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버린 아내가 태림을 샀다

당신이 버린 아내가 태림을 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By:  POTO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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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림그룹의 며느리 서은채는 삼 년 동안 남편 이건우의 회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렸다. 그러나 태림가는 은채가 만든 전략을 백나리의 공으로 돌리고, 건우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 믿는 나리를 매번 아내보다 먼저 선택한다. 끝내 그는 경영권을 지키겠다며 은채에게 ‘육 개월짜리 서류상 이혼’을 요구한다. 은채는 위자료도, 재산도 받지 않고 서명한다. 건우가 모르는 사실은 하나다. 태림의 세 차례 유동성 위기를 막아준 아크파트너스의 창업자도, 태림의 운명을 바꿀 전환사채의 실소유주도, 유성금융 창업주의 마지막 상속녀도 모두 은채라는 것. 긴급 주주총회의 문이 열리고, 어제 버림받은 아내가 최대 채권자석에 앉는다. “이제부터 대표님이 제게 보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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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내 목걸이를 한 여자
백나리의 목에서 은빛 나침반이 흔들렸다.샴페인 잔을 들던 내 손이 멎었다. 오늘은 건우와 나의 세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잃어버린 어머니의 유품이 다른 여자의 쇄골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예쁘죠, 형님?”나리가 펜던트를 손끝으로 들어 보였다. 중앙홀의 조명이 닿자 낡은 은 표면에 작은 불꽃이 일었다.“그 목걸이, 어디서 났어요?”“건우 오빠가 빌려줬어요. 오늘 드레스엔 이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숨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결혼한 뒤에도 단 한 번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녀는 자랑처럼 가볍게 흔들었다.건우가 귀빈 인사를 마치고 다가왔다.“은채야, 왜 그래?”“당신이 저걸 가지고 있었어?”내 시선을 따라간 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그는 곧 주변의 카메라부터 확인했다.“행사 끝나고 얘기하자.”“지금 돌려줘.”“나리가 오늘 재단 대표로 서잖아. 협찬 드레스에 맞출 장신구가 필요했어.”“그래서 내 것을 허락도 없이?”그가 목소리를 낮췄다.“당신 것도 아니야. 십칠 년 전 화재 때 나리가 떨어뜨린 거야. 내가 보관하고 있었고.”나는 웃지 못했다. 그날 불길 속에서 펜던트를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다. 연기 속에서 열일곱 살 건우의 팔을 내 어깨에 걸고, 타는 창고 바닥을 기어 나오던 나.“지금 중요한 건 지난 기억이 아니야. 당장 확인할 게 있어.”“안쪽을 보여줘요.”나리는 한 발 물러섰다.“남의 목걸이를 왜 함부로 만지려고 하세요?”“잠금장치 안쪽만 보면 돼요.”“은채야.”건우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보다 익숙해서 더 아팠다. 늘 나를 달래는 손으로, 그는 번번이 다른 사람을 보호했다.“오늘 태림문화재단 기부자들이 다 왔어. 소란 만들지 마.”“소란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알아.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참아 줘.”“당신은 늘 이번 한 번만이라고 해. 회사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나리에게 빚진 목숨을 위해.”나는 손목을 빼고 나리에게 다가갔다.어머니의 물건을 되찾고 싶다는 말조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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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아내의 자리는 없었다
내 이름표는 식탁 맨 끝에 놓여 있었다.건우의 오른쪽에는 최명희, 왼쪽에는 백나리. 법적 아내인 내 자리는 수행비서와 문에서 가장 가까운 말석 사이였다.“자리 잘못 놓인 것 같네요.”내가 이름표를 들자 명희가 찻잔을 내려놓았다.“내가 정한 자리야.”“오늘 가족 조찬이라고 들었는데요.”명희는 루미에르를 맡은 나리가 건우 옆에 앉아야 한다며 내 공식 직함이 없다는 점을 들먹였다.나리가 난처한 얼굴을 흉내 냈다.“형님, 제가 끝으로 갈까요?”그러면서도 의자를 당긴 손은 놓지 않았다.“앉아. 회의 늦어진다.”건우의 한마디에 나리는 바로 앉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 끝자리에 앉았다. 여섯 걸음 남짓한 식탁이 이상하리만큼 길었다.직원이 수프를 놓자 명희가 곧바로 말했다.“은채야, 어제 나리한테 사과해.”“제가 뭘 사과하죠?”“기자들 앞에서 목걸이를 낚아챘다며. 재단 얼굴에 먹칠할 뻔했잖아.”“제 어머니 물건인지 확인한 겁니다.”명희는 증거도 없이 남의 물건을 탐내는 건 천박하다며, 내 배경까지 끌어내려 비웃었다.은수저가 접시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나는 나리에게 시선을 옮겼다.“잠금장치 안쪽의 J.A.가 누군지 설명해 봐요.”“오래된 장신구니까 전 주인 이니셜이겠죠.”“전 주인 이름은?”“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모르면서 십칠 년 전부터 당신 것이라고 했어요?”나리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명희가 대신 냅킨을 탁 내려놓았다.“지금 애를 심문하니?”“확인하는 겁니다.”“사과부터 해.”나는 건우를 봤다. 그는 태블릿에 뜬 긴급 자금 보고서를 읽는 척했다.“당신도 그렇게 생각해?”긴 침묵 끝에 그가 화면을 껐다.“나리도 당황했을 거야. 어머니 말씀대로 한마디 하고 끝내.”“내가 틀렸다는 뜻이네.”“그런 뜻이 아니라, 오늘 브랜드사 임원들이 와. 집안에서 잡음 난 것처럼 보이면 안 돼.”“또 회사 때문이야?”“이번 한 번만.”그 말을 들은 순간 오히려 마음이 조용해졌다. 어제 내 손목을 잡았던 사람도,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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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그 기획서는 내가 썼다
발표 화면 첫 장에 백나리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루미에르관 재개장 전략, 총괄 백나리.’ 그 아래 펼쳐진 건 내가 반년 동안 만든 기획서였다.나는 회의실 문을 열었다.“발표 중입니다.”나리가 웃으며 나를 막았다. 브랜드사 임원들과 태림 경영진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알아요. 제 기획서를 발표 중이니까.”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은채야, 나가서 얘기해.”“이 자료를 나리 씨에게 줬어요?”“회사 자료야. 누가 발표하든 프로젝트가 살아야 해.”“누가 만들었는지도 회사에는 중요하지 않나?”명희가 차갑게 끼어들었다.명희는 직함 없는 내가 공을 주장한다며, 메모를 완성한 사람은 나리라고 잘라 말했다.나리는 화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형님 조언이 일부 들어간 건 맞아요.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해요.”“일부?”“하지만 브랜드 구성, 수익 구조, 공간 콘셉트는 제가 다듬었어요.”나는 리모컨을 집어 네 번째 장을 띄웠다. 예상 객단가, 회전율, 임차 수수료가 복잡하게 얽힌 표였다.“그럼 이 숫자 설명해 봐요.”“지금요?”“당신이 완성했다면서요.”나리는 목을 가다듬었다.“루미에르의 프리미엄 고객을 반영한 예상치예요.”“어떤 예상치죠?”“그건 세부 실무라 담당팀이—”“연간 매출 칸에 월 매출 승수가 들어가 있어요. 일부러 남겨 둔 오류예요.”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나는 브랜드별 회전율의 소수점도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원본을 훔친 사람이 검산했는지 보려고 남긴 표시였다.해외 브랜드 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면 지금 수익 전망은 틀렸다는 겁니까?”“오류를 바로잡은 원본은 제게 있습니다. 계약 조건은 오히려 더 안정적입니다.”“그 원본을 공유해 주시겠습니까?”“저작자와 책임자를 먼저 명확히 해 주시면요.”임원이 나리에게 영어로 같은 질문을 건넸다. 나리는 통역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 건우에게 한국어로 되물었다.“지금 자료를 달라는 뜻이죠?”“손익 기준을 누가 검증했느냐고 물었습니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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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응급실보다 중요한 전화
상자 더미가 내 쪽으로 무너졌다.피할 틈도 없이 철제 모서리가 어깨를 찍었다. 바닥에 손을 짚는 순간 손바닥이 찢어졌고, 열린 상자에서 명품 가방 수십 개가 쏟아졌다.“사모님!”창고 직원이 달려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상자부터 건드리지 마세요. 사진 찍어 주세요.”“피가 이렇게 나는데 무슨 사진을—”“봉인 스티커와 송장 번호가 같이 나오게요. 지금요.”태림 납품창고에는 원래 이탈리아 본사 전용 홀로그램 봉인이 붙어야 했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상자의 스티커는 빛을 받아도 색이 바뀌지 않았다. 박음질 간격도 정품 샘플보다 촘촘했다.나는 휴대전화로 건우에게 전화했다.“어디야?”“창고. 상자가 무너져서 다쳤어.”그의 목소리가 급해졌다.“많이 다쳤어?”“손을 꿰매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위조 상품이 섞였어. 출고부터 막아야 해.”“기다려. 내가 갈게.”그 말에 이상하리만큼 안도했다. 아직은 나보다 늦게 오는 사람일 뿐, 영영 오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건우가 도착했을 때 구급대가 내 손에 압박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내 창백한 얼굴을 보고 곧장 차 문을 열었다.“내가 운전할게. 가까운 응급실로 가자.”“물류팀에 출고 중지부터 지시해 줘.”“병원에서 하자.”대답 대신 손끝의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그는 내 허리를 받쳤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건우의 손이 멎었다.백나리.“받지 마.”나도 모르게 말했다.“지금은 받지 마, 건우야.”그는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나리야, 무슨 일이야?”스피커 너머로 가쁜 숨과 울음이 섞여 흘렀다.“오빠, 숨이 안 쉬어져. 기자들이 자꾸 전화해. 저 혼자 못 있겠어요.”“비서실 사람은?”“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오빠가 와 줘.”건우가 눈을 감았다. 그 표정만으로도 선택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공황 발작일 수 있어. 혼자 두면 위험해.”“내 손에서는 피가 나.”“구급대가 있잖아.”“당신이 온다고 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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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구해준 사람의 이름
“나리는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이야.”건우는 내가 꿰맨 손으로 위조품 보고서를 내밀었는데도 그 말부터 했다. 어젯밤 나리에게 달려간 일을 따지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그래서 나는 버려도 돼?”“그런 뜻 아니야.”“그럼 보고서부터 봐.”그는 첫 장도 넘기지 못했다. 비서가 들어와 화재 생존자 장학행사 출발 시간이 됐다고 알렸다. 나리가 ‘생명의 은인’ 자격으로 무대에 서는 행사였다.“오늘은 같이 가기로 했잖아.”건우가 말했다.“그 목걸이를 한 사람에게 박수 치러?”“과거를 기리는 자리야. 감정 섞지 마.”과거라는 말과 함께 소독약 냄새가 타는 고무 냄새로 변했다.십칠 년 전 그날, 나는 루미에르 납품창고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경보음이 울렸고 천장 틈으로 검은 연기가 쏟아졌다.“밖으로 나가세요!”직원이 소리쳤지만 나는 반대쪽 계단에서 들린 기침을 들었다.“사람이 있어요!”연기 속에 교복 차림의 남학생이 쓰러져 있었다. 건우였다. 철제 선반에 발목이 눌린 채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눈 떠요. 들려요?”“가…… 혼자 가.”“그럴 거면 여기까지 안 왔어요.”나는 뜨거워진 쇠막대를 양손으로 밀었다. 손목의 은빛 나침반이 바닥에 부딪혀 뚜껑이 열렸다. 어머니의 이니셜이 불빛 사이로 반짝였다.천장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비상등도 꺼져 있어 나는 팔찌에 달린 야광 구슬을 바닥에 비췄다. 건우의 오른쪽 손등에는 깨진 유리 상처가 있었고, 재킷 주머니에는 태림 학생증이 꽂혀 있었다.“발목 움직일 수 있어요?”“감각이 없어.”“내가 셋을 세면 힘줘요. 하나, 둘, 셋.”그가 비명을 삼켰다. 선반이 아주 조금 들렸고 나는 발끝으로 그의 신발을 빼냈다. 그때 손목에 불똥이 떨어져 팔찌 끈이 녹았다. 초승달 세 개를 새긴 내 은팔찌에도 검은 자국이 남았다.“이름이 뭐야?”“이건우.”“이건우, 자면 죽어요. 내 어깨 잡아요.”그를 끌고 기어서 방화문을 넘었다. 뒤에서 무언가 폭발했고 충격에 몸이 굴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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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사라진 서명
위조 공급업체 승인서에는 내 서명이 세 번 찍혀 있었다.계약 검토, 샘플 확인, 최종 납품 승인. 나는 그 업체 이름조차 그제야 처음 읽었는데, 문서만 보면 모든 문을 내가 열어 준 셈이었다.“서은채 씨 서명이 맞습니까?”감사실장이 물었다. 회의실 한쪽에는 건우와 명희, 맞은편에는 나리가 앉아 있었다.“모양은 비슷하지만 제가 한 서명이 아닙니다.”나리가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형님, 이제 와서 부인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언제 서명했죠?”“지난달 실무 자료 가져오셨을 때요. 급하다고 먼저 승인해 주셨잖아요.”“날짜와 장소는?”“그걸 일일이 기억해요?”“계약 책임을 묻는 자리라면 기억해야죠.”나리는 명희를 흘끗 봤다. 명희가 탁자를 두드렸다.“네가 나리 보조를 자청했잖니. 사고가 나니 모른 척하는 거야?”“보조를 자청한 적 없습니다. 요청받아 시장 자료를 정리했을 뿐이에요.”“똑같은 말이지.”“전혀 다릅니다.”건우가 낮게 말했다.“지금 책임 범위를 가리는 중이야. 감정은 빼.”“좋아. 그러면 기술적으로 보자.”나는 승인서를 화면에 띄웠다.나는 내 서명의 마지막 획은 위로 올라가지만 세 장은 모두 아래로 꺾였다고 짚었다. 전자 인증 시각도 새벽 두 시 십 분이었다. 그 시각의 내 계정 접속 기록을 요구했다.감사실장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서버 점검으로 원기록 일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공교롭네요. 결재선은요?”“백 실장 계정에서 상신됐고, 구매본부가 수리했습니다.”“그런데 왜 최종 책임은 직함도 없다는 제게 옵니까?”아무도 답하지 못했다.나는 세 번째 승인서의 속성값을 화면에 띄웠다.세 번째 문서는 내가 응급실에 있던 시각에 작성됐다. 나는 진료 접수와 봉합 처치 기록을 제출하겠다고 했다.감사실장이 서류를 넘겨받았다.“전자 서명은 예약 입력도 가능합니다.”“예약했다는 원기록을 보여 주세요.”“그 부분은 확인 중입니다.”“제가 불리한 기록은 확정이고, 유리한 기록은 늘 확인 중이군요.”건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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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 며느리의 공개 사과
백나리가 내 팔을 붙잡고 제 몸을 뒤로 던졌다.샴페인 탑이 무너지고,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이 깨졌다. 나리는 젖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나를 올려다봤다.“형님, 왜 이러세요?”불과 몇 초 전까지 그녀는 내 귀에 대고 말했다.“서명 하나쯤으로 누가 형님 말을 믿겠어요?”내가 팔을 빼자 기다렸다는 듯 사고를 만든 것이다. VIP 오찬장의 시선과 카메라가 우리에게 꽂혔다.“다친 데 없어?”건우가 가장 먼저 나리에게 달려갔다. 그는 깨진 유리를 피해 그녀를 일으켰다.“손이 따가워요. 그래도 형님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내가 밀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저는 감싸 드리려는 건데 왜 또 몰아붙이세요?”그녀는 보호받을 만큼만 목소리를 떨었다.명희가 귀빈들 사이를 헤치고 왔다.“서은채, 당장 사과해.”“나리 씨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다들 봤어. 네가 뿌리쳤잖아.”“잡힌 팔을 빼는 것도 폭력입니까?”“말꼬리 잡지 마. 오늘 오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몰라?”알았다. 태림 백화점의 최상위 고객들과 재개장 브랜드 대표들. 그래서 나리가 이 자리에서 사고를 냈다는 것도 알았다.나는 천장의 카메라 위치를 확인했다. 우리 머리 위를 향한 렌즈 하나, 샴페인 탑 뒤쪽을 비추는 렌즈 하나. 두 번째라면 그녀가 먼저 손을 뻗은 장면이 찍혔을 터였다.“CCTV를 확인하죠.”나리의 얼굴이 굳었다.“이런 사소한 일로 보안 영상을요?”“사소하다면서 공개 사과는 받아야 해요?”“은채야, 그만해.”건우가 내 앞을 막았다.“지금 여기서 진실을 가리는 게 중요해?”“내가 가해자로 남는 것보다 중요해.”“사과 한마디면 행사가 계속될 수 있어.”“내 이름은 행사용 소모품이 아니야.”그의 눈빛에 피로가 스쳤다. 마치 내가 또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든 사람인 것처럼.명희가 사회자에게 손짓했다. 마이크가 꺼졌지만 귀빈들의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며느리가 질투 때문에 재단 실장을 밀었다는 기사가 나길 바라니?”“그 기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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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 밤새 살린 계약
“메종 베르니에가 철수하겠답니다.”밤 열한 시, 브랜드 담당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루미에르 재개장의 핵심 브랜드가 빠지면 나머지 여섯 곳의 조건부 계약도 연쇄 해지될 판이었다.“이유는요?”담당자는 위조품 소문과 오찬 사고 탓에 파리 본사가 태림의 통제 능력을 믿지 못해 철수하려 한다고 전했다.회의실 상석의 나리가 팔짱을 꼈다.“원래 우리랑 급이 안 맞던 브랜드예요. 다른 곳 찾으면 되죠.”나는 헛웃음을 삼켰다.“베르니에가 빠지면 독점 구역 조항 때문에 세 브랜드가 같이 나갑니다.”“형님은 공식 담당도 아니잖아요.”“공식 담당이 그 조항도 몰라요?”나리는 대답 대신 건우를 봤다.“오빠, 저 오늘 약 먹었어요. 자꾸 몰아세우면 회의 못 해요.”건우는 내게 눈짓했다.“은채야, 잠깐 나가 있어.”“계약서 원본은 읽었어?”“전략실에서 대응할 거야.”“새벽 한 시까지 답을 못 주면 자동 해지야.”“그래도 당신 권한은 없어.”나는 노트북을 닫았다.“좋아. 권한 있는 분들이 해결하세요.”회의실을 나왔지만 건물을 떠나지는 않았다. 지하 자료실 옆 빈 사무실에 앉아 아크파트너스 전용 보안망을 열었다.메종 베르니에는 태림보다 먼저 아크와 아시아 구조조정 조건을 협의한 회사였다. 그들은 ‘E. Seo’라는 투자자가 나라는 사실은 몰라도, 내 검토 없이는 철수 결정을 확정하지 않기로 약정했다.재하가 영상 통화 화면에 나타났다.“손 다친 사람이 자정에 일하면 산재 처리해도 됩니까?”“아크 대표가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데 무슨 산재야.”“태림 구하는 일도 이제 아크 업무입니까?”“브랜드와 현장 직원은 지켜야 해. 대신 조건을 바꿀 거야.”나는 계약서에 세 조항을 추가했다. 전 물류 공급업체 독립 감사, 위조품 피해 전액 보상, 루미에르 원기획자의 지식재산권 확인.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베르니에는 위약금 없이 철수하고 우선협상권은 아크로 넘어오게 했다.파리의 법무이사에게 암호화 메일을 보냈다.‘태림의 현재 발표자를 신뢰하라는 뜻이 아닙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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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침실 밖의 손님
내 잠옷을 입은 백나리가 침실 앞에 서 있었다.“형님, 이거 생각보다 편하네요.”그녀 뒤로 열린 옷장에는 내 옷이 바닥까지 쏟아져 있었다. 결혼 뒤 처음 마련한 집이 하루 만에 남의 방처럼 보였다.“벗어요.”“옷 하나 가지고 왜 그래요?”“내 허락 없이 방에 들어와서 내 옷을 입었잖아.”계단을 올라온 건우가 우리 사이에 멈췄다.“무슨 일이야?”나리는 곧장 그의 뒤로 숨었다.나리는 물을 쏟아 잠깐 빌렸을 뿐이라며 내가 과민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나리가 우리 집에서 짐을 정리해?”내 물음에 건우가 먼저 답했다.“며칠 여기 있기로 했어.”“누구 마음대로?”건우는 경찰이 스토커를 잡을 때까지만 본가에 머문다고 설명했다.“호텔 경호층도 있고 회사 게스트하우스도 있어.”“여기가 가장 안전해.”“신고 접수 번호는?”나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너무 무서워서 오빠한테 먼저 전화했어요.”“경찰에도 신고하지 않은 스토커를 피해 주소가 알려진 본가로 왔다고?”건우가 낮게 말했다.“경호팀이 수상한 차량을 확인했어.”“차량 번호나 영상은?”“조사 중이야.”“경호팀 보고서를 나한테도 보내 줘.”“보안 사항이야.”“이 집에 같이 사는 사람 안전은 보안 밖인가 보네.”“나한테 한마디도 없이?”“회의 중에 결정됐어. 연락하려고 했는데.”늘 결정은 끝나 있었고 설명은 늦었다. 결국 이해해 줄 거라 믿는 오만이었다.“나리 씨 방은 일 층 손님방으로 해.”“무서워서 오빠 방 가까이에 있고 싶어요.”“그 방은 우리 침실이야.”나리가 눈을 내리깔았다.나리는 아무 뜻 없는 말을 이상하게 만든다며 피해자인 척했다.건우가 관자놀이를 눌렀다.“은채야, 예민하게 굴지 마. 나리는 손님이야.”“손님이면 주인 옷장부터 뒤지나?”“실수했다고 하잖아.”나는 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서재 열쇠도 돌려줘요.”“무슨 열쇠요?”“당신 가방 옆주머니에 튀어나온 거.”내 서재의 청동 열쇠가 보였다. 나리는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복도에서 주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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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내가 없는 가족사진
사진사가 내게 프레임 밖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사진사는 명희의 지시로 직계 가족과 핵심 임원만 찍어야 한다며 거듭 사과했다.태림 창립 기념식 무대 중앙에는 건우와 명희가 섰다. 그리고 건우 옆, 원래 내 이름표가 있던 자리에 백나리가 서 있었다.“저 사람은 직계 가족입니까?”내가 묻자 사진사의 얼굴이 붉어졌다.“저는 전달받은 대로만…….”“사진 찍어요. 직원 곤란하게 하지 말고.”건우가 무대 위에서 말했다.“은채야, 이따 우리끼리 따로 찍자.”“오늘 공식 가족사진은 이거잖아.”“창립 기념 기록이니까 임원 구성이 중요해.”“아내보다 전략실장이 중요하고?”명희는 미소를 유지한 채 사진의 격이 맞지 않는다며 내게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속삭였다.나는 무대 아래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리는 기다렸다는 듯 건우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대표님, 시선 정면으로 주세요.”플래시가 터졌다. 언론용 모니터에는 ‘태림을 이끄는 가족’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내가 없는 가족이었다.“서은채 양?”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백발의 남자가 낡은 기자 수첩을 들고 서 있었다. 경제지 원로 기자 한성진이었다. 외조부 인터뷰 사진에서 여러 번 본 얼굴이었다.“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아니야. 서지안 씨 눈을 내가 어떻게 잊겠나.”그가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유성금융 서문석 회장 외손녀가 왜 태림 행사에서 쫓겨나?”나는 즉시 그를 사람이 적은 복도로 데려갔다.“방금 보신 건 기사로 쓰지 말아 주세요.”한 기자는 세상이 나를 해외에 있는 줄 알며 태림 며느리인 것도 처음 알았다고 했다.“아직 공개할 때가 아닙니다.”“저런 모욕을 받고도?”“참는 것과 당하는 건 달라요.”그가 수첩을 덮었다.“이유를 물어도 되겠나?”나는 현장 직원과 계약을 지키려면 권리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다.“서 회장이 알면 태림부터 사 버리겠군.”“제 싸움이에요. 외조부 이름으로 이기고 싶지 않습니다.”“자네 어머니도 그런 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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