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왕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뚜렷한 당혹이 스쳤다.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진산군 댁 말씀이십니까? 아씨, 혹시… 이미 돌아가신 진산군이랑 임씨 부인 말씀입니까? 무덤에 가서 제를 올리시려는 겁니까?”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은 벼락처럼 김단의 귓가에 떨어졌다.그녀의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소매를 정리하던 손동작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왕철을 바라보았다.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녀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왕철… 방금 뭐라고 했느냐? 이미… 돌아가셨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왕철은 김단의 반응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씨,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진산군과 임씨 부인 두 분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때 아씨께서 한양을 떠나실 때 있었던 일이잖습니까.진산군께서 아씨를 지켜 내시겠다고 두 팔을 문빗장처럼 걸고 성문을 버티셨습니다. 그러다 그 죽일 놈이 그 두 팔을 몽땅 잘라 버렸고요. 종은… 당연히 아씨께서 알고 계신 줄로만 알았습니다.”“왕철!”숙희가 놀라 소리쳤다.그의 말을 막아 보려 했지만, 왕철의 입은 이미 너무 빨랐다.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쏟아낸 뒤였다.그 순간 김단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모든 소리와 풍경이 한순간에 멀어져 가는 듯했다.왕철과 숙희가 그 뒤로도 무언가를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그녀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벌써… 일 년이 넘었다고…?그럴 리가.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저녁바람이 그녀의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맑고 고왔던 얼굴은 땅거미 속에서 순식간에 핏기를 잃어 갔다.남은 것은 거대하고, 거의 텅 비어 버린 듯한 막막함뿐이었다.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그제야 그녀는 숨을 거세게 한 번 들
우직한 왕철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말까지 꼬여 버렸다.금세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이를 본 숙희가 재빨리 한 걸음 나서며 웃음 띤 얼굴로 달랬다.“아이고 왕철, 그렇게까지 허둥대지 마. 아씨께서 아무 일도 없으셔. 내가 말해 줄게. 아씨 머리카락은 공을 깊이 닦으시고 내공이 더 정진하셔서 이렇게 된 거야. 좋은 징조라니까. 아씨가 더 강해지셨다는 뜻이지. 이렇게 멀쩡히 서 계시잖아.”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둘러대는 것이 가장 빠르다고 숙희는 생각했다.김단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왕철, 나 정말 괜찮아.”왕철은 선뜻 믿지 못한 눈길로 김단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았다.안색은 곱게 상기되어 있고, 눈빛은 맑았다.도무지 병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자 그제야 마음 한구석이 조금 놓였다.투박한 손등으로 눈가를 대충 훔치며 중얼거렸다.“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그는 그렇게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면서도 서둘러 김단과 숙희를 집 안으로 모셔 들였다.떨어뜨렸던 빗자루를 주워 들고는 두 사람 뒤를 따르며 줄줄이 말을 이었다.“아씨, 이제야 돌아오셨습니다. 한양을 떠나신 지도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 종은 날마다 여기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언제나 아씨만 손꼽아 왔습니다. 맞다, 작년 가을에는 옆집 장 숙모네에서 며느리를 들였는데, 우리 쪽에도 떡을 보내 왔습니다. 종이 예법대로 답례도 해 두었으니 이따 한번 보시고, 아씨 눈에도 흡족한지 살펴보십시오. 또 봄만 되자 어디서 굴러온지 모를 길고양이들이 담장 위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기와 두 장을 부숴 먹었습니다. 종이 얼른 사다리를 가져와 지붕에 올라가 막아 두었더니 비 한 방울 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앞거리의 가게 관리자가 우리 집 길가에 면한 그 작은 방을 빌려 잡화점을 내고 싶다고 하더이다. 전에 그 방은 남에게 빌려 주지 말라 하신 아씨 말씀이 생각나서, 종이 단번에 거절해 버렸습니다…”김단은 왕철이 자질구레한 이
이후의 길은 그야말로 평탄했다. 별다른 파도가 일지 않았다.첫째는 진사원이 죽은 일이 이미 강호인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둘째는 소하가 데려온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 조정에서 내린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설령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소동을 일으키려 해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일행은 가는 내내 웃고 떠들며 술을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긴 여정도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보름이 지나자 마차 행렬은 예전처럼 번화한 한양에 닿았다.우뚝 솟은 성벽이 위엄 있게 서 있고, 성문 앞은 수레와 말, 사람들이 뒤엉켜 붐볐다. 떠들썩한 소란은 잔하촌의 고요함과 또렷하게 대조를 이루었다.하지만 아마 이곳을 떠나던 그때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김단은 그 높은 성벽을 바라보며, 진산군이 등을 돌리던 결연한 모습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슴 한가운데가 이유 없이 저릿하게 저며 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심장을 깊숙이 찌른 채, 아무리 애써도 뽑히지 않는 것만 같았다.그날 진산군은 분명 크게 다쳤을 것이다. 정으로나 이치로나, 한 번쯤은 찾아가 봐야 마땅했다.그 생각이 미치자 김단은 곁에 있던 최지습을 향해 몸을 돌렸다.“저는 제 작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최지습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김단은 그가 조금 서운해하는 줄로만 여겼다. 어차피 지금까지는 줄곧 평양관저에서 지내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김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예전에는 소한이 걱정돼서 그리한 것뿐이에요. 이제는 다들 지난 일을 내려놓았으니, 제가 제 작은 집으로 돌아가 살아도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최지습은 한참 만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소.”그리하여 김단은 일행과 차례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숙희 등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마차는 천천히 굴러가며, 그녀가 살던 작은 집이 있는 방향으로 향해 갔다.최지습은 그대로 그 자리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모든 마을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는 사발이나 잔을 들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김단 일행을 바라보았다.김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어 마을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최지습도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섰다. 김단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취할까 염려하여, 그는 김단을 대신해 여러 잔을 마셨다.하지만 그 때문에 진실을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다음 날, 마을 주민들 모두 별 탈 없음을 확인하고, 충분한 약초를 남겨 둔 뒤, 김단 일행은 연신 감사를 표하는 마을 주민들과 작별하고 다시 수도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마차 안, 영칠은 김단에게 최근 소식을 보고했다. “낭자 수도에는 지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소. 각 대 명문과 많은 은둔 고수들이 이미 도착했고, 모두 약재 연못을 위해 모여 상황이 매우 복잡하오.”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덧붙여, 소하 장군도 얼마 전 수도에서 우리를 맞이하러 출발했으니, 일정대로라면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오.”이 말을 듣자 김단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오라버니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요? 그렇다면 고지운 낭자는 어쩐단 말입니까? 시간을 따져 보면 지금쯤 아이를 낳았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김단은 소하가 한양에 남아 고지운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영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분에 대한 별다른 소식은 받지 못했소.”그 말을 들은 김단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사흘 뒤, 해가 질 무렵, 관도 옆의 한 역참에서 김단 일행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려온 소하를 만났다.“대군! 단이 낭자!” 소하는 그들을 보자 얼굴에 진심 어린 기쁨을 드러내며 재빨리 다가갔다. “이제야 만나다니!”그의 목소리에는 상당한 안도감이 묻어났다.최지습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고, 힘껏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네. 수도 상황은 어떠한가?”“많은 강호 인사들이 왔지만, 모두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희는 저도 모르게 걱정하기 시작했고, 머릿속에는 진사원 같은 자들의 얼굴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이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래도, 아씨께서 이번에 개최하는 무예 대회가 많은 이들을 끌어모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강호 인사들이 모이면, 수도가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요?”이 말을 듣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숙희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직 김단만이 숙희를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안심하거라. 수도에는 주상 전하께서 계시지 않느냐! 그 문파들도 함부로 날뛸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무림맹주가 온다 해도, 주상 전하 앞에서는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어째서요?”숙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강호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그렇게 대단한 자들인데, 아무나 마음대로 죽일 수 있지 않습니까?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나요?”그녀는 강호 사람들이 궁궐의 호위 무사들과 맞서도 쉽게 그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김단은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도 어엿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써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한 명의 무림 고수는 확실히 몇번의 동작만으로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지. 하지만 주상 전하의 수하에는 수천수만의 장수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 훈련이 잘 되어 있고, 강력한 활과 쇠뇌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개인이나 문파의 무력은 이런 병력 앞에서는 미미해 질 것이다. 게다가, 큰 문파는 제자가 수백에서 수천 명일 수 있지만, 주상 전하의 군대는 십만 명이 넘는다. 어찌 그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더욱이, 각 문파에는 산문과 토지, 재산,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조정의 관할 아래에 있으니, 그들은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이다.”이 말을 듣자 숙희는 비로소 깨달은 듯했다. “과연 그렇군요. 아씨는 정말 똑똑하십니다. 아는 것이 참 많아요!”숙희의 존경 어린 듯한 모습을 보며, 김단도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렇다, 그녀는 이제 아는
김단은 그 순간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기에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마침 곧 상을 차린다고 하니, 모두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지요!”이번 역병은 진사원이 독을 써서 일으킨 것이고,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마을 주민들의 피해도 크지 않았다.지금은 김단 일행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집집마다 가장 좋은 귀한 것들을 내놓아 모닥불 위에 큰 솥에 향긋한 닭고기와 소고기를 푹 끓이고 있었다.집에서 담근 막걸리도 꺼내어 그 향기가 가득 퍼졌다.공터에는 길고 초라한 나무 탁자가 놓였고, 마을 사람들은 김단 일행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불빛은 춤을 추었고, 재난에서 구원받은 안도감과 감사가 담긴 순박한 얼굴들을 비추었다.“우리가 없던 사이에 형님께서 하마터면 죽을 뻔하셨군요!” 일곱째 도령은 미간을 찌푸렸고, 어투에 두려움이 섞여 나왔다.“그래서, 낭자가 이제 무림 고수가 된 것이오?” 둘째 도령은 최지습이 김단에게 말한 일을 듣고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그들은 이제 김단의 백발이 정말로 큰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다섯째 도령은 더욱 과장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후일에 혹시라도 낭자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면, 한 손만으로 우리 몇을 모두 날려 버리는 것 아니오?”열한번째 도령은 심지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형님께서는 혹여나 낭자에게 잘못 보이지 마십시오. 우리까지 연루되면 큰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이들의 농담에 김단은 얼굴이 붉어질 뿐이었다.최지습도 꽤 곤란했는지 화제를 돌렸다.“너네들은 어떻느냐? 모두 돌아가 보았느냐? 별일 없었고?”셋째 도령은 입가를 닦으며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이번에 돌아가니 속에서 울화가 터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집 꼬마 녀석은, 선생이 글을 가르치니 ‘아비 부(父)’ 자를 억지로 ‘도끼 부(斧)’ 자로 써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그는 입으로는 불평했지만, 눈 속의 웃음과 자랑스러움은 숨길 수 없었다.여덟째 도령도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