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대디의 사냥

싱글대디의 사냥

By:  태평성대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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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사별한 지 7년, 스타 변호사 박도현은 철저히 금욕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온순하고 겁 많은 한 여자가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모두가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다고 말하는 박도현이 강채원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 인생은 막다른 길이자 미지수라 여겼던 강채원의 삶에 박도현이 불현듯 들이닥쳤다. 좁힐 수 없는 아득한 차이를 알기에 도망치려 한 그녀.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았고 이 눈부신 세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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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박도현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 여자를 몸 아래에 깔고 짓누르고 있었는데 여자의 허리가 한 줌에 잡힐 듯 가느다란 데다 피부도 유난히 하얬다.

도무지 멈출 수 없는 갈증 같은 욕망이 피어올랐다.

여자의 젖은 눈망울이 아름다우면서도 남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자극했다.

그런데 그 몽정 대상이 아들의 과외 교사일 줄이야. 박도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똑똑.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박도현이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으나 몸의 정직한 반응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사별한 후로 벌써 7년째 싱글이었다. 방금 꾼 꿈이 박도현에게 끼친 영향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가정부 안수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문 앞에 공손히 서서 말했다.

“과외 선생님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

“알았어요.”

박도현은 덤덤하게 대답한 뒤 먼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야 비로소 아래층으로 향했다.

나무로 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강채원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처럼 하얀 면 원피스에 파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검고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박도현은 강채원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알아챘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

박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

조금 전에 꾼 꿈 때문인지 그녀를 보자마자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의 몸 아래에 있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졌다.

꿈속에서 강채원은 그에게 애처롭게 매달리고 있었다.

“네. 이준이 아버님.”

강채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긴장한 탓인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도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요?”

강채원이 이 집에 과외 교사로 들어온 지는 두 달이 되었지만 두 사람이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비서가 과외 교사를 뽑을 때 박도현에게 사진을 줘서 대충 훑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명문대에 재학 중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뽑았던 것이었다.

CCTV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은 있었으나 어제 실제로 마주했을 때 강채원이 겁을 먹은 모습이 뜻밖에도 박도현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아버님, 혹시 급여를 미리 가불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정말 급히 돈 쓸 곳이 생겨서요...”

강채원은 거의 온 힘을 쥐어짰다.

긴장한 탓에 말의 속도가 빨랐고 목소리도 불안하게 떨렸다. 말을 마친 뒤에는 박도현과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죽 절박했으면 이런 부탁까지 했을까? 웬만해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텐데.

“천만 원이면 되나요?”

말하는 동시에 박도현이 강채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알아챈 강채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가불해주시는 건가요?”

어제 안수희와 대화하다가 박도현이 이번에는 집에 며칠 머물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늘 집에 갑자기 일이 생기자 염치 불고하고 그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대뜸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제시했다. 강채원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박도현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좌 번호 알려주세요. 지금 바로 송금할게요.”

그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나서야 강채원은 상황을 실감했다. 천만 원까지는 필요치 않았던 그녀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제가 받아야 하는 만큼만 받을게요.”

“지난 두 달간 이준이와 잘 지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세요. 성함이...”

“강채원입니다.”

강채원의 대답에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이가 강채원 씨를 잘 따르니 앞으로도 계속 맡아 주세요. 그래야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요.”

무엇보다 오늘 꾼 강채원에 관한 꿈은 박도현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박도현의 말을 듣자마자 강채원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정말인가요, 이준이 아버님?”

강채원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박도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맑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박도현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가 낮게 대답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강채원이 두 손을 모아 쥐고 박도현에게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강채원은 무척 기뻤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 탓에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과외 교사를 하면 꽤 쏠쏠하게 벌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서 알게 되었다. 가끔 운 좋게 좋은 고용주를 만나면 보너스까지 챙길 수 있다고 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아이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그 또한 무조건적인 건 아니었다.

여덟 살 때부터 남동생을 돌봐온 강채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과외 교사에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 시도하자마자 바로 뽑혔다.

지난 두 달간 보살핀 박이준 또한 강채원을 누나라고 부르며 무척 잘 따랐다.

그런 상황에서 고용주인 박도현이 박이준을 계속 맡아달라고 했다. 강채원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연락처도 알려주세요.”

박도현은 강채원이 이토록 기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이 문제로 꽤 시간을 지체했다. 매사에 군더더기 없는 것을 선호하는 박도현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용건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강채원이 서둘러 연락처를 알려줬다.

박도현이 메신저를 켜서 연락처를 꾹꾹 누른 뒤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내자 강채원의 휴대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닉네임은 심플하게 ‘P’였고 프로필 사진은 외로운 돛단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풍경이었다.

이름을 저장하기도 전에 박도현이 돈을 보냈는데 정말 천만 원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믿어주신 만큼 이준이 책임지고 잘 가르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동한 강채원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두 눈에 서린 진심을 읽어낸 박도현은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전에는 대충 가르쳤다는 뜻인가요?”

그 말에 강채원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더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뜻이었어요...”

박도현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강채원은 설명할수록 더 엉망이 돼버렸다.

그가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접근하려던 여자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참으로 순진했다.

그 순간, 박도현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박도현이 아무 말이 없자 강채원이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한번 설명했다.

“아버님,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실수를 했네요. 하지만 감사한 마음은 진심이에요. 저를 도와주셨으니 이준이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으로 보답할게요.”

그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고요. 그런데 앞으로 내가 좀 바빠질 것 같아서 말인데 강채원 씨만 괜찮다면 당분간 우리 집에 들어와서 지낼 수 있을까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강채원이 흠칫 놀랐다.

“시간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녀의 당혹감을 읽어낸 박도현이 덧붙였다.

원래는 가까이 두고 기회를 엿보려던 생각이었으나 겁을 줄까 싶어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일이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볼게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전화로 연락해요. 내가 집에 없으면 헛걸음할 수도 있으니까요.”

강채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도현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가 큰돈을 선뜻 가불해줘서 거절하기 미안했던 강채원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박도현을 불러 세웠다.

“이준이 아버님, 저 시간 아주 많아요. 지금 돌아가서 짐 챙겨서 이따 저녁에 다시 올게요.”

박도현은 전에 급여도 시원시원하게 줬었다. 급여를 가불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보냈다. 강채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감사하다던 말도, 아이를 잘 가르치겠다던 다짐도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행동만큼 진심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데려다줄게요.”

박도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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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박도현이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한 여자를 몸 아래에 깔고 짓누르고 있었는데 여자의 허리가 한 줌에 잡힐 듯 가느다란 데다 피부도 유난히 하얬다.도무지 멈출 수 없는 갈증 같은 욕망이 피어올랐다.여자의 젖은 눈망울이 아름다우면서도 남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욕망을 자극했다.그런데 그 몽정 대상이 아들의 과외 교사일 줄이야. 박도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똑똑.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박도현이 어지러운 생각을 멈추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으나 몸의 정직한 반응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사별한 후로 벌써 7년째 싱글이었다. 방금 꾼 꿈이 박도현에게 끼친 영향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컸다.가정부 안수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문 앞에 공손히 서서 말했다.“과외 선생님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알았어요.”박도현은 덤덤하게 대답한 뒤 먼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야 비로소 아래층으로 향했다.나무로 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강채원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처럼 하얀 면 원피스에 파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오늘은 머리를 묶지 않았다. 검고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박도현은 강채원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알아챘다.“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박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조금 전에 꾼 꿈 때문인지 그녀를 보자마자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의 몸 아래에 있던 모습이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졌다.꿈속에서 강채원은 그에게 애처롭게 매달리고 있었다.“네. 이준이 아버님.”강채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긴장한 탓인지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도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일 있어요?”강채원이 이 집에 과외 교사로 들어온 지는 두 달이 되었지만 두 사람이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비서가 과외 교사를 뽑을 때 박도현에게 사진을 줘서 대충 훑어본 적이 있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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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채원은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아니에요, 이준이 아버님. 전 병원에 들러야 해서요.”박도현이 고개를 돌렸다.“가족분이 입원했어요?”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강채원이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뇌경색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비가 2백만 원 정도 부족하다면서 울먹였다.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2백만 원을 모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진 바람에 친척들마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강채원도 다른 방법이 없어 월급을 가불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다행히 박도현이 흔쾌히 가불해주었다.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박도현이 강채원의 앞으로 다가갔다.“마침 나도 병원에 친구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가는 길이니 태워다 줄게요. 간 김에 가족분을 잘 봐줄 만한 의사도 알아봐 주고요.”강채원이 멍한 얼굴로 박도현을 쳐다봤다.박도현은 어느새 뒷모습만 보인 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키가 훤칠한 데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해서 전형적인 모델 체격이었다.그녀의 고용주는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따뜻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이기도 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홀아비였다. 역시 세상에는 완벽한 인생이란 게 없었다.“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요? 병원에 가야 한다면서요.”갑자기 들려온 박도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채원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박도현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제산 병원에 도착했다.강채원은 곧장 입원 병동으로 향했고 박도현은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응급실 안, 흰 가운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박도현을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박 변호사님을 여기까지 모셔 왔을까?”박도현은 늘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평소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해도 몇 번이고 재촉해야 겨우 얼굴을 비추곤 했다.박도현이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말하려던 그때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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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강채원의 등장은 박도현의 예상 밖이었다. 그리고 박도현이 했던 말 역시 강채원의 예상 밖이었다.앞서 박도현은 천만 원을 선뜻 가불해주었고 그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며 병원까지 데려다준 데다 좋은 의사까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방금 그가 한 말까지 더해 생각해 보면 앞뒤가 맞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까지 도와줄 리가 없었다.하지만 강채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준이 아버님과는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대체 언제부터 나한테 마음을 주기 시작한 거지?’그때 박도현이 강채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여긴 어쩐 일이에요?”박도현의 목소리에 비로소 생각에서 깨어난 강채원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육 선생님을 만나러 왔어요.”아버지의 입원 서류를 작성해준 사람이 바로 응급의학과의 육상우였다.입원 병동 쪽에서 검사 항목 중 하나가 필요 없다면서 환불받으려면 육상우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그렇게 육상우를 찾아왔다가 문 앞에서 박도현의 말을 들은 것이었다.더욱 뜻밖인 건 박도현이 육상우와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다.“저를요?”육상우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나섰다.그사이 박도현이 강채원의 앞에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강채원은 감사의 인사만 전할 뿐 박도현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육상우가 강채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호흡이 흐트러졌고 반응마저 평소보다 늦었다.박세중이 이상한 기색을 바로 눈치챘다.“박도현, 아까 한 말도 거짓말이지? 아직도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아직 저 혼자 마음에 품은 상태지, 본격적으로 대시한 게 아니에요. 계획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흘러가고는 있어요.”박도현이 강채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그녀는 박도현이 육상우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 계속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의사를 만나러 왔다면서요?”놀란 바람에 강채원의 반응이 아주 느렸다. 그 모습이 나름 귀엽긴 했다.“네. 육 선생님 만나러 왔어요.”박도현의 말을 듣고서야 여기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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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네 아빠 병실을 옮기는 건 절대 안 돼.”최경인이 단호하게 거절하더니 강채원을 보면서 여태껏 들려준 적 없는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엄마한테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오늘 네 아빠 퇴원 절차부터 밟을 거야.”“엄마!”강채원이 다급해졌다.‘아빠가 지금 어떤 상태인데 치료도 안 받으면 어떡해?’간호사도 옆에서 최경인을 달랬다.“어머님, 무슨 사정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차분하게 얘기 나누세요. 가족의 건강을 두고 이렇게까지 다투실 필요는 없잖아요.”“우리가 나이 들어 살아 있는 게 딸한테 짐이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죠.”최경인이 강채원의 눈을 똑바로 보며 간호사의 말에 답했다.강채원은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적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어머니는 정말로 아버지의 퇴원 절차를 진행할 거라는 것을.그녀가 서둘러 해명했다.“이건 내가 일하는 집에서 미리 받은 월급이에요.”“어떤 고용주가 월급을 이렇게나 많이 가불해줘?”최경인이 여전히 믿지 않자 강채원이 대화 기록을 보여줬다.“고용주가 큰 별장에 살 정도로 돈이 많아요. 내가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도 알아서 돈만 받고 튈 거라는 걱정도 하지 않으시고요.”“그리고 이준이 전에 과외 선생님을 몇 번이나 바꿨대요. 나랑은 잘 맞아서 누나라고 부르면서 따르거든요.”최경인은 부잣집에서 자란 박이준이 혼나거나 매를 맞아도 말을 듣지 않는, 그야말로 골치 아프게 하는 말썽꾸러기일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다.그런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선생님을 겨우 만났으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월급을 미리 주더라도 강채원을 붙잡아 두고 싶었을 것이다.최경인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신뢰를 저버리지 말고 열심히 해. 아이한테도 진심으로 잘해주고.”“나도 다 알아요, 엄마. 만약 내가 이준이한테 잘해주지 않았다면 그 집에서 날 계속 고용했겠어요? 그럼 이제 아빠 병실 옮기는 거 협조해줄 거죠?”강채원이 말하면서 최경인을 부축해 일으켰다.다행히 강정호는 지금 자리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정호에게도 다시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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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현이 믿어 줄까? 혹시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일부러 접근해서 이 집안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해 팔자를 고쳐보려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당장 고용 계약을 끝내고 나더러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거 아니야?’생각할수록 불안해진 강채원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한 그 행동이 휴대폰 너머의 남자에게 얼마나 큰 곤란을 안겨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박도현이 침을 꿀꺽 삼키고 황급히 시선을 돌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뒤 낮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이준이 얼굴 좀 보여줘요.”“네, 지금 바로 방으로 갈게요.”강채원이 그제야 안도했다.한 손에 죽 그릇을 들고 다른 손에 휴대폰을 쥔 채 최대한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박도현에게는 그녀의 발소리뿐 아니라 숨소리도 고스란히 들려왔다.그러자 또다시 꿈속 장면들이 떠올랐다.꿈속의 강채원은 그를 다정하게 ‘도현 씨’라고 불렀다.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눈망울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두 사람이 만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게다가 그저 고용 관계일 뿐이라 지금 이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었다.그 시각 강채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박이준이 진작 잠에서 깨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반짝 빛났다.“아빠!”아이의 앳된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났다.강채원이 얼른 휴대폰을 박이준에게 건네 두 사람이 통화하도록 했다.그러고는 옆에 앉아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후후 불었다. 이따가 박이준에게 먹여 줄 생각이었다.그때 박이준이 갑자기 박도현에게 말했다.“아빠, 나 채원 누나가 너무 좋아요. 누나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 엄마처럼.”목소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이 가져온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강채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숟가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고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귓불이 다시 뜨거워졌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조금 전 주방에서 있었던 일만으로도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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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조혜성은 금액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강채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대화창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장 최근에 수백만 원에 달하는 돈이 들어온 기록이 버젓이 남아 있었다.조혜성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강채원의 집안 형편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한 정도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학기 초만 해도 색이 바랠 대로 바랜 옷을 입고 다녔다. 누가 봐도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생활비조차 조금씩 직접 벌어야 하는 그녀가 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혹시 몸을 팔아서 돈을 번 거 아니야?’조혜성의 시선이 강채원의 얼굴에 머물렀다.옷차림은 수수했지만 피부가 희고 얼굴이 청순해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몸을 판 것 말고는 이렇게 큰돈을 받을 리가 없었다.조혜성이 코웃음을 치더니 두 눈에 질투심이 스쳤다.강채원의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끄는 순간 다른 손으로 재빨리 촬영 버튼을 눌러 송금 내역이 담긴 대화창을 몰래 찍었다.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사진이 성공적으로 저장된 그때 조혜성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번졌다.‘어디서 순진한 척, 깨끗한 척이야? 매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고 수수한 롱 원피스 차림으로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얼굴을 하고 다니더니 뒤에서는 결국 돈 많은 남자한테 빌붙어 쉽게 돈을 벌고 있었던 거잖아.’조혜성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속으로는 이미 계획을 다 세웠다.반드시 학교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채원의 가면을 철저하게 벗겨 버릴 것이다.‘강채원이 순진하다고? 글쎄, 과연 그럴까?’그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종이 울리자 학생들은 시험지를 제출한 뒤 책을 정리했다.강채원이 살짝 뻐근해진 손목을 주물렀다가 책을 챙겨 기숙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옆에 있던 조혜성은 진작 짐을 다 챙기고 강채원보다 한 발 앞서 강의실을 나갔다.강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조혜성은 곧장 앨범을 열어 방금 몰래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송금 금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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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강채원의 얼굴이 조금씩 싸늘하게 식더니 고개를 들어 조혜성을 보면서 또박또박 물었다.“네가 찍었어?”평소 조용하고 여린 모습만 보이던 강채원이 갑자기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묻자 기숙사 안을 가득 채우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강채원의 시선에 조혜성은 순간 움찔했지만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은 채 턱을 치켜들고 발뺌했다.“내가 찍긴 뭘 찍어?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캡처잖아. 누군가 우연히 찍은 거겠지.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강채원,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릴 시간에 네가 뒤에서 무슨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는지나 잘 생각해 봐.”조혜성에게 그녀의 소행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증거가 없는 이상 그녀가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었다.문제는 송금 내역을 찍은 사람이 조혜성이라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강채원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조혜성을 노려봤다.“이거 명예훼손인 거 알아?”조혜성이 팔짱을 낀 채 침대에 기대어 서서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왜? 내가 헛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했어? 증거 있어? 아니면 이게 헛소문이라는 걸 네가 증명할 수 있어?”“내가 보기엔 사실 같은데? 너 우리 몰래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잖아. 과외는 무슨 과외. 그냥 남자랑 자는 거겠지.”강채원의 얼굴이 분노로 새하얗게 질렸다.한편, 학교에 퍼진 소문이 박도현의 귀에도 들어갔다.박도현의 비서 지시언이 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하는 사이 박도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이 일이 이미 학교 내 여러 단체 채팅방에 퍼졌어요. 전교 단체방이든 학과 단체방이든 송금 내역이 담긴 대화 기록 사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요.”지시언이 박도현의 차갑게 굳어 가는 얼굴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지금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학생들까지 덩달아 조롱하고 있고 강채원 씨에게도 온갖 괴롭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어요. 대표님, 제가 조사해 볼까요?”박도현의 얼굴이 완전히 얼어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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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채원이 고개를 저으며 곧장 박이준의 방으로 향했다.박이준이 심심한 듯 책상에 엎드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제발 귀찮게 좀 하지 말아요.”문을 연 사람이 가정부라고 생각한 박이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강채원이 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강채원이 발소리를 죽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해서 나가지 않고 뒤돌아 문을 조용히 닫았다.천천히 책상 옆으로 다가간 뒤에야 책상 위에 펼쳐진 문제집을 제대로 봤다. 문제집에 선이 복잡하게 그어져 있었고 기초 문제 몇 개는 풀지 않은 상태였다.아무래도 심통이 나서 문제를 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때 익숙한 향기를 맡은 박이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제야 온 사람이 강채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을 돌려 눈을 크게 떴다.“누나!”강채원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았다.“왜? 누나가 오는 게 반갑지 않아?”“그럴 리가요.”박이준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강채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과외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박이준이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강채원이 문제집 첫 페이지를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해가 서서히 저물어 갔지만 방 안의 두 사람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강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문제를 설명했고 박이준도 어느새 그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그 시각 아래층, 박도현이 별장으로 들어왔다.현관에 놓인 여성 신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강채원의 신발이었다. 이미 전에 본 적이 있었다.오늘처럼 큰일을 겪고도 변함없이 수업을 하러 왔다니. 조용하고 순해 보이지만 속은 돌처럼 단단했다.박도현을 본 가정부가 곧바로 다가와 그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대표님, 출장 가신 거 아니셨어요?”그녀는 박도현이 돌아온다는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갔었는데 이준이 걱정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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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훤칠한 체구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공간이 꽉 들어찬 듯 답답하게 느껴진 강채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으로 비켜섰다.“이준이 아버님, 오셨어요?”강채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박도현의 얼굴을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그가 강채원의 희고 고운 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고생 많았어요.”옆에 서 있던 박이준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박도현에게 시선을 고정하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아빠, 아까 문밖에서 뭐 했어요? 왜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았어요?”“한참 서 있었던 거 맞죠? 처음에는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아빠였네요. 왜 바로 들어오지 않았어요?”박이준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박도현이 문밖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폭로했다.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미묘하게 달라졌다.강채원의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박이준의 말을 듣고서야 박도현이 문밖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들어오지도 않고 노크하지도 않은 채 그저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니.강채원의 얼굴에 어색한 기색이 역력해졌고 온몸이 불편하게 느껴졌다.반면 박도현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들킨 사람의 당혹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손을 들어 박이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누나랑 문제를 풀고 있는데 방해할까 봐 잠깐 기다리고 있었어. 어때? 오늘 많이 배웠어?”공부 얘기가 나오자 박이준의 관심이 곧바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더니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오늘은 집중도 엄청 잘했어요. 누나가 몇 번이나 칭찬해 줬다니까요? 문제도 여러 문제나 정확하게 풀었고 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박도현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그래? 이준이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야겠네. 누나가 헛걸음하지 않도록 하루에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야지.”의욕이 넘친 박이준이 힘차게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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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박도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표정도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되레 강채원이 꺼낸 질문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강채원이 그를 잠깐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뒤이어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몰라서 다행이야. 만약 그 더러운 소문을 들었다면 이준이 아버님도 날 오해했을지 몰라.’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다.강채원이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저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학교에서 사소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해결됐어요.”박도현은 말없이 강채원을 쳐다보기만 할 뿐 서둘러 대답하지는 않았다.그러다가 그녀의 눈빛에 잠깐 스쳐 지나간 실망감을 본 순간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학교에 퍼졌던 소문을 그가 나서서 잠재웠다고 강채원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입 밖으로 꺼냈다가 겁이 많은 그녀가 오히려 놀라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요. 내가 해결해줄 테니까.”박도현이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강채원은 고개를 젓고는 조금 전까지 비치던 실망한 기색을 말끔히 거두고 다시 평소처럼 온순하고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정말 괜찮아요. 사소한 오해가 있었을 뿐이에요. 이제 완전히 해결됐어요.”애써 태연한 척하는 강채원의 모습에 박도현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행이고요.”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학교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내가 데려다줄까요?”강채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박이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누나, 오늘 꼭 가야 해요? 안 가면 안 돼요?”“집이 커서 방도 많단 말이에요. 아빠한테 누나 방 하나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 누나가 혼자 자는 게 무서우면 아빠한테 옆에서 같이 주무시라고도 하고요.”박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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