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덕빈의 시선은 김단의 부은 뺨에 머물렀다.그녀는 한참 그것을 지켜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김 낭자, 내가 연기를 너무 실감 나게 해서 원망하는 것은 아니겠지?”김단도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마님께서 세게 내리치시지 않았다면 어찌 서원공주를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김단은 이미 덕빈에게 서원공주가 손헌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귀띔해 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공주가 사람을 죽인 후 가장 먼저 김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아마도 서원공주는 이 기회를 빌어 김단이 자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그게 아니라면 덕빈과 김단의 관계를 갈라놓고 다른 이들이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김단도 오늘 덕빈한테 뺨을 맞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하지만 서원공주의 말을 들은 후에야 덕빈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김단은 덕빈의 맥을 짚어 보았다.지극히 정상적으로 뛰는 맥박이 그녀가 진짜로 분노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그때 덕빈이 입을 열었다.“손헌은 죽지 않았소. 죽은 건 우리 집안의 한 하인일 뿐이오. 하지만 그 아이가 이리도 잔인하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소.”손과 발을 자른 것도 모자라 그딴 짓까지 하다니.“손헌 도련님은 당분간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됩니다.”덕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말시오. 내 이미 손헌을 잘 숨겨두었소.”그러고는 김단 다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낭자는 어쩔 셈이오? 계속 서원공주의 발밑에 있는 개 노릇이나 하겠다는 것이오?”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덕빈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서원공주는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전과 세자의 보호도 받고 있습니다. 공주를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덕빈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공주를 건드린다면 전체가 뒤바뀔 것이오. 공주와 얽히고설킨 자들이 많아서 말이지...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고 복잡하오.”
“그 아이를 보호해 달라는 말씀입니까?”김단은 깜짝 놀라 덕빈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속으로 덕빈이 잔혹하고 음험한 일을 시킬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가 부탁한 것은 한 궁녀를 보호해달라는 것이었다.“서아름이라는 아이 말이오. 원래는 내 시중을 들던 나인이었소. 그런데 7개월 전 술에 취한 전하가 그 아이를 나로 착각해 그만...”말끝을 흐리던 덕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곱고 조용한 아이였소. 나이가 차면 궐에서 내보내려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전하께서는 이 모든 책임을 아름이한테 떠넘기려 했소.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 아이는 죽었을 것이오.”그 말을 들은 김단은 기분이 언짢아졌다.그녀의 나이는 아마 자신과 비슷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어릴지도 모른다.그렇게 어여쁜 나이에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남자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그 죄까지 뒤집어쓸 뻔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김단은 이전까지 전하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가 혐오스러웠다.김단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덕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복인지 화인지 모르겠지만 아름이는 단번에 아이를 가졌소. 그 덕에 전하께서는 그녀를 숙원으로 봉했고 지금은 복화궁에 살고 있소. 중전마마께서도 그 아이가 안타까우셨는지 조석문안도 면제하고 온갖 보양식을 보내주고 있소.”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김 의원,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소?”김단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왕의 아이를 가진 대가로 궁궐 구석에 위치한 복화궁에 갇힌 채 살고 있었다.이름만 숙원일 뿐 지위도 낮고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몸이 아니니 하인들조차 그녀를 무시할 것이다.조석문안도 면제되었다는 건 그녀가 거의 방에만 갇혀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게다가 보양식만 먹인다는 것을 보면 아마 태아를 비정상적으로 크고 무겁게 만들려는 목적이겠지.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겉으로 보
김단은 얼굴에 약을 바르고 난 후 조용히 돌아가려 했다.하지만 내의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늘 그랬듯 금빛 장식이 얹힌 검은 금군복을 입은 소하가 문 앞에서 김단을 기다리고 있었다.“오라버니?”김단은 무심코 그를 불렀다.“왜 여기 계세요?”소하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짙은 주름이 새겨졌다.그가 천천히 걸어와 김단의 앞에 섰을 때 그의 두 눈은 오직 그녀의 부은 뺨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덕빈마님이... 이렇게 세게 때렸다고?”분명 그녀가 맞았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게 틀림없었다.내의원에서 야간 근무를 서던 이어의는 그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다른 방으로 자취를 감췄다.김단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소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는 말없이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단호했다.그가 연고를 꺼내 드는 것을 본 김단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오라버니 전 정말 괜찮습니다. 저...”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손끝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억눌린 분노가 조심스레 전해져 왔다.차분하고 냉정한 그의 얼굴에서도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소하는 지금 김단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그러나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뺨에 선명하게 남은 다섯 손가락 자국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조금만 더 세게 맞았더라면 피부가 찢어졌을지도 모른다.소하는 묵묵히 그 상처를 바라보며 연고를 발라 주었다.그러다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가 상처 부위에 조심스레 입김을 불었다.갑작스러운 차가운 숨결에 김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하는 자신의 상처에 바람을 불어 식혀주고 있었던 것이다.마치 어릴 적 어머니가 다친 손을 불어주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괜찮아. 이제 안 아플 거야.’어머니가 마법처럼 속삭이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그 주문처
소한이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김단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소하가 그녀의 얼굴에 약을 발라 줄 때부터였을까?아니면 조심스럽게 상처에 숨결을 불어줄 때부터였을까?하지만 소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단번에 깨달았다.그는 지금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서늘하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했다.김단을 쏘아보는 그 시선에는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예전에 명정대군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도 분노하긴 했었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은 그때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뜨거웠다.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을 텐데 지금은 너무나도 차분했다.아니, 어쩌면 그가 이렇게 오해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오해가 쌓이면 체념하고 자신을 포기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비롯된 마음이었다.소하 역시 김단의 시선에서 뭔가를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소한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원래라면 소한은 병영에 나가 있어야 했다.그런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김단을 보기 위해 무단으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소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숨기지도, 그렇다고 해서 피하지도 않았다.그는 김단을 아끼는 마음에 직접 그녀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그게 전부였다.그러니 그 어떤 해명도 필요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작은 그녀를 품에 안고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그런데 과거 그의 손에서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 자가 누구였던가?만약 소한이 자신을 속여 잠들게 하지 않았더라면,만약 어머니가 김단에게 화리서를 쥐여주지 않았더라면자신은 당당하게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김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소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약 발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소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심히 가시오.”몸을 돌려 걸
말이 길어지면 또 오해할 것이 뻔했다.김단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한은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소하가 문 앞에 와 있었다.그는 김단이 사라진 방향을 힐끗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전하를 뵈러 가야 한다면서?”그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소한은 오늘 보고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반드시 전하를 찾아뵙겠다고 말했었다.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김단을 보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소한은 이를 악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비열한 놈.”이에 소하는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며 특유의 차가운 음성으로 되받아쳤다.“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소하는 김단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그걸 이용했을 뿐이다.비록 장군 자리는 소한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김단 옆자리만큼은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어쩌면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김단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소하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직접 자신의 눈으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하고 나니 그 위안은 시기와 질투라는 이름으로 변해버렸다.조금만 더 오래 봤다면 분명 참지 못했을 것이다.어쩌면 그 자리에 뛰어들어 소하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버렸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겨우 참아냈다.그런 소한을 바라보며 소하는 속으로 은근한 쾌감을 느꼈다.하지만 겉으로는 차분하게 충고를 던졌다.“오늘 일 말이다. 뭔가 수상해. 김단이 네 도움을 거절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섣불리 움직이지 말거라.”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제가 멍청한 줄 압니까?”그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계략을 꿰뚫어온 사람이다.김단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 어디까지가 계산된 행동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소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네가 안다니 다행이군
며칠이 더 흘렀다.김단은 중전의 진맥을 끝낸 뒤 전하의 침전으로 향했다.그곳에는 혜비도 함께 있었다.김단을 보자 혜비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익살스럽게 말했다.“전하, 김 의원의 의술은 그야말로 신통합니다. 신첩을 좀 보시지요. 요즘 얼마나 생기 넘치는지... 얼굴이 더 환해진 것 같지 않습니까?”자신을 스스럼없이 치켜세우는 혜비의 말에 전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내 여인은 원래부터 아리따웠소.”혜비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전하 옆에 앉아 있었다.그 둘의 대화는 신경 쓰지 않고 맥을 짚는데만 집중하던 김단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전하의 맥은 안정되고 힘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매일 약을 드실 필요는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이틀에 한 번씩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전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혜비가 입을 열었다.“역시 전하는 다르시군요. 신첩보다 연배가 많으신데 어찌 이리도 정정하십니까? 그에 비해 복 없는 자들은… 뭐... 그 서아름이라든가. 이제 갓 스무 살 넘은 나이인데도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지 않사옵니까?”서아름.그 이름에 김단의 눈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김단은 마침 서아름의 일을 어떻게 전하 앞에서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다.그런데 뜻밖에도 혜비가 먼저 그녀를 언급해 주었다.그녀 역시 덕빈과 같은 배를 탄 사람이었다.서아름의 이름이 언급되자 전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중전이 그 아이에게 좋은 보양식들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기운을 못 차렸단 말이냐?”혜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제 매화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안색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배도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고 말입니다. 제발 전하의 자손만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 말이죠.”그 말에 전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그에게 있어 서아름은 눈엣가시였다.신분이 낮을 뿐만 아니라 용모도 평범했으니 전하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그날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실수
서원 공주가 김단이 복화궁에 가려는 소식을 어찌 이리 빨리 들었을까.더하여 궁침에서 나눈 대화이지 않은가.혹여 그녀가 임금의 근처에 사람이라도 심어 둔 것일까.김단은 심장이 철렁했다.동시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날, 임금 앞에 서아름을 입에 올린 자는 혜비였기 때문이다.자신이었다면 이전에 쌓아온 신뢰가 한번에 무너졌을 것이다.얼굴에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공주 마마께서 소신을 이리도 아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소복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미소를 지었다.“나으리께서 공주 마마를 생각해 주시면 돼옵니다.”그리고는 그녀에게 허리를 숙였다.“나으리, 들어 오십시오.”“소 내관께 부탁드리옵니다.”김단도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그리고 소복의 뒤를 따라 복화궁으로 향했다.사실 궁 안의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복화궁은 서쪽의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길만 따라가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소복이 앞장 서서 길을 안내했다.얼마나 걸었을까.궁녀와 내시들이 주위에 보이지 않았다.소복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일부로 놀라는 척을 했다.“소 내관, 어찌 멈추시는지요? 복화궁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이다!”소복이 웃음소리를 내었다.“나으리, 당황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공주 마마께서 나으리께 전하라 하신 말씀이 있사옵니다.”김단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곧이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말씀을 전하셨나이까?”소복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서아름은 이전에 덕빈의 사람이었나이다.”말을 더 할 필요가 없었다.그의 한 마디는 그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서원 공주의 뜻은 김단의 뺨을 내려친 덕빈의 행동을 기억하고, 덕빈을 향한 한은 가슴에 묻어놓은 채, 서아름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김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이어 소복이 말을 이었다.“공주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나으리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라 알아들을 수 있다 하셨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