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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새로운 세계

Author: ALL장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1 00:32:46

02.

“형…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야…?”

“누구라니, 이분은 우리 집 주치의 선생님이시고 저쪽 분들은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들이잖아. 해솔아, 왜 그래? 설마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주치의…? 우리 집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

해솔은 형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주치의라니, 자신 같은 평범한 집안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단어였다. 아니, 그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 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형… 지금 몇 년도야?”

“갑자기 연도는 왜… 1952년이잖아.”

그 순간, 심장이 밑바닥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1952년. 머릿속이 하얘졌다. 청바지와 셔츠를 입고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던 자신의 현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하지만 형과 아버지의 이목구비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말도 안 돼…’

해솔은 심호흡하며 침착하려 애썼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널찍하고 고풍스러웠지만, 현대의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묵직한 목제 가구들과 벽에 걸린 예스러운 서화들까지, 모든 것이 아득한 옛 시절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해솔아, 정말 괜찮은 거냐?”

“어… 아무래도 머리를 부딪친 거 같아요. 형이랑 아버지 얼굴은 알겠는데… 나머지는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사태를 파악할 수 없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해솔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숨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괜히 딴소리했다가는 기억상실이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충격 때문에 일시적인 단기 기억상실이 온 듯합니다. 내일 병원에 오셔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어지럽지 않다면 식사는 해도 될 것 같네.”

“아, 괜찮아요. 속이 별로 안 좋아요.”

주치의의 말에 해솔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신이었다.

“그럼,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쉬는 게 좋겠어. 해솔군.”

“네…”

주치의의 말에 방 안에 모여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로 문을 열고 나갔다. 형과 아버지마저 염려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한 채 나간 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자, 해솔은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미치겠네, 진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해솔은 홀린 듯 방 한쪽에 자리한 작은 나무 창가로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창문을 밀어 열자,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주황빛 노을로 흐드러지게 물든 하늘 아래 낮게 깔린 건물들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도 익숙한 아파트 단지도 없었다. 그저 아득할 정도로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가장 해솔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단연 아버지와 형의 존재였다. 현실 속의 그들과 오차 하나 없이 똑같은 이목구비와 목소리, 심지어 이름까지. 차라리 낯선 이들의 얼굴이었다면 이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웹소설 많이 읽어둘걸…”

자신을 탓하듯 뱉어낸 혼잣말 끝에 복잡한 감정이 짙게 엉켜 들었다. 하지만 그 혼란의 틈새로 알 수 없는 설렘과 미세한 두근거림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시간여행을 꿈꾸는 욕망 같은 게 있었나…?”

이해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힌 해솔은 털썩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낡은 프레임이 비명을 지르듯 둔탁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질감마저도 묘하게 실감 나는 소리였다.

“어쩌면 좋지, 진짜…”

눈을 감고 내뱉은 중얼거림은 쓸쓸히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만약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곧 눈이 뜰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해솔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억지로 감긴 눈꺼풀 아래로 의식을 묻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해솔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는 낯선 천장이었다. 작은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세월이 묻어나는 목제 천장.

“이 정도면 욕 좀 해도 되지 않나…”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눌러 참으려 애썼지만 결국 험한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 씨발… 이게 진짜 뭐야… 나보고 어쩌라고…”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겠다던 다짐도 잠시, 억눌렸던 불안감이 둑 터지듯 밀려왔다. 해솔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방 안의 서랍과 책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일기장이나 작은 단서라도 나오길 바랐지만, 손에 쥐어진 것은 빛바랜 편지 몇 장과 낡은 진단서뿐이었다.

서류에 적힌 기록을 조합해 보니, 이 몸의 주인은 스무 살이었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을 겪다 휴학한 상태. 해솔은 편지와 진단서를 쥔 채 침대 매트리스 끝자락에 걸터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뭘 어떻게 헤쳐 나가라는 건데…”

방 안에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린 아버지가 병원에 갈 시간이라며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진료 결과 신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차트에 선명히 적힌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단어가 해솔의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억도 돌아올 거다.”

“네… 그렇겠죠.”

민식의 다정한 위로에 해솔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말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정말 기억이 돌아오기는 할까? 아니, 애초에 자신이 되찾아야 할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해솔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 낯선 시대와 삶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뿐이었다.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품고 있었지만, 이곳은 단순히 아득한 과거라 부르기에는 어딘가 오묘하게 현대적인 감각이 스며들어 있었다.

해솔이 머무는 저택은 마을 전체를 아우를 만큼 고풍스럽고 거대했으며, 탁 트인 별관과 기품 있는 마당을 갖추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아늑한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옴과 함께 서늘하고 맑은 바람이 감돌았다. 집 안은 늘 정갈하게 관리되었고 식사부터 사소한 일상의 수발까지 무엇 하나 모자람 없이 풍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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