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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우담
서이담은 딸이 갑자기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맑고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제야 서이담은 깨달았다. 심장병을 안고 살아온 딸은 또래보다 훨씬 작고 말랐지만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비어 있던 아버지의 존재는 아이 마음속에서 민감한 결핍으로 자라났고 ‘아빠는 멀리 떠났어’라는 서이담의 말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선의의 거짓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이담의 서랍에는 정하준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고 딸은 그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서이담은 그 어린아이가 그 사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 사진은 고등학생 시절, 정하준과 나란히 찍은 사진이었다. 반에서 상위권이었던 세 사람이 함께 찍은 걸 그녀는 다른 한 사람을 잘라낸 뒤 간직해왔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에 딸을 데리고 살게 될 줄도,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우연히 정하준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때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했다.

서이담은 몸이 앞으로 쏠리며 본능적으로 품에 안은 아이를 감싸안았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이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데 그 아저씨 아빠랑 진짜 닮았어요.”

서이담은 말문이 막혀 몇 초간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냥 좀 닮은 거야.”

집에 돌아온 후, 서이담은 박순자의 방 문을 두드렸다.

박순자는 동네에서 괴팍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이 오래된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2년 전, 서이담이 딸아이의 유치원 입학 문제로 서류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우연히 진재현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다.

진재현의 아버지는 병세가 위중해 곧 돌아가실 상황이었고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형식적인 결혼을 하고 곧바로 이혼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해외 발령이 난 상태였고 서이담은 딸의 입학 문제와 호적 등록을 해결하기 위해 그와 초고속 결혼을 하고 짧은 기간 후 이혼했다.

서이담은 진재현의 아버지를 직접 찾아뵀고 그날 밤 그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박순자는 자기 아들이 어떤 여자와 초고속 결혼 후 곧바로 이혼한 걸 알고 몹시 분노했지만 아버지를 위한 효심에서 한 선택이라는 걸 알고 결국 받아들였다.

이혼 후 진재현은 출국했고 박순자는 혼자 이 집에 남게 되었다.

그러다 서이담이 딸과 함께 사는 걸 알게 된 박순자는 그녀에게 위층을 내어주었다.

월세는 정식으로 내고 있었지만 한 번은 박순자가 견과류에 목이 막혀 위험한 순간이 있었고 서이담이 그녀를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조금 가까워졌다.

박순자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도, 공용 관리비도 없는 낡은 복층 다세대 주택이었지만 그만큼 월세는 다른 곳보다 저렴했다.

1층에 박순자가 살고 있었고 2층은 방 두 칸에 작은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서이담은 딸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고 출입문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서이담은 주방으로 가서 점심을 준비했다. 냉동실에 미리 얼려둔 만두가 있어 금세 끓는 물에 삶아냈다. 그때 주방으로 들어온 박순자가 말했다.

“하율이, 이제 다 컸으니 얼른 수술시켜야지. 돈 없으면 내가 좀 보태줄 테니까. 그냥 빌려준 셈 치고.”

서이담은 박순자가 약간의 저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박순자의 노후를 위한 돈이었다.

그런데 그런 돈을 다 써서 딸을 수술시키고 혹시라도 아주머니에게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진심이 담긴 호의가 고마웠지만 서이담은 끝내 정중히 거절했다.

...

오후, 서이담은 금성빌딩 15층에 위치한 라움 디자인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막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 김유린이 다가왔다.

“이담 씨, 팀장님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

백서연은 라움 디자인의 총괄 디렉터이자 서이담의 직속 상사였다.

서이담이 노크하고 사무실에 들어섰을 땐, 백서연이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고개만 들어 서이담을 한 번 보고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고 서이담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또 13분이 흘러서야 통화가 끝났다.

“서이담 씨, 지난번에 디자인팀이 낸 시안, 의뢰사 측에서 반려했어요. 전면 수정 들어가고 다음 주까지 다시 제출해요. 전체적으로 너무 무난하고 보수적이에요. 눈에 띄는 포인트도 없고. 도트 패턴이나 고딕풍 자수처럼 조금 자극적인 요소를 넣어서 임팩트를 주는 게 좋겠어요.”

“팀장님, ‘세라’는 우아한 기품을 추구하는 브랜드고 타깃도 30대 이상입니다. 마케팅팀하고 영업팀에서 내려온 의견도 그 방향이었고요.”

“지금 총괄팀장이 서이담 씨예요, 아니면 나예요?”

백서연은 짧게 말을 끊고 서이담을 쳐다봤다. 서이담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정 방향을 팀원들과 공유하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서이담 맞은편에 앉은 이세은 얼굴을 찌푸렸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도트 패턴에 고딕풍 자수는 또 뭐예요? 그 브랜드 컨셉이 원래 우아하고 내추럴한 건데... 백 팀장님 취향 진심 이해 안 돼요.”

“결국 욕은 우리가 먹는 거지 뭐. 팀장 취향 살리자고 밤새 수정하는 것도 우리고.”

“나도 들었는데, 이번 주 토요일에 성운 패션미디어 채널에서 인터뷰한다더라고요. 스타 디자이너의 성장기인가? 뭐 그런 코너래요.”

“듣자하니 아버지가 사령관이래요. 집안이 꽤 빵빵하더라고요. 여긴 그냥 놀러 온 거래요. 봉 대표님도 원래 지인이라면서요.”

“쉿, 목소리 좀 낮춰.”

서이담은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그때 서하율이 박순자의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영상 속에서 서하율은 저녁 먹었다고 말하며 서이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 김유린이 지나가다가 영상 속 아이를 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새삼 감탄했다. 같이 일한 지 3년이 된 지금까지도 서이담에게 여섯 살 난 딸이 있다는 사실을 듣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충격을 받으니 말이다.

서이담의 오밀조밀한 얼굴엔 콜라겐이 탱탱하게 차 있었고 맑고 투명한 피부는 대학교를 막 졸업한 신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돼 보였다.

도대체 어디를 봐서 여섯 살 아이 엄마란 말인가.

김유린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됐어, 이담아 먼저 퇴근해. 딸이 기다리겠다. 우리도 한 삼십 분 더 하고 퇴근할게.”

서이담이 막 지하철에 올랐을 때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서하율인 줄 알고 확인했는데, 뜻밖에도 고등학교 동창의 이름이었다.

예전의 자신과는 모든 연을 끊어내고 싶었기에 이 계정에는 예전 동창을 하나도 추가하지 않았던 터라 더더욱 낯설었다.

그런데 그중 유일하게 연락을 이어온 친구가 바로 장나연이었다.

장나연이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너희 고등학교 동창 모임 한대. 반장 노지성이 너 연락 안 돼서 나한테까지 수소문했어. 내가 모른다고 하긴 했는데, 지금 애들 사이에서 네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어. 휴... 그런데 솔직히 지금 너 상태면 애들 앞에 서 있어도 아무도 몰라볼걸? 완전 다른 사람이잖아. 날씬하고 예쁘고.]

강보람은 마치 세상에서 7년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 같았다.

서이담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짧게 답을 남겼다.

[그럼 그냥 강보람은 죽은 걸로 해.]

사실 강보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서이담 자신조차도...

그 시절의 자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이름을 바꿨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곧이어 장나연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나도 들은 얘긴데 정하준도 나온대. 귀국했나 봐. 너 혹시 갈 생각있어? 그런데 지금 너 모습을 보면 아마 걔도 못 알아볼걸?]

장나연은 고등학교 시절 옆 반 친구였다. 그동안 띄엄띄엄 연락을 이어왔고 장나연의 결혼식 때 서이담은 직접 참석했었다.

그때 장나연은 서이담을 알아보지 못했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전의 그 뚱뚱한 여고생이 아니라 정말 정교하게 빚어낸 인형 같은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서이담은 메시지 창을 내려다보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은 이미 그를 본 적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단 두 글자만을 보냈다.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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