네모가 코를 킁킁거리며 먹으려고 하자 정하준이 곧바로 제지했다.“안 돼.”하지만 네모는 지시를 듣지 않고 곧바로 사과를 한 번 핥았다. 그러고는 금세 맛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외면해 버렸다.정하준은 욕실로 가 물줄기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뜨거운 물들이 그의 얼굴을 지나 몸으로 흘러내렸다.20분 정도 흐른 후, 정하준은 가운을 입고 다시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때 마침 벨 소리가 울렸고 그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느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8화

    정하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정하준은 아무 말도 없이 아까 서하율이 줬던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들이 그의 얼굴을 슬프게 비추고 있었다.정하준은 손에 든 사과를 바라보며 서하율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히 단 사과인데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입안이 쓰게만 느껴졌다.“엄마한테 전해. 다음 주도 바쁠 예정이고 그다음 주도 바쁠 예정이니까 소개팅 같은 거 주선할 생각하지 마시라고.”정예진은 동생의 말에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 지금은 소개팅을 나가고 말고를 논의할 시간이 아니었다.정하준이 한 가정을 깨트리지 못하게 막는 게 급선무였다.“정하준, 너 그러는 거 엄마랑 아빠가 아시게 되면 진짜 죽어.”“아직 모르잖아. 그리고 나 아직 뭐 안 했어.”정하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하고는 다시 사과를 바라보았다. 고작 다른 곳에 한눈 좀 팔았다고 금세 갈변해 버렸다.“네가 상간남을 자처하겠다는 걸 알면 부모님 백 퍼센트 쓰러져!”정예진의 외침에 정하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그냥 응원해 줄 수는 없는 거야?”정하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상간남이라니?”정예진은 등 뒤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심장이 다 튀어나올 뻔했다.“어, 엄마... 여기는 언제 올라왔어요. 깜짝 놀랐네.”정예진이 말을 버벅거리며 어딘가 어색한 눈빛으로 최명희를 바라보았다.“상간남 소리 뭐냐고. 누가 상간남이라는 거야?”정예진은 그녀가 잘못 들은 거라고 얘기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최명희의 생각을 알아볼 절호의 기회였으니까.정씨 가문에서 최명희는 그래도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성찬 씨네 사촌 동생이 유부녀를 좋아한대요.”“세상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유부녀야?”최명희는 구성찬의 사촌 동생을 알고 있다. 봉규남이라고 직접 창업한 회사도 있고 얼굴도 괜찮게 생긴 편이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엄마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7화

    “네.”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도윤이 아저씨는?”“좋아요.”이도윤의 엄마는 박순자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박순자의 집에 배관이 고장 났거나 전구를 갈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이도윤은 늘 빠르게 달려와 도움을 주었다.서하율도 오며 가며 이도윤과 자주 얼굴을 보며 친하게 지냈다.그런데 좋다고 말한 뒤에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다.서이담은 감정에 솔직한 딸이 머뭇거리자 조금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았다.“도윤이 아저씨도 좋지만 하준이 아저씨가 더 좋아요.”서이담은 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엄마, 하율이 생일 때 준서랑 하준이 삼촌도 부르면 안 돼요?”서하율의 생일은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그날은 증조할머니 보러 가기로 했잖아.”서이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아이는 실망한 듯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가 바로 다시 미소를 지으며 서이담의 품에 뛰어들었다.“증조할머니 만나면 비밀 얘기를 엄청 많이 해줄 거예요. 그리고 하율이가 그린 그림도 선물해 줄 거예요.”...서이담의 집에서 나온 후 정하준은 택시를 잡았다.집으로 가는 길, 휴대폰을 들어 카톡을 확인해 보니 어디 갔냐는 정예진의 메시지 내용이 보였다.정하준은 아무런 답장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해줄 수 없었다.서이담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남성용 슬리퍼를 보고 기분이 나빴고 온정과 따뜻함이 흘러넘치는 집안 분위기를 보며 그것들을 전부 소유하고 있는 서이담의 남편에게 질투를 하다못해 분노까지 느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정하준은 정예진의 문자에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최명희가 그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언제 시간이 되냐는 가족 단톡방에는 답장했다.[바빠요. 시간 없어요.]무시당한 정예진이 그에게 메시지 폭탄을 보냈다.[정예진: 네가 이담 씨 아파트로 들어가는 거 봤어.][정예진: 레오한테 다 들었어. 이담 씨랑 따로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하다며?][정예진: 너, 이담 씨네 집으로 가서 뭐 했어? 설마 집 바로 앞까지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6화

    정하준은 소파에 앉아 집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그가 앉아 있는 소파는 매우 아담했지만 푹신하고 느낌이 좋았다. 거실도 크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따뜻함이 풍겨 나왔다.탁자 위에는 꽃 한 송이가 든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었고 티비에는 서하율이 붙여둔 갖가지 모양의 스티커가 있었다.서하율은 강아지들을 안방으로 보낸 후 스케치북을 들고 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정하준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아저씨, 과일 먹을래요?”정하준은 그다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잠깐만 기다려요.”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고 서이담에게 과일을 꺼내 달라고 했다.“자, 여기.”서하율은 사과를 건네받은 후 곧장 거실로 달려와 정하준에게 건네주었다.정하준은 아주 잠깐이지만 서이담의 남편이 그간 어떤 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부엌에 있는 서이담을 바라보았다. 서이담은 끓고 있는 물은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목을 스트레칭 했다.그러다 더운지 외투를 벗고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일 때마다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정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매우 시원하고 단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입안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단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서하율은 정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서이담을 불렀다.“엄마, 아저씨 갔어요.”서이담도 알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으니까.정하준을 위해 끓였던 차는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서이담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컵에 따랐다. 그러고는 거실로 와 딸의 옆에 앉았다.“엄마, 아저씨는 왜 갑자기 가버린 거예요?”서하율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아마 급한 일이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5화

    아파트 주민들 중 진재현과 서이담의 결혼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동네방네 떠벌릴 정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젊은이들은 이해해 줄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르신들은 만날 때마다 혀를 차며 혼을 낼 게 분명했다.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자꾸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저 한 귀로 흘려들었다....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서하율은 지금 이 상황이 꼭 게임처럼 재밌는지 서이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서이담도 그런 아이를 향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이제 내려와.”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늘 이렇게 다시 웃게 되었다.정하준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를 안은 채 6층을 올라왔는데도 그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서이담은 문을 연 후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정하준은 평온한 얼굴로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금방 표정을 굳혔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용 슬리퍼였다. 그것도 새것이 아닌 이미 신은 흔적이 있는 슬리퍼였다.서이담네 집의 신발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이담의 신발부터 어린애 신발, 그리고 남자의 신발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정하준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서이담은 결혼을 한 유부녀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정하준은 꼭 누군가가 그의 비도덕적인 마음과 황당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아기 고양이처럼 안겨 오던 서하율도, 그가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던 서이담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정하준은 순간, 서이담과 서하율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정하준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내 슬리퍼를 무시하고 양말만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서이담은 정하준이 설마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벙찐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