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핀을 먼저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마시오.”피렌체 공방에 들어서자 마테오가 경고했다. 압류표는 사라졌지만 문 옆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보여 줄지 결정하는 것도 당신 몫입니다.”“돈을 보냈으니 마음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그 돈은 기금 계약에 따라 보냈습니다. 오늘 결정과 관계없어요.”마테오는 내 뒤를 보았다. 안전팀은 공방 밖에, 재하는 별도 방에 있었다. 나는 통역사 한 명과 빈 서류가방만 들고 들어갔다.“계약서를 가져오지 않았나?”“당신이 부른 것은 서명할 사람이 아니라 볼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그는 대답 대신 작업대로 갔다. 황동장식 하나를 완성한 뒤 내게 이음새를 찾으라고 했다.“여기인가요?”“틀렸소. 기계로 찍은 사람은 늘 겉선부터 보지.”그가 안쪽의 미세한 홈을 보여 줬다. 수선은 흠을 감추는 일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어디를 고쳤는지 알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서지안도 처음에는 이음새를 숨기려 했소.”“어머니를 언제 만났습니까?”“루미에르 도면이 세상에 나오기 전.”마테오는 오래된 편지상자를 꺼냈다. 상자 봉인은 북극성 원장번호가 아니라 일곱 도시의 공방기호였다.“열어도 됩니까?”“함께 여는 겁니다.”그가 자기 열쇠를 넣고 나는 펜던트를 홈에 맞췄다. 상자 안에는 황동 핀과 서지안의 편지 일곱 통이 있었다.첫 편지는 마테오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기록을 지키는 사람이 기록의 주인이 되는 순간, 핀을 감추세요.’편지에는 서지안이 아틀라스 초기 자문회의에서 독점서버를 반대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업들은 한곳에 모아야 위조를 막을 수 있다고 했고, 어머니는 한곳을 빼앗기면 모든 진실을 잃는다고 답했다.“그때 로랑도 있었습니까?”“젊은 법무책임자로 참석했소.”“어머니를 기록으로만 안다고 했습니다.”“그가 직접 질문했소. 장인이 죽으면 기록은 누구 것이냐고.”로랑은 첫 만남부터 거짓말했다. 마테오의 기억만으로 단정하지 않고 당시 참석명단과 회의비 영수증을 확인하기로 했다.“내 말을 증거로 쓰려면 내가
“M-0가 문서를 승인했다는 게 무슨 뜻이죠?”송금표의 도장은 사람 서명이 아니라 서버결재 코드였다. 원장에 숨어 있던 관찰계정이 위조문서 제작에도 쓰인 셈이었다.“사용자 기록을 열 수 있습니까?”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수탁관리자 권한 밖입니다.”“그 답을 십칠 년 동안 한 겁니까?”“네. 그리고 그게 제 실패입니다.”그는 변명 대신 자기 포렌식 승인권을 외부 조사단에 넘기겠다고 했다. 사임해 빈자리를 만드는 대신, 조사받는 수탁관리자로 남겠다는 선택이었다.“감독 실패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합니까?”“신원업체 확인값을 원본처럼 믿었고, 사망·폐업 계정은 표본감사에서 뺐습니다.”“로랑 지시는 받았습니까?”“직접 지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틀라스가 인증한 업체라는 이유로 질문을 줄였습니다.”엘레나는 과거 성과급과 평가자료도 조사단에 열었다. 원장 정합률이 높을수록 좋은 평가를 받아, 복잡한 이의제기를 ‘수익자 요청 삭제’로 정리할 유인이 있었다.“직원 개인에게 책임을 넘기지 마세요.”“제 결재선부터 제출하겠습니다.”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이 곧 면책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자리에서 증거를 지키는 일이 도망친 사임보다 필요했다.“제가 조사단을 고르면 또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누가 고르죠?”“도시대표 셋과 독립 개인정보감시인이 공개입찰로 뽑게 하겠습니다.”나는 동의하되 엘레나를 내 편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서로를 믿어서가 아니라 혼자 증거를 만질 수 없게 만든 동맹이었다.외부 조사단은 M-0가 접속한 계정을 역순으로 복원했다. 공통점은 돈이 아니라 상태값이었다. 사망, 폐업, 장기 미접속으로 처리된 장인 여섯 명의 기록이 같은 날 M-0를 거쳤다.“여섯 명 모두 채무자입니까?”“둘은 빚이 없었습니다.”“표결 기록은요?”“전부 독점안에 반대했습니다.”마테오처럼 살아 있는 사람도 있었고, 공방을 다른 이름으로 이어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 명은 실제로 사망했지만 유족이 기록을 신탁에 남기겠다고 한 의사가 지워졌다.서울
“기사의 송금표가 내일 날짜야.”은채가 피렌체로 떠나기 전 전화를 걸었다. 나는 가짜 화면을 센터가 맡아 분석하겠다고 하지 않았다.“독립기금 입찰과 관련이 있을까?”“유출 사본은 기금 법률검토 자료예요. 센터가 입찰하면 당신도 이해관계자가 돼요.”“그럼 내가 직접 보지 않을게.”내가 회복센터 대표라는 이유로 아내의 신탁을 무료로 돕는 순간, 누구도 우리 판단을 분리해 믿지 못할 터였다.센터 운영위원회를 열었다. 국제 장인 채무조정 설계 입찰에 참여할지, 대표인 내가 회의에서 빠질지부터 물었다.“대표님이 제일 경험 많습니다.” 한정우가 말했다.“경험이 있어도 이해충돌은 남습니다.”“아예 지원하지 않으면 센터 직원들 기회도 없어집니다.”“그래서 내가 결정하지 않겠습니다.”운영위원 다섯 명 가운데 피해기업 대표 둘과 외부위원 한 명이 참여를 찬성했다. 조건은 내가 제안서 작성·가격·선정 이의절차에서 빠지는 것이었다.“선정되면 대표님은 무슨 일을 합니까?”“공개 교육자료 검토만 하겠습니다. 수익자 개인정보와 표결 자료는 보지 않고요.”“배우자에게도요?”“은채도 내게 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그날 저녁 우리는 같은 화면에서 두 계약을 보지 않았다. 은채는 피렌체 일정만, 나는 센터의 참여결정만 말했다.“센터가 떨어져도 섭섭해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물었다.“내가 고르는 입찰이 아니에요.”“당신 회사가 출자했잖아.”“그래서 더더욱 결과를 먼저 알 수 없어요.”“알겠어. 나도 당신에게 심사 진행을 묻지 않을게.”센터 제안서에는 성공보수를 넣지 않았다. 장인의 표가 복구되거나 아틀라스 계약이 무효가 돼도 추가 돈을 받지 않았다. 우리가 맡는 것은 채무구조 설계뿐이었다.표준계약은 채무감면과 표를 분리하고 상담기록 자동전송을 금지했다. 관리비가 늘어도 사람의 선택을 담보로 쓰지 않는 비용은 줄이지 않았다.한정우는 제출 직전 이해충돌 공개문을 읽었다.“이건우 대표는 북극성 보호자 서은채의 배우자이며, 태림 전 대표다.”“전부 그대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마테오 로시는 영상통화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아틀라스 원장에서는 사망자였지만, 그는 자기 공방에서 황동 장식을 두드리고 있었다.“오늘 날짜를 증명해 달라는 말부터 하지 않겠습니다.”“이미 세 사람이 신문을 들고 오라고 했소.”“현지 공증인이 직접 방문하게 해도 됩니까?”“내가 고른 사람이라면.”마테오는 피렌체 장인조합 공증인을 불렀다. 신분증, 작업장 임대계약, 손의 오래된 화상자국까지 대조했다. 생존증명은 그에게 모욕이었지만 계정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다.공증인은 마테오가 오늘 만든 황동장식의 무게와 각인도 기록했다. 기존 작품사진을 재생한 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원재료 상자의 실시간 봉인번호까지 찍었다.“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마테오가 물었다.“충분하고도 남습니다.”“그런데 왜 내가 살아 있음을 내가 입증해야 하지?”“원래는 사망을 올린 쪽이 증명했어야 합니다. 그 순서를 되돌리는 절차도 요구하겠습니다.”우리는 그의 복귀만 처리하지 않고 앞으로 의료기관·가족 공증 없이 사망값을 입력할 수 없게 임시규칙을 세웠다. 한 사람을 살리고 같은 문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누가 당신 사망을 알렸는지 아십니까?”“병원에서 전화 한 통 받은 적 없소.”그가 받은 것은 아틀라스의 ‘계약 종료 감사’ 메일뿐이었다. 채무를 모두 갚아 계약이 끝난 줄 알고 파일도 보관했다.“상환 영수증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보여 주되 당신 회사에는 주지 않겠소.”“독립기금 수탁자에게만 제출하세요.”영수증에는 원금과 이자가 모두 정산됐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지급 이틀 뒤 사망증명서가 발급되고 기록이 넘어갔다.발급업체는 메디패스 행정서비스였다. 병원 대신 보험·신원 서류를 확인하는 회사로, 가짜 대리인의 손바닥 인증도 승인한 곳이었다.메디패스 기록은 폐쇄된 병동에서 마테오가 숨졌다고 꾸몄고, 담당의 서명도 공개 초청장에서 잘라 왔다. 보험금 청구는 없었다. 목적은 그의 표와 기록뿐이었다.
“수선기록은 담보가 아닙니다.”아틀라스 법무팀은 기록도 경제적 가치가 있으니 양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일곱 계약은 언어도 법률도 달랐지만 자동양도 문장만 똑같았다.“같은 원문을 번역한 겁니까?”“각 도시 법무사가 작성했습니다.”“그런데 오탈자 위치까지 같네요.”재하는 ‘영구 보존’을 ‘영구 보전’으로 잘못 쓴 단어를 표시했다. 독립계약처럼 꾸몄지만 하나의 서식을 복제한 흔적이었다.아미나는 페스 계약의 아랍어본을 내밀었다.“여기에는 고객정보라는 말이 없습니다.”프랑스어 부속서에는 소유자 이름과 연락처까지 양도한다고 적혀 있었다. 서명 때 보여 준 번역에서 빠진 문장이었다.“두 원문을 같은 효력이라고 확인한 사람은요?”“아틀라스 지정 번역사입니다.”번역사는 권도진 법무법인의 해외협력업체 소속이었다. 계약과 위임장, 신원확인이 같은 공급망에서 만들어졌다.나는 일곱 계약을 하나의 피해로 뭉개지 않았다. 도시마다 어떤 문장이 빠졌고 어떤 압박을 받았는지 장인들이 직접 적게 했다.“피해표에는 실제 읽은 언어, 설명받은 말, 서명 전 끊긴 거래, 서명 뒤 잃은 권리를 각각 적습니다.”같은 계약이라도 누군가는 임대료를, 누군가는 병원비를, 누군가는 자녀의 견습자리를 압박받았다.아미나는 자기 계약을 첫 사례로 공개했다. 자신이 대표라 다른 사람보다 덜 속았다는 체면을 버리고, 프랑스어 부속서를 읽지 못한 사실을 적었다.“이 기록이 나를 무능하게 보이게 할 겁니다.”“숨기면 다음 사람도 같은 문서에 서명합니다.”“그래서 올리는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그대로 적겠습니다.”피해자가 은채에게 충성해 진실을 말한다는 서사는 만들지 않았다.“기억나는 대로 쓰면 됩니까?” 한 대표가 물었다.“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으세요. 우리에게 유리하게 맞출 필요 없습니다.”“계약서와 기억이 다르면요?”“둘 다 남깁니다.”아미나는 피해목록 첫 칸을 ‘빚’이 아니라 ‘빼앗길 기록’으로 바꿨다. 돈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열두 표 중 일곱 표의 채권자는 나입니다.”로랑의 말이 장인대표들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아크 임원은 채권을 통째로 사자는 안을 올렸다. 만기 전에 원금을 갚으면 표를 즉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얼마가 필요합니까?”“전부 인수해도 아크에 큰 금액은 아닙니다.”“금액 말고 대가를 묻는 겁니다.”“채무만 사는 겁니다. 표는 장인에게 돌려주고요.”“그 표로 내 제안을 지지하면 어떻게 보이죠?”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돈으로 풀어 준 표는 법적으로 자유로워도 내게 빚진 마음까지 없앨 수 없었다.아미나가 원격화면에서 물었다.“돈을 받지 않으면 우리 공방이 닫힙니다. 의심을 피하려고 우리를 기다리게 할 겁니까?”“아니요. 돈을 주는 기관과 표를 관리하는 기관을 갈라놓겠습니다.”“결국 자금은 당신 것이죠.”“누가 얼마를 냈는지 의결기관이 모르게 만들죠. 아크도 여러 후순위 출자자 중 하나로만 들어갑니다.”독립 구조기금 초안을 화면에 띄웠다. 기금은 채무를 갚되 의결권을 받지 않았다. 돈을 돌려받는 순서도 투표 결과와 무관했고, 장인이 아틀라스 편을 들어도 금리를 올릴 수 없었다.채무를 갚은 뒤 표가 돌아오는 날도 기금이 정하지 못하게 했다. 원장 관리자가 상환확인과 동시에 자동 복구하고, 수탁자가 미루면 도시대표가 직접 이의를 낼 수 있었다. 돈을 준 사람이 표를 돌려주는 은혜까지 소유하지 않는 구조였다.“장인이 상환을 못 하면요?”“영업수익 안에서 갚되 개인집과 도구는 잡지 않습니다.”“손실은 출자자가 전부 지고요?”“네. 그 위험을 알고 들어오는 돈만 받습니다.”출자자가 홍보에 장인 이름을 쓰는 것도 금지했다. ‘우리가 살린 공방’이라는 문장으로 새 빚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운영자는 누가 고릅니까?”“장인 세 명, 소비자단체 한 명, 채무조정 전문가 한 명이 공개선정합니다.”“서 대표 배우자의 센터가 들어오나요?”“입찰은 할 수 있지만 자금과 표결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해충돌도 전부 공개하고요.”건우에게 초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