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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우담
밤 10시, 서이담은 침대에 누워 예전에 쓰던 SNS 계정을 열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그곳에는 반장 노지성이 보낸 문자 몇 개가 도착해 있었다.

[강보람, 다음 주에 별빛마루에서 동창회 하기로 했어. 일정은 전부 동기 단톡방에 공유해놨어. 지금 너만 빠졌어. 올 거지?]

[너한테 몇 번이나 문자 보냈는데도 답이 없네. 혹시 사는 게 힘들면 우리한테 말이라도 해. 다들 오래된 친구잖아.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

서이담은 조용히 반 단체 채팅방을 들여다봤다. 문자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서이담은 예전부터 이 방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방에는 정확히 48명으로 한 반 전원이 다 들어와 있었다. 괜히 혼자 나가버리면 더 눈에 띌 게 뻔했다. 게다가 이 계정 자체를 거의 켜지 않았다.

서이담은 오랜만에 들어가 채팅 기록을 위로 조금 넘겨보았다. 예상대로 누구 하나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다. 예전 학교에 있을 때도 그녀는 늘 공기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공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뚱뚱했다. 그 시절의 서이담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지만 항상 그녀 주변엔 조용한 속삭임이 떠돌았다.

돼지, 코끼리, 뚱녀...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기만 해도 누군가 그녀를 흘끗 보며 비웃었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살이 찌진 않았는데 몸이 안 좋아져 약을 먹게 되었고 그 부작용으로 급격히 체중이 불어버린 것이었다.

반면 정하준의 이름은 그 단체방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의 중심이었고 그를 둘러싼 단어는 늘 화려했다.

천재, 남신, 잘생김, 돈, 권력...

서이담과는 철저히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서이담은 정하준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여전히 몇 년 전 올린 사진 그대로였다. 그 역시 이 계정을 자주 들어오지는 않는 듯했다.

...

어느새 시간이 흘러 다음 주 토요일.

일주일 동안 서이담은 정신없이 바빴고 결국 세라 측 담당자는 백서연이 밀어붙인 두 번째 수정안이 아니라 서이담이 처음 제출했던 1차 시안을 선택했다. 계약도 빠르게 체결되었고 비용 정산도 시원스러웠다.

백서연은 내심 불쾌했지만 라움 디자인 공동대표 봉규남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저녁 식사를 제안한 자리라 쉽게 빠질 수 없었다.

모임 장소는 ‘별빛마루’였고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핫플로 떠오르고 있었다.

별빛마루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서이담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축하 회식 자리에서 괜히 혼자 빠지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봉규남 대표까지 참석한다고 하니 더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저녁 7시쯤, 단체 룸에서 모두 함께 건배하며 축하하는 자리가 시작됐다. 서이담도 분위기에 맞춰 와인 두 잔 정도를 마셨다.

한편,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룸에서는 정하준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곳엔 고등학교 2학년 3반 동창들이 모여 있었다. 정하준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술 한잔하라고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혹시라도 밤에 병원에서 연락이 올까 봐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웃음으로 넘겼고 그 이상 그를 압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 여동창들은 얼굴을 붉히며 슬쩍 휴대폰을 꺼내 몰래 사진을 찍었다.

성운고등학교든 S대든 정하준은 늘 그 세계의 중심이었다.

잘생긴 외모, 뛰어난 학업 성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집안 배경.

“하준아, 여자 친구는 있어?”

“부르면 바로 병원 나가야 하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

“심장외과라며? 힘들지 않아?”

질문을 던진 여학생은 예전 반에서 ‘얼짱’으로 불리던 이윤아였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정하준을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누가 봐도 정하준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몇 명이 장난스럽게 놀리자, 이윤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마침 그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정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윤아를 바라보았지만 사실 기억엔 남아 있지 않았다.

방은 꽤 넓었고 노래방 기기와 카드 게임 테이블까지 갖춰져 있었다.

정하준은 곧장 일인용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는 오후에 언론 인터뷰가 있어 정장 차림이었고 지금은 검은색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대충 걸쳐두었다.

흰색 셔츠 차림의 그는 차분하고도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고 전체적인 실루엣은 단정하고도 날렵했다.

정하준은 하얀 손으로 피곤한 듯 이마를 살짝 짚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변 동창들에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나온 건 어디까지나 노지성이 몇 번이고 연락해 왔고 마침 오늘 저녁에 시간이 비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아는 은근히 기대했던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노지성이 유리컵 하나를 건넸다.

“여기 물.”

“그래, 고마워.”

정하준은 예의를 지키며 선을 긋는 태도를 유지했다.

“동창끼리 뭐 그렇게 예의 차려.”

노지성은 정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눴고 노지성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엔 태한 그룹과도 협력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정하준과의 관계도 잘 유지해 두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물론 지금 태한 그룹의 실질적인 대표는 정하준의 형 정도현이었다.

정하준은 회사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정하준이야말로 태한 그룹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도현은 입양된 아들이라는 것도 익히 알려진 이야기였다.

정하준은 마지막에 도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창도 몇 명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왜 자꾸 문 쪽에 시선이 가는지, 누구를 기다리는 건지 정하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문이 열릴 때마다, 혹시 그 사람이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자꾸만 고개를 들게 했다.

룸 안은 떠들썩했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동창은 여자였다. 노지성이 선두에서 장난스럽게 술을 권하자 그녀는 쿨하게 과일소주 두 잔을 비웠다.

그때 누군가 툭 내뱉듯 말했다.

“유지영, 너 어쩌다 이렇게 뚱뚱해졌냐?”

“그러니까. 아까는 진짜 몰라봤어. 몇십 킬로는 찐 거 아니야?”

뚱뚱하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정하준은 고개를 들었다. 유지영을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주 사소한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가슴 한구석이 괜히 답답해진 정하준은 말없이 술을 따라 마셨다.

일인용 소파에 앉은 그는 다리를 자연스럽게 꼬고 있었고 매끈하게 떨어진 정장 바지는 그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잔을 기울일 때마다 손목에 찬 플래티넘 시계가 은은한 빛을 냈고, 고개를 숙인 순간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과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은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풍겼다.

옆에 있던 여자 동창들은 누구 하나 쉽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마치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될 사람처럼, 섣불리 다가서기엔 너무 멀고 조심스러운 거리였다.

이윤아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하준아, 나 친척 중에 심장 안 좋은 사람이 있는데... 혹시 언제 진료 봐? 같이 가보려고.”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정하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윤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다음 주 진료는 이미 마감됐어. 급하면 응급으로 접수해.”

“아... 그래.”

이윤아는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보고는 결국 말없이 돌아섰다.

노지성이 동창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넨 뒤, 가구 브랜드의 할인 멤버십 카드와 다도 세트를 동창들에게 선물로 나눠주었다.

“야, 너희 중에 강보람 연락되는 사람 있어? 주소라도 알려줘. 택배라도 보내게.”

정하준은 하루 종일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댔다. 술기운에 살짝 머리가 멍해져 있었고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강보람.’

그 이름이 그의 뇌리에 경고음처럼 울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보람? 그 뚱뚱한 애? 나 기억나. 고등학교 때 운동회에서 800미터 달리기 뛸 때 그 처참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하하. 진짜...”

무심코 정하준의 날카롭고 서늘한 눈빛을 마주친 배진우는 말끝을 흐렸다.

마치 목을 단숨에 조여 오는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배진우는 자신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나 싶어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주위의 수군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서이담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이 광경도 이 대화도 전혀 알 리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지 7년이 넘었지만 ‘강보람’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때 한 여자 동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보람? 나도 들은 얘긴데, 걔 죽은 것 같아...”

룸 안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에이, 설마... 죽긴 왜 죽어.”

“계속 동창회에도 안 나오고 문자 보내도 답이 없었던 거 보면... 혹시 진짜...”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라니까. 6년 전쯤이었나? 나 외할머니 병간호하러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봤거든. 배는 엄청 불러 있었는데, 몸은 깡말라서... 무슨 종양 같은 거였던 것 같아. 진짜 안쓰럽더라...”

그 이야기가 끝나자 방 안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누군가 문득 정하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반에 의사 있잖아? 하준아, 강보람 배에 종양 있었다면... 그거 불치병일 수도 있어? 내 기억엔 강보람네 형편도 안 좋았던 것 같은데, 그동안 연락도 없고... 진짜 세상 떠난 거 아니야?”

모두의 시선이 정하준에게로 향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하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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