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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우담
룸 안은 밝은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하준의 얼굴 위로 빛이 그대로 쏟아졌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손끝에 들려 있던 담배는 어느새 불씨가 지문에 닿을 만큼 짧아졌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에 스쳤다. 그것이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라는 걸 정하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이 마비된 사람처럼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정하준은 벌떡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재킷을 주워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어두운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병원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정하준은 빠르게 룸을 빠져나갔다. 마치 한시라도 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발걸음은 바람처럼 빨랐다.

노지성이 쫓아가려 했지만 이미 정하준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여자 동창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룸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혹시 너희 그 소문 들어본 적 없어?”

“무슨 소문?”

“강보람이랑 정하준 둘 다 S대 다녔잖아. 그런데 대학 시절에 3년 동안 몰래 사귀었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턱이 동시에 떨어졌다.

이윤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민주야,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강보람? 그 뚱뚱하고 못생긴 애? 정하준이 설마 아무나 만나겠냐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네.”

다른 여자 동창도 헛웃음을 지으며 거들었다.

“맞아. 너 착각한 거 아냐? 강보람이 정하준을? 그게 가능했으면 나 지금쯤 재벌가 며느리다.”

그때 옆에 있던 한 남자 동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말할 건 아니지 않아? 강보람 걔 좀 통통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못생기진 않았잖아. 피부도 하얗고 목소리도 은근히 부드러웠어.”

박민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처음엔 안 믿었는데, 우리 언니가 S대 다녔거든. 그 얘기 되게 유명했대. 뚱뚱한 여자애가 S대 남신이랑 3년이나 연애했다니까 다들 충격받았다고. 못 믿겠으면 정하준한테 직접 물어봐.”

하지만 누구도 정하준에게 그걸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사실이라 해도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박민주가 너무도 확신에 차 있었기에 다들 어렴풋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진짜 강보람 죽은 거 맞아?”

이윤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맞을걸? 아까 서준이가 얘기했잖아. 병원에서 배에 종양 생긴 거 봤다고.”

“그랬으면...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되는 거 보면.”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까지 소식이 끊길 리가 없었다. 강보람은 정말 세상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다.

...

정하준은 급히 발걸음을 옮기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상대방은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몇 걸음 휘청였다.

서이담은 반사적으로 뭔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고 비틀거리던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운 후에야 자신이 남자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죄, 죄송해요.”

서이담은 무의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본 순간 익숙하고도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또 마주칠 줄은 몰랐다.

‘세상이 이렇게 좁았던가.’

정하준도 짧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곤 서이담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그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선 차가운 향이 희미하게 흩날렸다.

서이담은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저 화장실에 다녀오려던 참이었을 뿐인데, 그토록 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이렇게 또 마주칠 줄은 몰랐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남성용 커프스단추 하나가 들어왔다. 작고 정교한 디자인이었다.

서이담은 그것을 집어 들고 무의식중에 정하준이 사라진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지금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다시 마주쳐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가 지금의 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일지도 몰랐다.

...

집에 돌아온 서이담은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 협탁 위엔 아까 주운 커프스단추가 있었다.

서이담은 손끝으로 그것을 천천히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정하준의 취향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이 브랜드를 좋아했었다. 소수만 아는 조용하고 절제된 감성이 묻어나는 고급 브랜드였다.

그때 울린 휴대폰 벨 소리가 서이담의 생각을 끊었다. 전화기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그녀는 황급히 받았다.

“여보세요, 외할머니.”

“보람아, 너 또 돈 보냈더라? 난 괜찮다니까. 시골에 있으니 쓸 데도 없고.”

할머니의 투덜거리는 듯한, 하지만 한편으론 다정한 목소리에 서이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모아두세요. 나중에 쓸 일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두 사람은 잠시 안부를 주고받았다.

요즘 서이담은 일이 너무 바빠, 개학 전에 서하율을 데리고 시골에 다녀오려던 계획을 미뤄야 했다.

대신 조금 여유가 생기면 외할머니를 모셔 와서 며칠 같이 지내볼까 생각 중이었다.

서이담에게는 이제 외할머니뿐이었다.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외할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보람아, 네 외삼촌 말인데... 뭐, 그래도 피붙이다 보니. 얼마 전에 집에 들렀는데, 너 소식 묻더구나.”

목소리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이담은 외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어렸을 적,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그 길로 연락을 끊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겨우 두 살이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돈을 잃으면 자취를 감췄고 돈을 따면 간식이나 사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서이담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손에 자라났다.

“알아요, 외할머니.”

서이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외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그녀는 외삼촌 부부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같은 도시에 살아도 말이다.

전화를 끊은 후, 서이담은 커프스단추를 지퍼백에 넣어 잘 보관해 두었다.

이번 주에도 서이담은 딸을 데리고 병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지만 일부러 정하준의 진료 스케줄을 피했다. 정하준은 매주 화요일 진료를 보기 때문에 서이담은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병원을 찾았다.

그렇다고 다시 마주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병원이라는 곳은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모두가 바쁜 얼굴에 병색이 서려 있었고 누구 하나 여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서이담은 마스크를 쓰고 서하율의 손을 잡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출입이 반복되는 가운데 간호사가 누군가를 향해 외쳤다.

“정 선생님!”

뒤쪽에서 낮고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이담은 딸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정하준이 지금 바로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그의 고른 호흡이 등 뒤에서 그대로 전해졌다.

3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서이담은 6번 진료실 앞에 줄을 섰고 정하준은 바로 옆의 8번 진료실로 들어갔다.

“엄마, 손에 다 땀이에요.”

서하율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손을 흔들었다.

서이담은 고개를 숙이며 살며시 손을 풀었다.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에 땀이 맺힌 게 눈에 들어왔다.

비록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지만 그와 다시 마주할 때마다 서이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우연이었다. 하지만 이 우연은 서이담의 마음에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그녀는 별빛마루에서 그가 떨어뜨린 커프스단추를 병원 안내 데스크에 조용히 놓고 갔다.

...

밤이 되어 서하율의 방에 들어갔을 때, 서하율은 토끼 인형을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서하율은 눈매도 코도 정하준을 꼭 빼닮았다.

서이담은 욕실로 가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피부는 희고 긴 머리는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맑은 눈동자, 은은한 핑크빛 입술. 이제는 누구도 그녀를 7년 전의 뚱뚱한 강보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성운시. 인구 천만이 넘는 이 도시에서 우연한 만남은 그저 한순간 스쳐 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

한편, 그날 저녁 정하준은 본가로 돌아왔다.

식사 시간, 정윤범은 인상을 찌푸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곁에 앉아 있던 최명희는 그런 남편을 흘겨보며 막내아들인 정하준을 바라봤다.

최명희는 정윤범과 결혼한 이듬해, 친구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남긴 열두 살짜리 아들을 입양했다. 그 아이가 바로 송도현이었다.

입양 후 개명했고 현재는 정도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최명희는 서른셋이 되어서야 딸 정예진을 낳았다.

태한 그룹의 주요 경영은 정도현과 정예진이 함께 맡고 있었다.

그리고 마흔다섯 살, 어렵게 쌍둥이 아들 정하성과 정하준을 낳았다.

하지만 20년 전, 성운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괴 사건이 벌어졌다. 두 아이는 함께 납치되었고 그중 한 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정하준은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그날을 떠올리자 최명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를 망칠 수는 없어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하준은 부모 속 한 번 썩이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유일한 걱정은 연애 문제였다. 그는 전혀 여자를 사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최명희는 이따금 막내아들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곤 했다.

이제 일흔을 넘긴 그녀는 평소엔 밝은 성격이지만 오늘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하준아, 이번 주 수요일에 백씨 가문 딸 만나는 자리 있었잖아. 그런데 왜 안 갔어?”

“네.”

“‘네’가 뭐니. 너 몇 살인데 아직도 소개팅 하나 제대로 안 하고... 백서연 그 아이 내가 어릴 때부터 봤는데 정말 괜찮은 애야. 외모야 말할 것도 없고, 백씨 가문 어르신은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단다. 싫어도 한 번은 만나봐. 너도 이제 곧 삼십이야.”

정하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어머니가 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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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준은 소파에 앉아 집안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그가 앉아 있는 소파는 매우 아담했지만 푹신하고 느낌이 좋았다. 거실도 크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따뜻함이 풍겨 나왔다.탁자 위에는 꽃 한 송이가 든 투명한 꽃병이 놓여 있었고 티비에는 서하율이 붙여둔 갖가지 모양의 스티커가 있었다.서하율은 강아지들을 안방으로 보낸 후 스케치북을 들고 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정하준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아저씨, 과일 먹을래요?”정하준은 그다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잠깐만 기다려요.”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고 서이담에게 과일을 꺼내 달라고 했다.“자, 여기.”서하율은 사과를 건네받은 후 곧장 거실로 달려와 정하준에게 건네주었다.정하준은 아주 잠깐이지만 서이담의 남편이 그간 어떤 곳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부엌에 있는 서이담을 바라보았다. 서이담은 끓고 있는 물은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목을 스트레칭 했다.그러다 더운지 외투를 벗고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일 때마다 매끈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정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매우 시원하고 단 사과였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입안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단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서하율은 정하준의 뒷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서이담을 불렀다.“엄마, 아저씨 갔어요.”서이담도 알고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으니까.정하준을 위해 끓였던 차는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서이담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찻물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컵에 따랐다. 그러고는 거실로 와 딸의 옆에 앉았다.“엄마, 아저씨는 왜 갑자기 가버린 거예요?”서하율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물었다.“아마 급한 일이

  • 다시 너의 세계로   제95화

    아파트 주민들 중 진재현과 서이담의 결혼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동네방네 떠벌릴 정도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젊은이들은 이해해 줄지 몰라도 나이 든 어르신들은 만날 때마다 혀를 차며 혼을 낼 게 분명했다.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부부 사이를 자꾸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은 그저 한 귀로 흘려들었다....드디어 집 앞에 도착했다.서하율은 지금 이 상황이 꼭 게임처럼 재밌는지 서이담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서이담도 그런 아이를 향해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자, 이제 내려와.”그녀는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늘 이렇게 다시 웃게 되었다.정하준은 조심스럽게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를 안은 채 6층을 올라왔는데도 그는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서이담은 문을 연 후 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신었다.정하준은 평온한 얼굴로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무언가를 보고는 금방 표정을 굳혔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용 슬리퍼였다. 그것도 새것이 아닌 이미 신은 흔적이 있는 슬리퍼였다.서이담네 집의 신발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이담의 신발부터 어린애 신발, 그리고 남자의 신발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정하준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서이담은 결혼을 한 유부녀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정하준은 꼭 누군가가 그의 비도덕적인 마음과 황당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아기 고양이처럼 안겨 오던 서하율도, 그가 손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던 서이담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었다.정하준은 순간, 서이담과 서하율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정하준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내 슬리퍼를 무시하고 양말만 신은 채 안으로 들어왔다.서이담은 정하준이 설마 안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벙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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