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라!” 소한의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으며 호통이 터졌다.우문호가 김단을 곁에 붙들어 둔 생각만 스쳐도 흉중의 살기가 들끓어 당장이라도 뼈를 갈아 재로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시종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머리를 숙여 공손히 아뢰었다. “약탕욕에 든 약재는 지극히 귀하여, 김 낭자께서 친히 가려 곱게 갈아 넣으셨사옵니다. 소공자, 부디 그 정성을 저버리지 마옵소서.”그 말이 맑은 샘물처럼 그의 천둥 같은 노기를 조금 식혔다. 소한이 약탕욕으로 시선을 돌리니, 자욱한 김이 피어올라 마치 김단의 기운을 머금은 듯 요동치는 마음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그녀의 뜻이라면 어찌 함부로 저버리랴.하지만 곧 우문호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오늘 둘째 황자 전하께서 돌연 심기가 급박해져 급히 위태로우셨사와, 방금 전 김 낭자를 부쳐 구원케 하였사옵니다. 소공자께서는 지나치게 염려 마옵소서.” 시종이 다시 온화히 권하였다.소한의 낯빛은 물처럼 어두워지고 미간에는 번민이 물결쳤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끝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몸을 돌려 약탕욕으로 향했다.두 시진의 고행은 여전히 지옥 형벌과도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침욕 뒤로 근골에 분명 기운이 조금 돌아온 터라, 이번에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 시종의 부축을 받아 탕에서 나왔을 때 얼굴빛은 종이처럼 창백했고, 입술엔 물어뜯은 자국이 또렷했다.옷을 겨우 갖춰 입자 그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성큼 밖으로 내달렸다. 회랑을 지나 뜰을 건너는 내내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마침내 우문호의 처소 문밖에 다다랐다.우달이 팔을 가로내며 무표정하게 막아섰다. “전하께서 지금 정양 중이시니, 소공자….”말을 채 맺기 전, 소한의 살을 에는 냉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소한이 중상에서 아직 완쾌하지 못해 기운이 들뜬 줄 알면서도, 그 눈빛이 스쳐 오자 가슴이 저도 몰래 움츠러들었다. 마치 새끼 이리가 늑대왕을 맞닥뜨린 듯, 본능적으로 엎드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 자각이 몹
말을 주고받는 사이, 그림자 속에 있던 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빛이 얼굴을 스치자, 때가 잔뜩 묻고 살이 많이 빠졌건만 최지습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세번째 도령.”마침내 찾았다. 최지습의 가슴속에 기쁨이 솟구쳤다.그가 일부러 목강수의 서재 창에 흔적을 남기고, 반나절을 들여 목몽설을 가산 숲으로 불러낸 것은 모두 금역에서 자신과 물증을 함께 붙잡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 달을 더 헤매어도 호랑이군의 형제들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금역의 석대를 허물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쯧쯧.” 쉰 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두번째 도령이었다. “우리의 영명무쌍하고 계책이 모자람 없는 평양원군도 이번에는 참으로 곤궁하시구려.” 그는 일부러 장단을 늘이며 빈정거렸다. “보라지, 목씨 가문의 손님 대접이란 참으로 특별하오. 아예 우리 백도령을 데려다 검은 물에 목욕까지 시켜 주지 않던가.”구석에 웅크린 몇몇 그림자도 답답한 웃음을 흘렸다.최지습의 입끝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보아하니 너희도 여기서 목욕을 제법 한가롭게 즐겼구나.”“어디가 한가롭단 말이오!” 여덟번째 도령이 목을 울리며 성을 냈다. 손목의 쇠사슬을 흔들자 칙칙한 쇳소리가 났다. “이놈의 축축한 기운에 뼈가 다 무너져 내리겠다니까.”“그러게 말이오.” 다섯번째 도령이 곧바로 받았다. “우리가 여기서 쥐를 몇 마리나 셌는지 아시오?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오시긴 오셔도 그리 더디 오시고, 게다가 꼴은 우리보다 더한 죄수 같으시니 원.”최지습은 그들의 농을 굳이 받지 않았다. 번개처럼 눈길을 굴려 모두를 훑었다. “모두 약을 먹였나. 사지에 힘이 없지.”“그렇지요!” 일곱번째 도령이 곧장 하소연했다. “그 늙은 개가 영악하기 짝이 없소. 우리를 잡을 때도 그 짓을 했지. 칠흑 같은 밤에 몽혼향을 풀어놓더니, 눈을 뜨니 이 귀신 같은 곳에 내던져졌소. 내력이 티끌만큼도 오르지 않아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니까. 날마
목강수는 비단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양이가 쥐를 잡았을 때처럼 잔혹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음침하고 서늘한 눈빛의 그에게서 평소의 고상하던 가주 모습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대군께서 이 밤중에 우리 가문의 금지 구역을 방문하시다니, 내 ‘선물’이 마음에 드시오?”목강수의 말에는 희롱이 담겨 있었다. 그의 시선은 최지습의 창백한 얼굴과 살짝 떨리는 손을 향했고,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하얀 해골들에서 멈췄다. 마치 평범한 잡동사니를 보는 듯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몽설 그 계집아이는 아직도 입을 함부로 놀리는 모양이군.”최지습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약효가 밀물처럼 밀려와 그의 정신력과 체력을 갉아먹었다.주먹을 쥐어보려 했지만, 손가락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그는 고개를 들었다. 비록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목강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목소리는 탈진으로 인해 작고 쉬어 있었지만, 놀라울 만큼 또렷했다. “대감… 그 허황된 보물을 위해… 이렇게 많은… 무고한 아이들을… 해친 것에 대한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오!”“무고하다니?” 목강수는 어이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목씨 가문을 위해 선조의 보물을 여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니, 그들에게는 영광이오! 그들의 희생은 우리 가문의 기틀을 만들기 위함이오! 여인처럼 여린 마음으로 무슨 큰일을 이루겠소?”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최지습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최지습. 나는 자네가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했소. 우리 집에 손님으로 와서 얌전히 지낼 줄 알았건만. 감히 밤에 내 서재를 뒤지고, 우리 목씨 가문의 가장 큰 비밀을 알려고 할 줄이야!”최지습은 침목했다.온 몸의 진이 다 빠진 상태였고, 무력감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심지어 시야도 점점 흐릿해졌다.“끌고 가라!” 목강수는 엄하
그때, 귓가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아주 미세한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그런데 그 소리는 돌 탁자가 아닌, 돌 탁자 뒤에 있는 견고한 돌벽에서 나는 것이었다!최지습은 그 순간 경계심이 들며 순식간에 칼을 거두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경계 태세를 갖췄다.돌벽이 소리 없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틈새를 드러냈다. 돌 탁자에서 나던 피비린내보다 백 배는 더 진하고, 숨이 막힐 듯 끈적이며, 마치 수만 구의 시체가 동시에 썩는 것 같은 악취가 둑이 터진 홍수처럼 틈새에서 쏟아져 나왔다!최지습은 과거 전장에서 시체를 수도 없이 봐오며 썩은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문의 악취에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그는 곧장 숨을 참고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 만을 드러내고 있었다.틈새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이고, 안은 칠흑 같았다.최지습은 옆 벽에서 촛불 하나를 떼어 들고는 천천히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촛불의 희미한 빛은 간신히 눈앞의 짙은 어둠을 몰아냈고, 동시에… 지옥을 밝혔다!최지습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발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한기가 올라왔고, 몸속의 피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밀실은 크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바닥부터 벽의 겹겹이 쌓인 돌 선반 위에까지 빽빽하게… 해골이 쌓여 있었다!아주 작고, 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해골들이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숨구멍, 작고 아담한 손가락뼈…그것들은 마치 버려진 장작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많은 해골에는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강보 조각들이 붙어 있었다. 한때는 선명했을 깨끗했을 천 조각들은 지금 낡고 어두운 색으로 남아 말없는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희고 차가운 뼈들은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소름 끼치는 잿빛 광택을 뿜어냈다. 그 수가 백 구는 넘어 보였다!목몽설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귓가에 울렸다. “백 년 동안… 목씨 가문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금지 구역으로 끌려갔습니다…”최지습은 마음이 강
책상과 의자를 본 최지습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방 안에는 그 두 가지 물건만 있었다. 얼핏 봐서는 이것들이 밀실을 여는 장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하지만 그가 만약 이 방의 주인이었다면 그 책상과 의자를 미끼로 침입자를 죽이는 장치를 만들었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최지습의 눈은 다시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지형도에는 이 방이 그려져 있었지만,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 방 안의 살인 장치가 매우 단순하여 굳이 따로 표식을 해 둘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다시 말해, 그 책상과 의자만 건드리지 않으면 이 방은 매우 안전하다는 것이었다.이에 최지습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불을 꺼내 들고 천천히 탐색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벽에는 실금 하나 없었고, 바닥 역시 이상한 점이 없었기에 이 밀실에 대체 어떤 장치가 숨겨진 것인지 의아했다.설마, 밖에 있는 것 아닐까?최지습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불씨를 끄고 나가려 손을 뻗어 문을 여는 순간, 문빗장이 약간 헐거워져 있음을 발견했다.‘작은 것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최지습이 문빗장을 돌려 보자, 정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이어서 뒤편으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순간적으로 최지습이 몸을 돌렸다. 책상과 의자가 앞뒤로 천천히 벌어지며,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드러났다.통로 안 촛불이 서서히 켜지며 앞길을 밝혔다.최지습은 입구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고 긴 돌계단이 구불구불한 검은 용처럼 지하로 끝없이 이어져,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아무래도 목몽설이 말했던 그 장치가 바로 이 아래에 있는 모양이었다!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마침내 돌계단에 발을 디디며 천천히 내려갔다.얼마나 걸었을까.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갑자기 공간이 넓어졌고, 넓은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중앙에는 기이한 형태의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돌 탁자는 전체가 새까매 어떤 재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표면에는 복잡하고 기괴한 부호들이 새겨져 있었다.탁자 한가운데에는 사발 크기만 한 원형
게다가 그때 김단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그렇기에 목씨 가문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온갖 수단을 써서 김단을 당국 수도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그 이후는?최지습은 생각에 잠겼다.목씨 가문은 언제쯤 움직이기 시작할까?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사방이 고요했고, 오직 야간 순찰 중인 호위병들의 규칙적이고 둔탁한 발소리와, 멀리서 가끔 들려오는 새 소리만이 이 죽은 듯한 침목을 깨고 있었다.최지습은 검은색 무복을 입고 밤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금지 구역의 일에 대해 긴 시간 고민한 그는 마침내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목씨 가문이 움직이기 전에 그 빌어먹을 장치들을 모조리 부숴서 그들의 음침한 악습을 끊어낼 생각이었다!어젯밤 목강수의 서재 밀실에서 보았던 지형도를 바탕으로, 최지습은 금지 구역 밖으로 빠르게 다가갔다.그는 울창한 호랑가시나무 뒤에 엎드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둠을 너머 금지 구역 밖에 서 있는, 바위와 거의 하나가 된 두 사람의 형체에 시선을 고정했다.지형도에 표시된 무기와 장치의 위치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바로 이 두 명의 무공들이었다.두 사람의 무술 실력은 그보다 뒤쳐지지 않았다.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어떻게든 그들을 유인해야 했다!이에 그는 손에 돌멩이 두 개를 집어 들고 손끝에 내공을 실어 정확히 30걸음 떨어진 곳의 장치를 향해 던졌다.“딸깍! 딸깍!” 두 차례 미세한 소리가 울렸고 돌멩이는 정확히 장치를 건드렸다.이어서 몇 개의 암살 장치가 바닥을 뚫고 나왔고, 달빛 아래 날카로운 곡선을 드러냈다.그 순간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형체가 귀신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은 양쪽으로 갈라져 놀라운 속도로 장치가 작동된 곳으로 향했다!바로 지금이다!최지습은 힘이 넘치는 표범처럼, 무공들이 사라지는 순간 호랑가시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그는 지도에 표시된 장치와 함정의 위치를 정확히 피하며, 두 무공이 장치에 도착하는 동시에 금지 구역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