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림그룹의 며느리 서은채는 삼 년 동안 남편 이건우의 회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렸다. 그러나 태림가는 은채가 만든 전략을 백나리의 공으로 돌리고, 건우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 믿는 나리를 매번 아내보다 먼저 선택한다. 끝내 그는 경영권을 지키겠다며 은채에게 ‘육 개월짜리 서류상 이혼’을 요구한다. 은채는 위자료도, 재산도 받지 않고 서명한다. 건우가 모르는 사실은 하나다. 태림의 세 차례 유동성 위기를 막아준 아크파트너스의 창업자도, 태림의 운명을 바꿀 전환사채의 실소유주도, 유성금융 창업주의 마지막 상속녀도 모두 은채라는 것. 긴급 주주총회의 문이 열리고, 어제 버림받은 아내가 최대 채권자석에 앉는다. “이제부터 대표님이 제게 보고하세요.”
View More“대표님, 개장 테이프를 잘라 주십시오.”일 년 뒤, 루미에르관의 문 앞에서 나는 가위를 받지 않았다. 대신 화재 희생자 유족과 복원팀 막내 직원에게 양쪽 손잡이를 건넸다.“이 문은 제가 혼자 연 게 아니니까요.”금빛 테이프가 끊어지자 복원된 아치 너머로 햇빛이 쏟아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는 서지안의 원본 설계와 이름, 그 아래에는 화재 희생자들의 명패가 같은 높이로 놓여 있었다.기자가 물었다.“태림을 인수한 최종 목적을 이룬 겁니까?”“인수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지워진 책임과 이름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 목적이었어요.”“향후 경영권을 가족에게 승계할 계획이 있습니까?”“태림의 자리는 혈연이 아니라 검증된 절차로 정합니다.”새 전문경영인과 직원 대표가 내 옆에 섰다. 아크는 최대주주로 감시와 투자를 맡았고, 일상 경영은 독립 이사회가 책임졌다. 누구도 한 사람의 호의에 회사를 기대지 않았다.위조 상품 피해 고객에게는 보상이 모두 끝났고, 해고될 뻔했던 협력사 직원들도 새 공급망에 복귀했다. 루미에르의 첫해 수익 일부는 화재 안전기금과 신진 디자이너 지원에 쓰기로 했다.“서지안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려는 겁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아니요. 이름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지원 사업도 심사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나는 어머니의 명예마저 내 권력을 장식하는 간판으로 쓰지 않았다.서문석은 어머니 사진 앞에 흰 꽃을 놓았다.“지안아, 네 딸이 나보다 낫구나.”“엄마가 들으면 당연한 소리라고 했을걸요.”외조부가 웃었다.“오늘 그 녀석도 왔느냐?”“초대했어요. 올지는 본인이 선택하고요.”건우는 행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일반 초대객 출입구로 들어왔다. 태림 임원 배지도 수행원도 없었다. 그가 지난 일 년간 세운 협력사 회복센터 직원들과 나란히 서서 박수를 쳤다.우리는 일 년 동안 서른두 번 만났다. 미술관에서 시작해 시장 골목과 도서관, 서로의 일터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다툰 날에는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다음 약속 시각을
“커피를 마셔도 아무것도 약속하지는 않아요.”내 말에 건우는 의자를 당기던 손을 멈췄다.“약속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요.”“알아.”우리는 회사도 본가도 아닌 작은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그가 내 취향대로 주문하려 하자 나는 먼저 메뉴를 골랐다. 건우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고쳤다.“예전엔 내가 뭘 마시는지 안다고 생각했지.”“틀린 걸 알아도 묻지 않았어요.”“당신이 맞춰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그건 믿음이 아니라 편리함이었죠.”“맞아.”나는 가장 오래 남은 응급실 밤을 꺼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 정말 괜찮다고 믿었느냐고 물었다.건우는 확인하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듣지 않았다고 했다. 호텔 사진에 침묵한 것도 회사를 핑계로 내가 견딜 거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같은 계산을 또 하게 되면 즉시 말하겠다고 했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결과까지 숨기지 않겠다고.사과를 듣자 상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제 자기 의도를 선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그 정확함이 내가 확인하고 싶던 변화였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반지도 편지도 없었다. 계약이 끝난 뒤 다른 지역의 협력사 회복팀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기차표만 있었다.기차표는 다음 날 것이었다. 건우는 곁에 남아 기다리는 일도 압박일 수 있어 떠나려 했다고 설명했다.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또 혼자 정했느냐고 묻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떠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에, 나는 떠나 달라고 한 적부터 물었다.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묻는 것부터 해야 했다.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여기 남아도 될까?”“회사로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알아. 그건 내가 요구할 수 없어.”“내 대답은 아직 남았고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건우는 기차표를 접지 않은 채 말했다.“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해.”피하지도, 붙잡지도 않는 고백이었다.고백은 너무 늦었고, 나는 그 늦음을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이
“이 보상금, 건우 씨 개인 자산에서 나온 겁니까?”법무팀장은 답을 망설였다. 나는 서지안 저작권 반환 등기와 화재 피해 보상 명세를 다시 펼쳤다.“사실대로 말하세요.”“신탁이 매각한 이건우 씨 지분 배당권과 자택 처분금입니다. 회사 책임분과 분리해 부족액을 채웠습니다.”“왜 제게 보고하지 않았죠?”“서 대표님께 알리는 조건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감사위원회 승인은 받았습니다.”나는 건우를 계약 종료 면담에 불렀다. 기록 담당자와 직원위원도 동석했다. 마지막 날까지 계약 조건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보상과 IP 반환을 왜 숨겼어요?”“숨긴 게 아니라 필요한 절차에만 보고했습니다.”“당신 이름을 빼 달라고 했잖아요.”“서지안 선생의 이름을 되찾는 문서에 제 이름이 앞설 이유가 없습니다.”태림 책임분까지 왜 개인 자산으로 채웠느냐고 묻자, 건우는 회사 책임분과 자신이 재직 중 묵살한 지연 손해를 분리했다고 설명했다.집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는 내 말에 그는 필요의 기준을 낮춰 잡으면 피해자가 또 양보해야 한다고 답했다.직원위원이 정산표를 확인했다. 건우는 법원이 인정한 최저액이 아니라, 실제 대출이자와 폐업 비용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올렸다. 어느 항목에도 관계 회복 비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내가 알면 마음이 움직일까 봐 그런 건가요?”건우가 잠시 침묵했다.“그 가능성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어.”기록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 반말이 나온 걸 깨달은 그가 말을 고쳤다.“죄송합니다. 이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보상을 하면 과거가 지워질 거라고 생각해요?”“아니요. 피해가 줄어들 뿐입니다.”“나와 다시 시작하지 못해도 계속할 수 있어요?”“이미 그렇게 해 왔습니다.”그 대답에는 원망도 자랑도 없었다. 계약직 사원으로 출근한 반년, 거절한 피해자를 다시 설득하지 않고 입금으로 증명한 날들, 내게 보내지 않은 보고서가 그 뒤에 있었다.나는 확인을 위해 화재 피해자 보상위원회 기록을 직접 봤다. 건우는 한 유족이 돈을 거절하자
“대표님 판단으로 개장이 무산되면 누가 책임집니까?”비상 이사회가 새벽 세 시에 열렸다. 중단된 정산 화면은 붉었고, 일부 이사는 내가 누른 비상 키부터 문제 삼았다.“제가 책임집니다.”건우가 마이크를 켰다.“중단을 권고한 실무자는 접니다. 고객 정보가 외부 계좌로 넘어갈 위험을 확인했습니다.”“자문이 대표 대신 판단했다는 겁니까?”“아닙니다.”건우는 화면에 자신의 보고서를 띄웠다.“선택지를 보고한 뒤 서은채 대표가 결정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제가 공을 가져갈 일도, 책임을 대신 빼앗을 일도 아닙니다.”나는 그를 대신해 감사하지 않았다.“중단하지 않았다면 십일 분 뒤 고객 결제정보 칠만 건이 파산 업체의 압류 서버로 복제됐습니다.”보안팀 분석이 뒤따르자 이사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은 문제는 사십팔 시간 안에 대체 정산망을 세우는 일이었다.건우가 네 가지 복구안을 제시했다. 가장 빠른 것은 그가 과거 계약한 업체에 예외 접속을 요구하는 안이었다.직원위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업체는 전 대표님 인맥입니다. 다시 개인 관계에 기대는 방식은 싫습니다.”“합리적인 반대입니다.”건우는 제 안을 직접 화면에서 지웠다.“제 참여 자체가 업무를 방해한다면 지금 물러나겠습니다. 인계 자료는 모두 남기겠습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나를 보며 붙잡아 달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나는 직원위원에게 물었다.“이건우 자문이 지시권 없이 기술 인계만 맡는 안에는 반대합니까?”“그 조건이라면 아닙니다.”“그럼 사람에 대한 호오가 아니라 합의한 역할대로 갑니다.”대체안은 국내 결제사 두 곳에 거래를 나누고, 태림 직원이 직접 브랜드 코드를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더 들지만 어느 한 사람이나 업체에도 권한이 몰리지 않았다.건우는 직원들에게 자신이 만든 코드표부터 의심하라고 했다. 예전 예외 항목이 섞였을 가능성도 먼저 밝혔다.실제로 신입 사원이 수수료 우회 코드를 찾아냈다. 지우면 속도가 삼십 퍼센트 떨어지고 자문 실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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