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말 안 들려?”
“들었어.”
“근데 왜 답을 안해?”
“답을 왜 해야하는데.”
선우가 걸음을 멈춰서는 바람에 뒤따라오는 유라와 몸이 닿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
“우욱…!”
“괜찮아…?”
놀란 유라가 다가서려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진정이 되고 나서 그는 무미건조하게 응시했다.
“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었으면 해. 반에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하거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유라가 소리쳤다.
“거짓말! 너 나 좋아하잖아.”
선우가 멈칫했다. 그 반응을 보고 유라는 자신감을 얻고 말했다.
“사람들 눈 피해서 나 보는 거 모를줄 알아?”
동요한 것도 잠시 이내 무감한 눈으로 유라를 응시했다.
“왜 사람들 눈을 피해서 보는지 몰라?”
“내가 좋은데 한은성이 있어서…”
“그 정도 가치 밖에 없으니까.”
그 말에 유라의 몸이 굳었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가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은성이 이름 말하지 마. 은성이 네가 그렇게 불러도 될 사람 아니야.”
그 말을 마치고서 선우는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점점 빨라지더니 곧 달려갔다. 그러나 유라는 한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정도 가치 밖에 없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은성보다 자신이 훨씬 예뻤다. 그리고 가정부 딸인 그녀와는 다르게 자신은 기업가 오너의 딸이었다. 물론 중견기업이라서 대기업 자제들이 많은 이곳에서 쳐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은성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그녀는 선우가 한 경고를 잊고 좋을데로 생각하기로 했다.
“날 훔쳐봤다는 걸 인정했어. 날 좋아한다는 거야. 그럼 나도 가능성이 있어.”
박선우는 너무나도 탐나는 상대였다. 한성그룹 로열패밀리라는 것 자체가 매력적인데 김선희 회장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잘생기고 키 크고 공부까지 잘한다. 사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이들은 종종 있지만 대부분 유흥에 빠지거나 문란한 연애를 즐기는 이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렇지 않았다.
“선우를 가정부 딸 따위한테 빼앗길 수 없어.”
그녀의 눈이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
조용한 교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열린 창문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를 듣고 은성이 잠에서 깼다.
“선우 아직도 안 왔나?”
그때 교실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여기서 여기서 뭐해?”
고개를 돌리니 도희가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머리가 숏컷이라서 멀리서 보면 호리호리한 남학생으로 보일정도로 중성적인 느낌이 났다.
“체한 거 같아.”
도희가 주변을 한번 스윽 둘러보니 끄덕거렸다.
“체한거 같지만 양호실은 가기 싫어서 선우 오빠가 약 사러 갔나보네.”
“어떻게 알았어?”
눈이 동그래진 은성을 보고 도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선우가 앉아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언니가 아픈데 선우 오빠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잖아. 근데 양호실이 아니라 교실에 있다는 건 언니가 가고 싶지 않았던 거고, 그러면 선우 오빠는 약 사러 갔겠지, 뭐.”
“상황 파악 한번 빠르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내가 언니를 유치원때부터 봤는데!”
피식 은성이 웃었다. 이래서 도희가 좋았다. 뭐든 시원시원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경솔한가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비슷한 신분이라는 점도 동질감을 더해주었다. 운정고는 특성화 고등학교가 아닌 일반 인문고였다. 이 학교에서의 신분은 크게나뉘었다. 선우처럼 있는 집 자제들이 첫번째였고, 그 다음은 은성처럼 그러한 집안의 고용인들의 자식이다. 도희도 후자에 속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은성이 말했다.
“언니라고 안 불러도 돼. 동갑이나 마찬가지잖아.”
“에이. 그건 아니야. 깍듯하게 언니로 모실게!”
유치원때부터 같이 다녀서 언니라는 말이 입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도희가 빠른 년생이라 초등학교는 같은 해에 입학했고, 지금 같은 고3이었다. 도희가 조심스레 은성의 얼굴을 살폈다.
“언니, 무슨 일 있었어?”
“사실은…”
어제 선희에게 유학 제안을 받았고, 오늘 아침에 경자와 있던 일들을 말했다. 얕은 한숨이 도희의 호흡에서 흘러나왔다.
“확실히 껄끄러운 상황이긴 하다. 회장님 도움 받으면서까지 유학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응. 그런데 선우는 가고 싶나봐.”
“선우 오빠는 가고 당연히 가고 싶겠지. 은근히 독점욕 있어. 아니다, 대놓고 있어.”
못마땅하다는 듯 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선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같이 있을 때 그 사실을 티낸 적은 없지만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아마 은성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애초에 알고 지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우한테 불만이 많나 봐?”
“불만이 없겠어? 내가 언니랑 있을 때 마다 불청객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날 본단 말이야. 덩치 큰 강아지가 주인 따라다니는 것처럼 맨날 언니 뒤만 졸졸 따라다녀. 언니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니야?”
말하다보니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도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선우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선우는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던데.”
“그러니까 언니는 유학 가면 안돼. 나랑 세정대 가자.”
“왜 네 마음대로 그걸 결정해?”
급하게 다녀왔는지 선우는 땀에 젖어 있었다. 은성은 얼른 일어나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뛰어 갔다 왔어?”
“응. 너 아픈 거 싫어서 뛰었어.”
아까 도희에게 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애교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 모습이 도희는 몹시도 못마땅했다.
“오빠는 손이 없어요?”
“손이 있어도 여자친구 손길이 더 좋아서.”
“우웩!”
도희가 토하는 시늉을 하자 잠시 잊고 있던 메스꺼운 감각이 돌아왔다. 이런 은성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린건 선우였다.
“얼른 약 먹어.”
“응.”
선우는 먼저 은성을 앉히고 약을 먹였다. 그 와중에도 도희에게 가라고 눈치를 주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치사하고 드러워서 가요. 가!”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자마자 그의 흡족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은성아. 우리 같이 유학가자.”
은성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입술이 초조하게 달싹였다. 긍정의 답을 기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거절할까 불안했다. 그러한 선우의 감정을 은성은 고스란히 느꼈다. 좋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둘이만 있고 싶어서 같이 가고 싶은 거야?”“응. 둘이서만 있고 싶어.”선우는 자세를 낮춰 은성을 올려다 봤다. 그 모습이 마치 선택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다른 무언가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눈빛, 그것이 용기를 불어넣었다.“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유라를 어떻게 생각해?”“그게… 무슨 소리야?”일순간 선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관계가 깨어져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처들었다. 묻지 않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피한다고 해도 앞으로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내고 마니까. 그러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가끔 네가 유라를 보고 있는 걸 봤어.”“…”“혹시 유라 좋아해?”선우가 매달리듯 은성의 손을 꼭 잡았다.“그릴리가 없잖아. 내가 유라를 좋아한다면 왜 너랑 사귀겠어.”한가지 가정이 은성의 머리속에 떠올랐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선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연인이 된지는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6살때부터 그를 알아왔다. 가끔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곤 했지만 그는 항상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주었다. 그러니 이러한 가정을 떠올리는 거 자체가 미안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선우가 말했다.“아까 담을 넘다가 최유라를 만났어. 가끔 걔가 날 거슬리게 할 때가 있어서 본거뿐이야.”유라가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걸로 은성에게 시비를 걸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시비를 거는 것도 가끔 빈정거린다던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것이 선우가 딱 달라붙어 있어 무언가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애원하듯 그가 말했다.“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마.”“미
“내 말 안 들려?”“들었어.”“근데 왜 답을 안해?”“답을 왜 해야하는데.”선우가 걸음을 멈춰서는 바람에 뒤따라오는 유라와 몸이 닿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우욱…!”“괜찮아…?”놀란 유라가 다가서려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진정이 되고 나서 그는 무미건조하게 응시했다.“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었으면 해. 반에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하거든.”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유라가 소리쳤다.“거짓말! 너 나 좋아하잖아.”선우가 멈칫했다. 그 반응을 보고 유라는 자신감을 얻고 말했다.“사람들 눈 피해서 나 보는 거 모를줄 알아?”동요한 것도 잠시 이내 무감한 눈으로 유라를 응시했다.“왜 사람들 눈을 피해서 보는지 몰라?”“내가 좋은데 한은성이 있어서…”“그 정도 가치 밖에 없으니까.”그 말에 유라의 몸이 굳었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가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그리고 다시 은성이 이름 말하지 마. 은성이 네가 그렇게 불러도 될 사람 아니야.”그 말을 마치고서 선우는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점점 빨라지더니 곧 달려갔다. 그러나 유라는 한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내가 그 정도 가치 밖에 없다고?”인정할 수 없었다. 은성보다 자신이 훨씬 예뻤다. 그리고 가정부 딸인 그녀와는 다르게 자신은 기업가 오너의 딸이었다. 물론 중견기업이라서 대기업 자제들이 많은 이곳에서 쳐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은성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래서 그녀는 선우가 한 경고를 잊고 좋을데로 생각하기로 했다.“날 훔쳐봤다는 걸 인정했어. 날 좋아한다는 거야. 그럼 나도 가능성이 있어.”박선우는 너무나도 탐나는 상대였다. 한성그룹 로열패밀리라는 것 자체가 매력적인데 김선희 회장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잘생기고 키 크고 공부까지 잘한다. 사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이들은 종종 있지만 대부분 유흥에 빠지거나 문란한 연애를 즐기는 이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렇지 않았다.“선우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용인 숙소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경자는 이미 본채로 넘어가서 볼일이 없었으나 감정이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오늘은 버스타고 간다고 할까?”학교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렸지만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도착했다. 선우하고 같이 다닐때는 걸어서 다녔다. 사실 그가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을 선희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차가 없는 것도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는 차로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정체된 도로도 싫어했다. 무엇보다 은성과 둘이서만 있기를 바랬고 그래서 걸어서 다녔다. 고3이 되면서 선희는 시간 절약을 위해 다시 한번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권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선희는 더 이상 뭐라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가끔 그녀는 친아들인 선우보다 은성을 더 편하게 여겼다. 은성은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핸드폰을 응시했다. 선우에게 문자를 보내는 게 나을지, 전화를 하는게 나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늘은 15분이나 빨리 나왔네.”싱그러운 웃음에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선우가 저렇게 웃을때면 온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매정한 여자친구가 나 버리고 갈까봐.”두고 가려고 했던 게 맞아서 조금 뜨끔했다. 그걸 보고 선우가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냈다.“장난으로 한 말인데 정말 버리고 가려고 그랬나봐?”“그냥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알았어. 오늘 그냥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응?”오늘은 혼자 가고 싶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이 나오기도 전에 선우가 손을 잡아끌었다.“가자.”“…알았어.”마지못해서 하는 것일지라도 선우는 그녀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놓지 않을 것이다. 현재이든 미래이든 그녀는 자신의 곁에 있어야 했다.*4교시 종이 치자마자 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우르르 달려나갔다.“비켜!”“너나 비켜!”그 난리통에서 은성은 자유로웠다. 기
“고민할게 뭐가 있어. 유학 가서 잘 배우고 선우랑 같이 한성그룹 들어가면 되는 거지.”“엄마, 유학가고 싶은 생각 없어. 한성그룹에 들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고.”경자는 은성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남들은 다 가고 싶어서 난리치는 유학, 너는 왜 가기가 싫어?”“내 돈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 회장님한테 빚지고 싶지 않아.”“네가 잘 해서 한성그룹에서 일하면 되는 거야.”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은성이 무엇을 걸려하는지 경자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다 먹었어. 등교 준비할게요.”벌떡 일어난 은성은 방으로 들어갔다.“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화를 내는 거야!”경자도 감정이 상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선우가 다 듣고 있을 줄은 말이다.*어제 은성이 방에서 나가버리고 선우의 기분은 내내 좋지 않았다. 마른 세수를 하면서 자책했다.“박선우… 대체 왜 그러는 건데.”은성이 너무 좋았다. 다른 사람들 하고의 접촉은 불쾌하기 짝이없었다. 심지어 호흡이 닿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은성하고 있으면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계속 닿아있고 싶었다. 깊게 얽혀들고 싶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은성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은성과 입을 맞추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 멍청이처럼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됐다.“근데 아직 대학에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인생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유학, 대학 진학보다 선우에게는 이게 더 큰 문제였다. 은성이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리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만큼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만 조급해졌다.“하아…”푹 한숨이 세어나왔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부푼 아래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움이 될까 싶어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 아래에는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검은색 스프링 노트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으니까…”그는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하는 유치원 시절에도, 가까운 친구이던 시절에도, 연인이 된 이후에도 단 한번조차고 말한적이 없었다. 은성이 용기내어 말해도 그는 사랑한다고 말한적이 없다.“내가 괜히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는 건가?”겨우 한마디 말에 불과한데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의 행동은 ‘사랑한다’는 말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가끔 그의 시선이 유라에게 향할 때 알 수 없는 불안이 커졌다.“내가 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그때 지이잉 핸드폰이 울렸고 바로 확인했다. 선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미안해.]글자임에도 음성이 자동으로 지원됐다. 풀이 죽은 말투, 쭈욱 나온 입이 저절로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꼭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문자만 보냈다.[괜찮아. 사과해줘서 고마워.]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제야 조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다음날 아침, 은성은 새벽 일찍 일어나 경자와 함께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팔팔 끓인 따듯한 누릉지에 오징어 젓갈을 곁들여서 먹었다. 급하게 먹는 은성을 보면서 경자가 눈살을 찌푸렸다.“천천히 먹어. 나는 음식하러 가야하지만 넌 천천히 먹고 도련님이랑 같이 나가면 돼.”“응. 알았어.”경자는 선우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고용인으로서는 전혀 문제 없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성의 남자친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그 호칭이 거슬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 시작됐다.“어제 도련님 기분 안 좋아 보이더라. 무슨 일 있었어?”“일은 무슨.”뜨끔했지만 인정한다면 한소리 들을 것이기에 오리발을 내밀었다.경자는 예리한 눈으로 얼굴을 쓰윽 살피더니 알겠다는 듯 말했다.“너 또 도련님 서운하게 했구나?”“내가 무슨 선우를 서운하게 만들어.
“네가 가면 나도 가.”“내가 안 가면?”“나도 안가.”어이없다는 듯 그녀가 피식 웃었다.“그런게 어딨어.”“여기 있어.”고집 부리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회사 물려받으려면 유학 다녀와야하는 거 아니야?”“너랑 떨어지면서까지 가야할 정도로 회사가 의미있지 않아.”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 입을 열었다.“그럼 유학 가고 싶어?”“응. 가고 싶어.”선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왔다.“왜 가고 싶은데?”“같이 유학 가면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잖아.”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은성이 헛웃었다.“우리 지금도 충분히 붙어있어. 같은 집, 같은 학교, 같은 학원에 있잖아. 심지어 등하교도 같이 하는데?”말이 이어질수록 선우의 입이 조금씩 나왔다.“같은 집에 살아도 너는 별채에 있어. 집에서 이렇게 맨날 둘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학교에서는 다른 애들하고 다 같이 있어. 학원도 마찬가지잖아. 이게 어떻게 붙어있는 거야? 설마 은성이 너는 나랑 더 붙어있고 싶지 않아?”“그럴리가… 붙어있고 싶어. 나도.”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은성도 그렇게 느끼진 못했다. 붙어있어도 고3이었고 온전히 둘이서만 있는 시간은 부족했다. 그나마 작년에는 데이트를 하러 자주 나갈 수 있었지만 고3이 되고부터는 선우의 방에 들어오는 것 외에는 둘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정말 붙어있고 싶어? 공부하는데 정신 팔린 거 같던데.”“정말 같이 있고 싶어.”“그럼 왜 같이 공부 안 해?”선우가 조르듯 은성의 옷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 그간 궁금했는데 참아온 모양이다. 은성은 부드럽게 선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같이 공부하면 신경이 다 너한테로 가. 어떻게 공부에 집중해?”그 한마디에 그의 입꼬리에 춤을 췄다. 그러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말을 이었다.“그렇게 내가 좋아?”은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정말 좋아. 사랑해.”대답을 기다리듯 그녀가 지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