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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지는 밤, 옛 꿈을 지우다
달이 지는 밤, 옛 꿈을 지우다
작가: 꽃솜

제1장

작가: 꽃솜
평소 늘 겁에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바위에 베인 깊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김서월의 어머니 유씨는 딸의 소식을 듣고 충격을 이기지 못해 끝내 미치고 말았다.

이현은 김서월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직접 어의를 불러오고 귀한 약재까지 내려주었다.

김서월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김수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수정아, 다친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행이구나. 아니었다면 그 역적들을 뼈도 못 추리게 만들었을 거야."

이현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애틋함이 가득했지만, 이내 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조정에서도 철저히 조사할 것이니 우리의 혼례도 미뤄질 수밖에 없어."

김수정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 삼 년이나 지났다.

황자의 목숨을 구한 공으로 김서월은 집안에서 가장 천대받던 서녀에서 온 경성이 칭송하는 여인이 되었다.

폐하가 친히 치하했고, 황후마마도 수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명문가 부인들까지 앞다퉈 그녀와 친분을 맺으려 했다.

그녀의 얼굴에 남은 흉터도 어의의 정성 어린 치료 덕에 말끔히 아물었다.

반면 한때 경성에 이름을 떨쳤던 승상부의 적녀 김수정은 유씨의 광증에 시달리며 점점 빛을 잃어 갔다.

유씨는 발작할 때마다 김수정을 때리고 욕했다.

펄펄 끓는 탕약을 여러 번 그녀의 흰 손등에 쏟아부었고, 흉한 화상 자국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

유씨는 방 안의 비녀와 찻잔마저 무기 삼아 김수정을 향해 던졌다.

김수정은 이현과 자신을 대신해 은혜를 갚는 셈이라 여기며 이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뎠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정을 좌우지하던 김수정의 외가인 임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적과 내통해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멸문의 화를 당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친정의 비보를 듣고 울화가 맺힌 채, 몇 달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김수정의 든든한 버팀목도 그렇게 무너졌다.

그녀가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는 동안 이현은 단 한 번만 찾아왔다.

그는 빈소에 들어서지 않은 채 수척해진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다행히 삼년상이 끝나자 그녀와 이현의 혼사가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씨를 진맥하던 어의가 김씨 집안 어른들과 이현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병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탕약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어의는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날마다 서월 아가씨만 찾고 있습니다. 명예가 더럽혀졌을까 두려워하고, 얼굴의 흉터 때문에 혼사길이 막힐까 걱정하다 보니 마음에 병이 든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이현에게 쏠렸다.

김수정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현을 바라보며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이현은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서월은 내 목숨을 구한 은인이다. 나 역시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서월을 황자비로 들이겠다. 그래야 유씨의 마음병도 나을 것이다."

그리고는 곁에 있던 김수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월과 혼례를 한 뒤 수정을 들이겠다."

이현의 말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김수정의 마음을 무딘 칼로 난도질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무슨 반박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삼 년 전만 해도 그녀는 승상부 적녀이자, 임씨 집안의 가장 사랑받는 외손녀였다.

이현과는 손색없이 어울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예비 황자비였다.

하지만 삼 년 뒤, 외가는 멸문했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채 나락으로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의 결정이 내려졌다.

김서월이 혼례를 올리는 날, 그녀 역시 첩의 신분으로 가마를 타고 황자부(皇子府)의 측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래, 외가가 역모죄를 뒤집어쓴 그녀에게 무슨 자격으로 정실인 황자비를 꿈꾸겠는가.

그 소식을 들은 김수정은 넋이 나간 채 저택을 떠돌았다.

늦가을 찬바람이 얇은 옷자락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려왔다.

그녀는 얼마나 걸었는지도,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석가산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김서월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도 참.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절 황자비로 맞겠다고 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이현의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너도 참. 그때 절에서 위험한 짓을 하더니 정말 절벽에서 떨어져 얼굴까지 다쳤잖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구나.

네가 날 위해 그 정도까지 했는데, 내가 널 위해 말 한마디 못 하겠느냐."

김서월은 작게 웃었다. 목소리에는 수줍음과 달콤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절 황자비로 들일 명분이 생겼겠습니까?"

이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결국 널 삼 년이나 기다리게 했구나."

김서월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그러고 보니 모든 건 우리 어머니 공이 크네요.

어머니가 삼 년 동안 미친 척하며 날마다 김수정을 괴롭혀 기를 꺾지 않았더라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했을 겁니다.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어머니의 병도 슬슬 나았다고 해야겠습니다."

김서월의 한마디 한마디는 독침처럼 김수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수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굳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스며났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은 잔혹했다.

상국사에서 벌어진 그날의 일은 처음부터 그들이 꾸민 거짓말이었다.

이현이 김서월을 황자비로 들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 둘이서 온갖 계략을 꾸며 그녀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이용한 도구에 불과했다.

슬픔이 극에 달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김수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삼 년 전, 그녀가 유씨를 돌보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유씨는 발작을 일으킨 채 그녀를 벽으로 거칠게 밀쳐 버렸다.

그녀의 뒤통수는 단단한 벽돌에 세게 부딪혔고, 그 자리에서 피를 흘렸다.

당시 진료를 본 의원이 말했다.

"머릿속 어혈이 남아 있어 완치가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들만 조금씩 잊어버렸지만 최근 들어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어떤 날은 외조부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머지않아, 이현이 누구인지마저 완전히 잊게 될지도 몰랐다.

과거조차 붙잡지 못하는 자신을 상대로, 왜 이렇게까지 일을 꾸몄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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