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소?”임학은 날선 목소리로 외쳤다.술기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었다. 머리는 둔기에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임원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지금쯤 추운 동래에 있어야 할 그녀가 왜 한양 한복판에 나타난 걸까?“낭자가 지금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 거요! 낭자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죽을 수 있다고!”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지만 들끓는 분노는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세차게 움켜쥐었다.임원은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작고 마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오라버니, 생일 축하드려요.”임학의 심장이 순간 멎는 듯했다.아직도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정이 휘몰아쳤다.임학은 말없이 그녀가 내민 것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직접 깎아 만든 평안 고리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혹여라도 그가 평안 고리를 버릴까 두려워 울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무엇을 드려야 할지 몰라서요. 예전에 오라버니는 제게 비녀를 깎아주셨잖습니까? 그게 저한테는 너무 소중한 물건이라 저도 언젠가는 오라버니에게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저 오라버니께서 남은 생을 평안하게 살기 바랄 뿐이에요.”“낭자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안했을 것이오.”임학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그 안의 감정은 분명 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임원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임학의 손에서 점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지자 임원은 망설임 없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오라버니, 걱정 마세요. 절대 오라버니와 임가에 피해 끼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전 이제 임가의 딸도 아니니까요.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냥 제 목을 치세요. 저는 이제 죽는 게 무섭지 않습니다. 그냥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온 겁니다.”그녀는 두 손으로 평안 고리를 높이 쳐들었다.한없이 왜소한 그 모습에 임학의 눈동
가슴 어딘가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조여왔다.임학은 저도 모르게 성큼 다가가 임원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발은 어떻게 된 것이오?”임원의 눈빛 속에 순간 희미한 기쁨이 번졌다.하지만 그녀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연기하기 시작했다.“오라버니...”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임학을 불렀다.“오라버니께서 두 명의 포졸들한테 은을 쥐어주셨잖아요. 그 사람들... 돈은 돈대로 받았으면서 저를 괴롭혔어요. 밥도 안 주고 저를 욕보이려 했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잠겨있었고 입술은 새파랗게 변했다.그녀는 애써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너무 무서웠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냥 도망쳤습니다. 거리를 떠돌아다닌 덕에 몸에서는 썩은내가 나기 일쑤였죠. 그래서 아무도 절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거지들에게...”말을 잇지 못한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그녀의 가식적인 눈물은 진심으로 절절해 보였다.“오라버니,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요. 정말 너무 싫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학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분노, 충격, 후회, 혼란...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머리가 하얘졌다.그는 포졸들에게 돈을 쥐여주며 임원을 안전하게 동래로 데려다주라고 했다.모든 일이 조용히 끝났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 대가가 이런 거라니.그는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참히 부서져버렸다.동래는 멀고 전하의 눈길조차 닿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다.그곳에서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었다.몸도 마음도 이미 너덜너덜해진 이 아이를 다시 그 지옥으로 보내야 하는 걸까?또다시 모욕당하고 학대당하게 놔두어야 하는 것일까?상처로 얼룩진 사람은 김단 하나로 충분했다.이제 또 한 명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그렇다고 이곳에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녀의 이름은 아직도 임씨 족보에 올라가 있었다.누구든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임
임학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왔다.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흐리멍덩한 것을 본 하인은 그저 술에 잔뜩 취한 줄 알고 서둘러 숙취 해소용 차를 들고 왔다.임학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집어 들고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그제야 가슴 깊은 곳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겨우 내려간 것 같았다.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하인은 조심스레 물었다.“도련님, 괜찮으신가요? 의원을 부를까요?”하지만 임학의 귀에 그의 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하인은 혹시라도 술에 취해 실성한 게 아닐까 싶어 속으로 조바심을 냈다.하지만 임학의 눈앞에 떠오르는 건 임원뿐이었다.그녀가 정말로 돌아온 것이다.어떻게 포졸 둘을 따돌린 거지?어떻게 살아 돌아온 걸까?도대체 언제부터 한양에 있었던 거야?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어째서 아무도 몰랐던 거지?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의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불안감으로 인해 점점 가슴이 조여올 때 즈음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이 떠올랐다.자신의 저택에 그녀를 들이다니...그건 너무 충동적인 선택이었다.그 한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임가 전체를 멸망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설마 그 포졸들이 임원의 탈주 사실을 조정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걸까?하지만 죄인을 동래로 유배 보내면 반드시 책에 등록해 놓아야 한다.그렇다면 그들은 허위보고를 했다는 뜻인데...임학은 생각하면 할수록 식은땀이 났다.임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의 눈빛은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다.이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당장 아버지와 상의해야만 했다.생각을 마친 그가 곧장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익숙한 복장의 하인이 급히 달려왔다.그는 진산군의 측근 하인이었다.“도련님, 안녕하십니까?”그는 숨을 몰아쉬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진산군께서 도련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급히 의논하실 일이 있다고…”이 밤에?임학의 얼굴
임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어쩌다 동래 관아에서 임원의 죽음을 단정 지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처리한 시신은 누구였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하지만 분명한 건 이 모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전환점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진산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이 아비도 안다. 너와 원이는 피보다도 진한 정을 나눈 사이지.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지. 네 어미를 진정시킬 방도를 먼저 생각하고 동래로 가서 임원을 다시 데려오는 게 어떻겠느냐?”“아버지!”임학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얘기했다.그의 눈빛은 단호했고 얼굴엔 전례 없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임원은 지금 제 동쪽 저택에 있습니다.”순간 진산군의 눈에 낯선 감정이 스쳤다.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어 그저 아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자신의 아들은 쉽게 감정에 휘둘리고 충동적이며 문제를 일삼기는 했지만 중요한 순간에 헛소리할 사람은 아니었다.진산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손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번졌다.“너… 지금, 아비를 속이는 것이냐?”“아버지, 어떻게 그런 말을... 제가 어찌 이런 일을 두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임학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의 이마에는 진한 주름이 드리워져 있었다.“한 시진 전이었습니다. 제가 취향각에서 나오는 길에 임원을 발견한 게. 초라한 거지 차림이었기에 한동안은 제 착각인 줄 알았어요.”그는 허리춤을 더듬더니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보십시오. 임원이 제게 주고 간 것입니다. 오늘 제 생일이라는 걸 알고 이 평안 고리를 제게 주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더군요.”진산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아들 앞까지 다가갔다.그러더니 그 평안 고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그건 볼품없는 나뭇조각으로 만든 것이었다.귀한 재료도 아니었고 정교하게 깎인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 위에 삐뚤빼뚤하게 새
임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저택 안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임원을 어머니 곁에 두고 싶다면 어머니의 병세가 심해졌다는 핑계로 제 저택에 지내게 하는 수밖에 없어습니다.”진산군 댁에 있는 하인들, 특히 오래 이곳에 머문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믿을 수 없었다.누군가 임원을 알아보게 된다면 임가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진산군은 깊은 생각 끝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의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더냐. 너희 어머니 병은 요양이 제일이라고. 열흘, 보름에 한번은 진맥하러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겠구나.”임학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말하지 않았지만 가슴 한편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스르르 내려앉는 듯했다.숨을 돌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진산군 역시 역시 어딘가 홀가분해진 듯 안도감이 섞인 표정이었다.희미하게나마 입가엔 웃음이 피어올랐고 얼굴도 한층 부드러워졌다.그 순간 문득 김단의 얼굴이 떠올랐다.오랜 시간 억눌러 온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마음속에서 무언가 갈기갈기 찢기듯 일렁였다.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아버지.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요? 김단에게 너무 미안한 일 아닙니까?”진산군은 뜻밖의 질문에 순간 할ㅜ말을 잃었다.그는 서서히 고개를 들고는 아들을 바라보았다.잠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동자 속에는 죄책감이 비쳐있었다.진산군은 한참을 뜸 들인 후에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지금 그 아이는 평양 원군 곁에 있다. 지금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 적어도 소한에게 해코지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임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단이 평양 관저에서 잘 지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그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었으니까.이곳, 진산군 댁이 바로 그녀가 나고 자란 진짜 집이었다.그 집에서 그녀는 거짓된 진실에 밀려났고 상처만을 안고 쫓겨났다.그녀는 죄가 없었다.그럼에도 죗값을 치른 건 그녀였다.
김단은 당황하다 사실대로 대답했다.“침을 두었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내 그럴 줄 알았소! 소 장군의 상태가 이렇게 좋아질 수 있었던 건 자네의 침술 덕분일세. 오늘 돌아가거든 한번 더 놓아주시오. 마침 나도 좀 배워야겠소.”이 말을 들은 김단은 깜짝 놀랐다. “제가 놓은 침은 소 장군님의 열을 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복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히 함부로 남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그 침술은 의원이 그녀에게 준 의서에 쓰여있던 것이었다.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약왕곡의 침술이라는 것을 들키게 되면 의원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수 어의는 하얀 수염이 휘날릴 정도로 펄쩍 뛰었다. “이런 은혜도 모르는 경우를 보았나! 내 정성껏 의술을 가르쳤거늘, 고작 침술 하나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것이오!”“하지만 수 어의님은 저의 선생이시 잖아요!”김단은 수 어의의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맞지,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알았네, 알았어! 내 도저히 자네를 못 당하겠네! 소 장군의 부상이 심한데, 내가 지금 가서 진찰하는 걸 자네가 제자로서 따라가 배우는 것은 어떠하오?”수 어의가 되물었다.김단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의술은 어디에도 통하는 것이니 소한의 부상을 치료하는 방법을 배워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에 그녀는 순순히 승낙하고 수 어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김단이 도착했을 때 소씨 부인은 소한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하지만 가슴의 상처가 너무 아픈 탓인지, 폐부근까지 다친 탓인지 소한은 한 번에 겨우 한 모금씩밖에 마시지 못했고, 약 한 그릇을 먹이는 데 한참이 걸렸다.수 어의가 오는 것을 본 소씨 부인은 급히 손에 들고 있던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수 어의 뒤에 김단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지난날 다급한 마음에 김단에게 무릎 꿇고 애원했던 기억이 떠오른 소씨 부인은 순간 표정이 약간 굳어
김단은 의원의 약 효능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하지만 사실 그녀도 어느정도 예상했어야 했다.과거 명정대군에게 심하게 맞았을 때도 의원의 약 덕분에 살아났었다.소한의 빠른 회복속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수 어의는 전문가로서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김단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일어나 옆으로 물러섰다.소한은 김단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지막이 물었다. “어떠하오?”김단은 소한을 한 번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매우 좋습니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너무 달랐던 탓인지, 소한은 그녀의 뜻을 오해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괜찮소, 얼마 더 못 살아도 괜찮소. 적어도 낭자가 기뻐할 수 있다면 그만이오.”그 말을 들은 김단은 미간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소씨 부인은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이에 김단은 자연스레 소한을 노려보았다.말을 못 하겠으면 입이나 다물고 있을 것이지!수 어의가 적절한 시기에 입을 열었다. “소 장군, 안심하시오. 몸은 아주 잘 회복되고 있소. 하지만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온 몸이니 당분간은 휴식이 필요하오.”“그게 사실인가요?”소씨 부인은 다급하게 물었다.수 어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실이오.”대답을 마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군의관을 찾아가 약재를 좀 알아 봐야겠소. 낭자, 낭자는 남아서 소 장군을 좀 돌봐주시오.”수 어의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고, 소씨 부인까지 동행하였다.김단은 입도 벙끗하지 못한 채 그곳에 남겨졌다.순식간에 그녀는 소한과 마주하게 되었다.소한은 매우 기뻐 보였다. 그의 눈가에 웃음이 가득했다.“수 어의가, 아마 어머님께 할 말이 있는 것 같소. 쿨럭, 쿨럭쿨럭…”“말을 아끼시지요.” 김단은 어쩔 수 없이 눈을 흘기며 그의 옆에 앉았다. 이윽고 소한의 시선이 먹다 만 약 그릇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김단은 그의 뜻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소한이 말했다. “약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소한의 입에 약을 넣어주었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앞날을 생각해야죠.”소한은 김단이 다시금 자신을 잊으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한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 아가씨가 지금 자신의 침상 앞에 앉아 숟가락으로 약을 먹여주고 있다.이렇게 가까이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마치 10만 리나 떨어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차지할 수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는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그는 억울했다. 어떻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감정이 너무 격해진 탓인지, 그는 입안의 약을 채 삼키기도 전에 기침을 했고, 기침은 한참동안 멈추지 않았다.김단은 다급히 일어나 소한의 등을 쓰다듬었다.그는 폐를 다쳤다. 이정도의 심한 기침은 그의 부상을 악화시킬 것이다!하지만 당장 곁에 수 어의가 없었기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크게 당황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수 어의를 찾아오겠습니다!”김단은 말을 마친 뒤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소한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큰 손은 말도 안되게 차가웠다.분명 무더운 날씨였음에도 그의 손은 마치 얼음장과 같았다.그의 맥박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에 보통 사람보다 훨씬 허약해진 상태였다.그럼에도 그의 힘은 엄청났다.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은 김단이 뿌리칠 수 없을 정도였다. 김단은 차마 힘껏 뿌리치지 못했다. 자칫 그의 상처를 건드릴까 미간을 찌푸린 채 소한을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소한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골랐다. 한 손으로는 김단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의 상처를 감싸 쥐며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수 어의를 귀찮게 할 필요 없소. 낭자만 옆에 있어주면 되오.”김단은 제자리에 서서 굳어 졌고, 표정은 전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