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화 — 내가 산 것은 회사만이 아니었다“대표님, 개장 테이프를 잘라 주십시오.”일 년 뒤, 루미에르관의 문 앞에서 나는 가위를 받지 않았다. 대신 화재 희생자 유족과 복원팀 막내 직원에게 양쪽 손잡이를 건넸다.“이 문은 제가 혼자 연 게 아니니까요.”금빛 테이프가 끊어지자 복원된 아치 너머로 햇빛이 쏟아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벽에는 서지안의 원본 설계와 이름, 그 아래에는 화재 희생자들의 명패가 같은 높이로 놓여 있었다.기자가 물었다.“태림을 인수한 최종 목적을 이룬 겁니까?”“인수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지워진 책임과 이름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 목적이었어요.”“향후 경영권을 가족에게 승계할 계획이 있습니까?”“태림의 자리는 혈연이 아니라 검증된 절차로 정합니다.”새 전문경영인과 직원 대표가 내 옆에 섰다. 아크는 최대주주로 감시와 투자를 맡았고, 일상 경영은 독립 이사회가 책임졌다. 누구도 한 사람의 호의에 회사를 기대지 않았다.위조 상품 피해 고객에게는 보상이 모두 끝났고, 해고될 뻔했던 협력사 직원들도 새 공급망에 복귀했다. 루미에르의 첫해 수익 일부는 화재 안전기금과 신진 디자이너 지원에 쓰기로 했다.“서지안 이름을 브랜드로 만들려는 겁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아니요. 이름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지원 사업도 심사위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나는 어머니의 명예마저 내 권력을 장식하는 간판으로 쓰지 않았다.서문석은 어머니 사진 앞에 흰 꽃을 놓았다.“지안아, 네 딸이 나보다 낫구나.”“엄마가 들으면 당연한 소리라고 했을걸요.”외조부가 웃었다.“오늘 그 녀석도 왔느냐?”“초대했어요. 올지는 본인이 선택하고요.”건우는 행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일반 초대객 출입구로 들어왔다. 태림 임원 배지도 수행원도 없었다. 그가 지난 일 년간 세운 협력사 회복센터 직원들과 나란히 서서 박수를 쳤다.우리는 일 년 동안 서른두 번 만났다. 미술관에서 시작해 시장 골목과 도서관, 서로의 일터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 다툰 날에는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다음 약속 시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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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화 — 재혼보다 어려운 조건“커피를 마셔도 아무것도 약속하지는 않아요.”내 말에 건우는 의자를 당기던 손을 멈췄다.“약속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용서했다는 뜻도 아니고요.”“알아.”우리는 회사도 본가도 아닌 작은 카페 창가에 마주 앉았다. 그가 내 취향대로 주문하려 하자 나는 먼저 메뉴를 골랐다. 건우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고쳤다.“예전엔 내가 뭘 마시는지 안다고 생각했지.”“틀린 걸 알아도 묻지 않았어요.”“당신이 맞춰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그건 믿음이 아니라 편리함이었죠.”“맞아.”나는 가장 오래 남은 응급실 밤을 꺼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 정말 괜찮다고 믿었느냐고 물었다.건우는 확인하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까 봐 듣지 않았다고 했다. 호텔 사진에 침묵한 것도 회사를 핑계로 내가 견딜 거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같은 계산을 또 하게 되면 즉시 말하겠다고 했다.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결과까지 숨기지 않겠다고.사과를 듣자 상처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제 자기 의도를 선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그 정확함이 내가 확인하고 싶던 변화였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반지도 편지도 없었다. 계약이 끝난 뒤 다른 지역의 협력사 회복팀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기차표만 있었다.기차표는 다음 날 것이었다. 건우는 곁에 남아 기다리는 일도 압박일 수 있어 떠나려 했다고 설명했다.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내 말을 듣기도 전에 또 혼자 정했느냐고 묻자 그의 얼굴이 굳었다. 떠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는 대답에, 나는 떠나 달라고 한 적부터 물었다.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묻는 것부터 해야 했다.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여기 남아도 될까?”“회사로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알아. 그건 내가 요구할 수 없어.”“내 대답은 아직 남았고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건우는 기차표를 접지 않은 채 말했다.“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해.”피하지도, 붙잡지도 않는 고백이었다.고백은 너무 늦었고, 나는 그 늦음을 없던 일로 만들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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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9화 — 사랑보다 먼저 온 존중“이 보상금, 건우 씨 개인 자산에서 나온 겁니까?”법무팀장은 답을 망설였다. 나는 서지안 저작권 반환 등기와 화재 피해 보상 명세를 다시 펼쳤다.“사실대로 말하세요.”“신탁이 매각한 이건우 씨 지분 배당권과 자택 처분금입니다. 회사 책임분과 분리해 부족액을 채웠습니다.”“왜 제게 보고하지 않았죠?”“서 대표님께 알리는 조건으로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감사위원회 승인은 받았습니다.”나는 건우를 계약 종료 면담에 불렀다. 기록 담당자와 직원위원도 동석했다. 마지막 날까지 계약 조건을 흐리고 싶지 않았다.“보상과 IP 반환을 왜 숨겼어요?”“숨긴 게 아니라 필요한 절차에만 보고했습니다.”“당신 이름을 빼 달라고 했잖아요.”“서지안 선생의 이름을 되찾는 문서에 제 이름이 앞설 이유가 없습니다.”태림 책임분까지 왜 개인 자산으로 채웠느냐고 묻자, 건우는 회사 책임분과 자신이 재직 중 묵살한 지연 손해를 분리했다고 설명했다.집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는 내 말에 그는 필요의 기준을 낮춰 잡으면 피해자가 또 양보해야 한다고 답했다.직원위원이 정산표를 확인했다. 건우는 법원이 인정한 최저액이 아니라, 실제 대출이자와 폐업 비용을 기준으로 배상액을 올렸다. 어느 항목에도 관계 회복 비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내가 알면 마음이 움직일까 봐 그런 건가요?”건우가 잠시 침묵했다.“그 가능성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어.”기록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 반말이 나온 걸 깨달은 그가 말을 고쳤다.“죄송합니다. 이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보상을 하면 과거가 지워질 거라고 생각해요?”“아니요. 피해가 줄어들 뿐입니다.”“나와 다시 시작하지 못해도 계속할 수 있어요?”“이미 그렇게 해 왔습니다.”그 대답에는 원망도 자랑도 없었다. 계약직 사원으로 출근한 반년, 거절한 피해자를 다시 설득하지 않고 입금으로 증명한 날들, 내게 보내지 않은 보고서가 그 뒤에 있었다.나는 확인을 위해 화재 피해자 보상위원회 기록을 직접 봤다. 건우는 한 유족이 돈을 거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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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8화 — 이번에는 네가 선택해“대표님 판단으로 개장이 무산되면 누가 책임집니까?”비상 이사회가 새벽 세 시에 열렸다. 중단된 정산 화면은 붉었고, 일부 이사는 내가 누른 비상 키부터 문제 삼았다.“제가 책임집니다.”건우가 마이크를 켰다.“중단을 권고한 실무자는 접니다. 고객 정보가 외부 계좌로 넘어갈 위험을 확인했습니다.”“자문이 대표 대신 판단했다는 겁니까?”“아닙니다.”건우는 화면에 자신의 보고서를 띄웠다.“선택지를 보고한 뒤 서은채 대표가 결정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제가 공을 가져갈 일도, 책임을 대신 빼앗을 일도 아닙니다.”나는 그를 대신해 감사하지 않았다.“중단하지 않았다면 십일 분 뒤 고객 결제정보 칠만 건이 파산 업체의 압류 서버로 복제됐습니다.”보안팀 분석이 뒤따르자 이사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은 문제는 사십팔 시간 안에 대체 정산망을 세우는 일이었다.건우가 네 가지 복구안을 제시했다. 가장 빠른 것은 그가 과거 계약한 업체에 예외 접속을 요구하는 안이었다.직원위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업체는 전 대표님 인맥입니다. 다시 개인 관계에 기대는 방식은 싫습니다.”“합리적인 반대입니다.”건우는 제 안을 직접 화면에서 지웠다.“제 참여 자체가 업무를 방해한다면 지금 물러나겠습니다. 인계 자료는 모두 남기겠습니다.”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나를 보며 붙잡아 달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나는 직원위원에게 물었다.“이건우 자문이 지시권 없이 기술 인계만 맡는 안에는 반대합니까?”“그 조건이라면 아닙니다.”“그럼 사람에 대한 호오가 아니라 합의한 역할대로 갑니다.”대체안은 국내 결제사 두 곳에 거래를 나누고, 태림 직원이 직접 브랜드 코드를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더 들지만 어느 한 사람이나 업체에도 권한이 몰리지 않았다.건우는 직원들에게 자신이 만든 코드표부터 의심하라고 했다. 예전 예외 항목이 섞였을 가능성도 먼저 밝혔다.실제로 신입 사원이 수수료 우회 코드를 찾아냈다. 지우면 속도가 삼십 퍼센트 떨어지고 자문 실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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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7화 — 다시 만난 계약서“이 조항이면 저와 단둘이 대화할 수 없습니다.”건우가 자문 계약서의 첫 장을 읽었다. 면접위원 네 명과 법무 담당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필요한 대화는 기록 담당자 입회하에 합니다.”“이의 없습니다.”“계약 기간은 육 주. 의결권과 인사권은 없고, 제 승인 없이 외부 연락도 금지합니다.”“알겠습니다.”“우리 관계를 이유로 예외를 요구하는 순간 계약은 끝나요.”건우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예외를 기대하고 지원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가 낸 지원서의 실패 항목을 펼쳤다.“위조 납품 보고를 묵살한 일을 전문성 부족으로 적었네요.”“시스템을 알아도 불편한 보고를 듣지 않으면 쓸모없는 전문성입니다.”“같은 상황이면 이번에는 어떻게 합니까?”“보고자를 업무에서 배제하지 않고 독립 감사에 동시에 전달합니다. 대표님이 반대해도 기록을 남기겠습니다.”“내 판단도 틀릴 수 있다는 뜻이죠?”“예. 다만 최종 결정은 대표님 몫이고, 저는 반대 의견과 근거만 공개하겠습니다.”직원위원 한 명은 건우의 지시로 해고될 뻔한 사람이 이 방에도 있다며 어떻게 함께 일하겠느냐고 물었다. 건우는 불편하다는 의견만으로도 자신이 물러나는 게 맞다고 답했다.“사과 한마디로 넘어가겠다는 뜻입니까?”“아닙니다. 사과를 받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가진 시스템 지식을 인계하고,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돕고 나가겠습니다.”위원들은 익명 표결을 했다. 찬성 셋, 조건부 찬성 하나. 내 표는 마지막까지 봉인됐고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조건부 찬성을 던진 직원은 매주 진행 상황을 전 직원에게 공개하고, 나와 사적으로 만난 정황이 생기면 바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못 박았다.건우는 자신이 만든 불신이니 검증받는 기간도 자기 몫이라며 조건을 받아들였다.그 대답은 계약서보다 먼저 경계를 세웠다.“한시 자문 계약을 승인합니다.”내가 서명란을 돌려주자 건우가 말했다.“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기회가 아니라 업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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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6화 —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희생자 이름은 빼는 게 어떻겠습니까?”루미에르 추모 공간의 최종 시안에서 시공사는 작은 명패들을 지우려 했다. 유족이 불편해할 수 있고 개장 분위기가 무거워진다는 이유였다.“동의받은 이름은 모두 남깁니다.”“고객들이 명품관에 와서 사고부터 보게 됩니다.”“태림이 무엇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지도 보게 되겠죠.”나는 서지안의 이름을 맨 위가 아니라 다른 희생자와 같은 크기로 배치했다.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상처보다 크게 쓰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때 한 유족이 시안을 들고 찾아왔다. 화재로 동생을 잃은 야간 직원의 누나였다.“우리 애 이름은 빼 주세요.”“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사람들이 불쌍하다고 구경할까 봐 싫어요.”나는 설득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 빈자리도 만들지 않을게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말씀해 주세요.”“서 대표 어머니 이름은 남기면서요?”“설계자로 빼앗긴 이름을 작품에 돌려놓는 겁니다. 추모 명단은 가족의 선택이고요.”유족은 한참 시안을 보다가 이름 대신 동생이 쓰던 작업 번호만 새겨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선택을 그대로 반영했다.시공사가 물러간 뒤 외조부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네 어미라면 저 아치부터 한 치 옮겼다고 싸웠을 게다.”“그래서 원본 도면대로 돌렸어요.”“너도 고집은 똑같구나.”서문석은 추모 벽 앞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십칠 년 전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하고, 누명이 씌워진 뒤에도 먼저 손 내밀지 못했던 사람이었다.“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사과했어요?”“무덤 앞에서는 수백 번 했지. 살아 있을 때 못 한 사과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래도 계속 오셨잖아요.”“용서받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잊지 않으려고 왔지.”외조부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낡은 수첩 한 장을 꺼냈다.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다투던 날 적은 말이라고 했다.“지안이가 그러더구나. 사랑한다면서 왜 내 결정을 네가 하느냐고.”“건우 씨에게 했던 말과 같네요.”“그래서 네게 돌아오라 강요하면서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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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0화. 서련으로 나가는 날혼인을 끝내는 조서는 이튿날 아침에 왔다.서련은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직접 읽었다. 황후의 폐위는 이미 시행되었고, 이제 황제 이겸과 서련의 혼인 관계도 종료되었다. 독살 미수의 무죄 판정과 사형 취소는 전날 조서를 그대로 따랐다. 지참 재산과 확인된 사유재산을 반환하고 거처를 스스로 정하도록 했다.이름 아래에는 황제의 서명이 있었다.서련은 종이를 접지 못하고 한동안 펴 놓았다. 결혼할 때는 여러 사람이 옷을 입혀 주고 머리를 올려 주었다. 끝날 때는 앉아서 자기 이름을 읽는 일만 남았다.단비가 작게 물었다.“슬프십니까?”“조금.”서련은 숨기지 않았다.“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날들이 여기 이렇게 적혀서 끝나는 것이.”단비는 옆에 앉았다. 위로할 말을 찾느라 애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침 햇살이 문서의 붉은 도장 위로 옮겨갈 때까지 함께 있었다.최 내관과 금옥에 대한 처분도 전해졌다. 최 내관은 직에서 쫓겨나 허위보고와 인장 관리 책임으로 감금되어 후속 심문을 받게 되었다. 금옥은 황후의 인장을 도용한 허위 주문서 작성 책임이 인정되어 궁중 직책을 잃고 수감되었다. 강압 심문과 서진의 이송 방해는 관련 관리들을 따로 조사하기로 했다.윤소하는 귀비의 지위를 유지했다. 조태후의 비호 아래 약을 둘러싼 오해와 하인 감독의 잘못으로 처분이 줄었다. 다만 재심 과정에서 새로 드러난 사실을 이유로 지급되는 하사품과 처소 운영비 일부가 중단되었다.단비는 그 부분을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서련은 문서를 함 안에 넣었다. 귀비의 지위가 남은 것도, 자신에게 씌운 죄가 거짓으로 판정된 것도 함께 사실이었다. 한쪽이 미진하다고 다른 쪽의 성과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다.“짐을 싸자.”돌려받은 물건은 생각보다 많았다. 옥비녀와 금장식, 의례 때 쓰던 향갑, 누군가 황후에게 어울린다며 보낸 색색의 비단. 서련은 소유가 확인된 물건들을 목록에 남기게 하고 필요한 것부터 골랐다.흰 혼례비단에 쓴 청원은 직접 접었다. 먹이 번진 곳과 명선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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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9화. 돌아가지 않는 자리“이것은 네가 원하던 판정 아니더냐.”명선은 서련이 지운 문장을 다시 보았다. 사형 취소와 황후 복위가 한 문서에 묶여 있었다. 궁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사람이 돌아갈 자리를 받는 것은 가장 완전한 보상으로 여겨졌다.서련은 붓을 내려놓았다.“목숨과 혼인을 한 문장에 넣지 말아 주십시오.”“황후가 아니면 네 앞에서 함부로 고개를 들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이미 보았습니다.”“앞으로 네 사람들을 지키기 더 어려울 수도 있다.”“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제가 돌아가야 합니까?”명선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서련은 공주를 원망하지 않았다. 공주가 아는 권력의 모양은 그 자리 안에서 가장 확실했다. 자신도 며칠 전까지는 다르지 않았다.“제 무죄를 먼저 정해 주십시오. 혼인을 끝내는 일은 따로 요청하겠습니다.”명선은 긴 숨을 내쉬었다.“황제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제가 살아 있는 것도 그분께는 소란이었습니다.”최종 심리는 다음 날 아침에 열렸다. 서진은 정온의 허락 아래 잠깐 참석했다. 오래 서 있지 않도록 의자가 마련되었고, 이미 남긴 진술의 진위를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상처를 드러내 보이라 하자 명선이 막았다.“몸의 상처는 의녀의 진료로 확인했다. 여기서 구경할 일이 아니다.”서련은 공주에게 눈을 맞추어 감사했다.석류청의 검사 결과, 실제 약의 거래 내역, 빈 종이에 미리 찍은 인장, 금옥의 주문서 작성 시인과 최 내관의 부실보고가 차례로 읽혔다. 처음 청을 만들었던 궁녀의 손도장 진술은 강압과 확인 부족으로 판단의 근거에서 빠졌다.“당사자의 진술을 바꾸게 한 관리도 조사하십시오.”서련이 말했다.“제 무죄만 쓰고 그 궁녀가 거짓말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마십시오.”종친들이 서로 눈을 교환했다. 명선은 그 요청을 판정에 포함했다. 서진에게 씌운 약재 반입 혐의도 근거가 없었고 구금을 해제한다는 문장이 붙었다.황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최종 문서를 오래 보았다.서련의 사형을 취소한다. 독살 미수의 혐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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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8화. 빈 종이의 자백금옥은 빈 주문서를 하사품 정리용이라 했다.명선은 종이를 탁자에 펼쳤다. 약재상 표식이 찍힌 것과 황후의 인장이 찍힌 것은 여러 장이었고, 그중 한 장에는 두 표시가 함께 있었다. 글씨를 쓰면 누구의 명령으로 무엇을 구한 것인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종이였다.“하사품에 위해 약의 이름을 쓸 일이 있었느냐.”금옥은 대답하지 않았다.최 내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종이를 보자 금옥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서련은 그가 앉기 전에 물었다.“네가 이 종이에 인장을 찍었느냐.”“몇 장은 제가 찍었습니다. 목록을 나중에 적는다 하여…….”“누가 그렇게 말했지?”최 내관이 금옥을 보았다.상궁이 웃었다. 웃음에는 더는 예의가 없었다.“이제 와 저 혼자 했다고 하시려고요? 함을 들고 와 편하게 정리하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물품 목록인 줄 알았다.”“알고 싶지 않았겠지요.”서련이 손을 들어 둘의 말을 끊었다.“서로의 마음을 짐작하지 말고, 각자 한 일을 말해라.”최 내관은 인장을 먼저 찍은 빈 종이를 금옥에게 남겼다고 시인했다. 정해진 목록을 써 올린다는 말을 믿었다. 서련이 아파 누워 있던 날이었고 황제의 하사품 정리라는 명분이 있었다. 인장함을 다시 닫기 전 다른 종이에 도장을 더 찍었는지는 금옥만 알고 있었다.상궁은 한참 침묵한 끝에 자신의 손으로 문제의 주문서를 작성했다고 했다.단비의 숨이 크게 들렸다.“황후를 모함하려고?”명선이 물었다.“마마의 잘못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금옥이 고개를 들었다.“중궁은 늘 귀비전의 청을 뒤로 미뤘습니다. 궁인도 물품도 제때 주지 않았고, 마마께서 가시는 자리마다 황후의 이름이 먼저 나왔습니다.”서련은 금옥을 바라보았다. 그 말 안에 섞인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었다. 후궁 처소의 물품 청을 늦춘 날도 있었다. 다만 귀비전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부족한 비용을 맞추느라 자신의 장신구를 줄인 달도 있었다.“늦어진 물품이 내 사형의 이유가 되느냐.”“그렇게까지 될 줄은…….”“독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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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7화. 밥을 먹는 사람서진은 죽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서련은 그 옆에 앉아 자기 그릇부터 한 술 먹었다. 밥을 먹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는 동생에게 괜찮다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함께 먹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소금이 조금 모자라다.”그녀가 말하자 서진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누나는 늘 짜게 먹었어.”낯익은 투정이었다. 서련은 웃다가 목이 메어 물을 마셨다. 서진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첫 술을 삼킨 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듯 주위를 보았다.방에는 누이와 정온만 있었다. 단비는 치료받으러 갔고 강무는 길에서 붙잡은 자를 인계했다. 문 앞은 명선의 시종이 지켰다. 누구도 서진에게 당장 증언하라고 하지 않았다.“오늘은 씻고 쉬십시오.”정온이 말했다.서진은 그릇을 내려놓았다.“제가 말하지 않으면 누나가 죽습니까?”서련의 손이 멈췄다.그 질문 속에 감옥의 며칠이 남아 있었다. 누이를 살리고 싶으면 인정하라 했을 것이다. 누이가 너를 버렸으니 혼자라도 살아남으라 했을지도 몰랐다. 서련은 듣지 않은 말을 사실처럼 묻지 않았다.“재심은 이미 열렸다. 네 말 하나에 내 목숨을 매달지 않겠다.”“그래도 알아야 해.”서진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하지 않은 일을 적으라 했어. 중궁으로 약을 날랐고, 누나의 명을 들었다고. 거절하면 누나가 독을 마실 때 옆에 세워 두겠다고 했어.”정온이 물잔을 가까이 옮겼다. 서련은 동생의 손을 덮으려다가 먼저 물었다.“손을 잡아도 되니?”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손에는 정온이 감은 천의 감촉이 있었다. 서련은 힘을 주지 않고 가만히 놓았다.“네가 무슨 말을 했어도 먼저 살아와야 했어.”서진의 얼굴이 구겨졌다.“아무것도 못 했어.”“돌아왔잖아.”“누나를 지킨 게 아니야.”서련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 동생은 줄곧 제 몫을 해야 한다고 했다. 누이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서씨의 마지막 남자로서 가문을 일으키겠다고. 스무 살의 아이에게 어른들이 얹어 놓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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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6화. 돌아오는 길길을 막은 수레에는 곡식이 없었다.강무는 엎어진 자루가 터지는 것을 보고 고삐를 당겼다. 쏟아진 것은 모래였다. 운반꾼 둘이 서둘러 길을 치우는 시늉을 했지만 삽날은 자루가 아니라 서진의 수레 쪽으로 향해 있었다.“문을 닫으십시오.”그가 말하자 정온이 수레 휘장을 당겼다. 단비는 문서함을 무릎 아래 넣고 서진의 어깨를 받쳤다. 동생은 좁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눈썹 안의 흉터는 기억과 같았지만, 그 아래 눈은 한참 다른 사람이었다.“누나가 보낸 사람이 맞습니까?”그가 아까부터 묻던 말을 다시 했다.“예. 제가 단비입니다.”“알아요. 그런데 자꾸 꿈 같아서.”서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단비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정온이 먼저 허락을 구하고 갈아 감아 준 천 아래로 손목이 가늘었다.바깥에서 나무가 부딪혔다.수레 바퀴를 노리고 던진 장대가 길을 가로질렀다. 강무는 칼을 뽑지 않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날붙이를 먼저 드러내면 황명을 수행하던 인원이 길에서 행인을 베었다는 말이 남을 수 있었다. 공주의 시종이 이송 명령을 높이 펼쳤다.“황명으로 관련인을 옮기는 중이다. 길을 열어라!”운반꾼 하나가 달아났다. 다른 하나가 수레 옆으로 붙었다. 손에 숨겼던 짧은 칼이 빛났다. 강무가 그의 손목을 장대에 눌러 바닥으로 꺾었다. 칼이 돌바닥에 떨어졌다.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불길이 올랐다.엎어진 자루 밑 마른 짚에 붙은 불이었다. 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수레 밖으로 몰아내려는 일이었다. 정온은 젖은 천으로 서진의 입과 코를 가리게 했다.“뒤 문으로 내립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몸을 접었다. 발목에 힘을 주자 숨을 삼켰다.“못 걸으셔도 괜찮습니다. 들어 옮기면 됩니다.”정온의 말에 그가 천천히 팔을 내밀었다. 단비는 문서함을 집으려다 멈췄다. 함 안에는 신원 확인서와 이송 명령 사본이 있었다. 궁에 남긴 원본이 또 있었다.그녀는 함을 버리고 서진의 팔을 어깨에 걸었다.문서함 모서리가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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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5화. 이름이 적힌 명령황제의 서명은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북문 밖 옛 군량창에 수용된 서진을 명선공주가 지정한 별실로 이송하라. 담당 관리와 종친 측 입회인이 함께 신원을 확인하고, 이동 중 건강을 살피라는 내용이었다.이현이 사람과 수레를 마련하려 하자 서련이 명을 다시 읽었다.“강무가 동행할 수 있습니까?”“공주가 입회인으로 지명하면 가능하오. 수용소 안의 지휘권은 원래 관리에게 있고.”“그 부분까지 써 주십시오. 문 앞에서 다투는 동안 또 사람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명선은 피곤한 얼굴로 붓을 들었다. 강무를 입회인으로, 정온을 진료 담당으로 적었다. 공주의 시종이 문서를 두 벌 베껴 하나는 궁에 남겼다. 이현은 궁문까지 배웅할 수 있었지만 사병을 붙일 수는 없었다.서련은 동행하겠다고 했다.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명선이 먼저 반대했다.“네가 궁 밖으로 나가면 도주를 핑계 삼을 것이다.”“신원을 확인할 사람이 필요합니다.”“서진을 아는 사람은 네 시녀도 있다.”단비가 앞으로 나섰다. 손목은 천으로 감겨 있었다. 서련은 그 손을 보며 이번에는 자신이 말릴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어제 다쳤다.”“걸을 수 있습니다. 대감님 얼굴도 압니다.”“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어.”“여기도 있었습니다.”서련은 더 말하지 못했다. 자신의 기다림을 덜려고 아이의 선택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도 보내기 싫다는 마음이 한꺼번에 올라왔다.단비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위험하면 정온 의녀의 말을 듣고 물러나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약속은 못 드립니다. 알아보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드립니다.”서련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 약속이면 된다.”그녀는 동생의 특징을 적었다. 왼쪽 눈썹 안의 작은 흉터, 오른손 약지의 오래된 굽음. 누군가 다른 죄인을 서진이라 내보내더라도 이름만 듣고 속지 않도록 했다. 마지막에는 겨울이면 발꿈치가 잘 트니 부드러운 신을 가져가 달라고 썼다.정온이 그 줄을 읽고 약상자 옆에 솜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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