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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Author: 주현군

제1화

Author: 주현군
한남더빌 펜트하우스.

이정은 중건에게 밀려 통유리 앞에 붙잡혀 있었다.

앞쪽에서는 유리의 차가운 감촉에 움찔했고, 등 뒤에서는 남자의 체온이 뜨겁게 밀려왔다.

수치심을 삼킨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이정이 숨을 쉴 때마다 신음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며칠간 출장을 다녀온 중건은 그날 밤 유난히 거칠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정이 더는 서 있을 힘조차 잃었을 때야 뒤에 있던 중건은 손을 놓았다.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은 이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바지를 챙겨 입는 중건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잘 발달된 복근에서는 온몸에서 팽팽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차가워 서늘한 느낌만이 고스란히 전달될 뿐이었다.

중건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렇게 담배 한 모금 빨고는 느리게 말했다.

“주말 비행기표 취소해.”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이정은,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애써 상반신을 가리며 말했다.

“주말에 I국에서 진행되는 협력이 중요해요. 우리...”

그러나 이정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중건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취소해.”

그 한마디에 곧바로 입을 다문 이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설득할 방법을 떠올렸다.

이번 거래의 이익은 적지 않았다.

성사되기만 하면 어머니의 두 달 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약회사와 협력 중인 그 회사와의 협상이 잘 풀리면, 특효약에 대한 소식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정은 중건의 곁에서 연인이자 비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기에 이 남자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내린 결정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다.

이정은 계약 서명까지 문턱 하나만 남겨둔 이 시점에 왜 모든 걸 접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중건이 입을 열었다.

“주말에 포시즌호텔 예약해. 나연이 귀국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던 이정은 뭔가를 깨달은 듯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이나연 때문이었다.

발렌타인데이인 주말에 중건이 모든 걸 내려놓는 이유는 결국 나연때문이었다.

나연은 중건이 해외에 있던 5년 동안 마음에 품어온 첫사랑이었다.

이정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중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나연 덕분이라는 얘기를.

나연과 얼굴이 닮은 이정은 결국 대체자에 불과했고, 니즈가 맞아 이어진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끝내 마음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진짜가 돌아왔으니 더는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이상하게 아려 왔다.

“알겠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정리하죠.”

처음부터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진짜가 돌아왔으니 대체품은 이만 물러나는 게 옳았다.

중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비벼 껐다.

“왜 정리해?”

이정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건을 바라봤다.

“그분이 이미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난 세컨드로 남지는 않을 거예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이정을 바라보던 중건은 냉소를 흘리며 재떨이에 꽁초를 힘주어 눌렀다.

“어떤 자리인지는 내가 정해. 너한테 선택권 따위는 없어.”

“그러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말을 마친 중건은 간단히 씻은 뒤 더 머무르지 않고 곧장 나갔다.

창밖에는 네온사인이 반짝거렸고 한남더빌의 밤은 금빛으로 빛났다.

난방을 켠 실내는 충분히 따듯했지만, 이정은 왠지 자신의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유리에 기대선 채, 한참이 지나서야 이정이 낮게 중얼거렸다.

“서중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말 잘 듣는 인형으로만 본 거야?”

“그럼 이번만큼은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

그 일로 중건은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뤘다.

다행히 사정을 이해해 준 I국 프로젝트의 협력사가 계약을 바로 접지는 않았기에, 이정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업무를 마치고 밤이 깊어지자, 이정은 침대에 누워 푹 쉬려 했다.

그때 핸드폰에 중건의 전화가 들어왔다.

이정이 전화를 받자, 전화 너머에서 취기가 오른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와서 데려가.]

그러자 이정은 시계를 확인했다.

“대표님, 지금은 업무시간이 아닌 제 휴식 시간이에요.”

그러나 중건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바로 와.]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비서로 지낸 5년 동안, 휴식 시간에도 늘 호출을 받곤 했었다.

한 달 뒤 받을 연말 보너스를 떠올리면서, 이정은 그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옷을 챙겨 입었다.

중건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문 안쪽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형, 오늘은 왜 나연 씨 안 데려왔어?”

지인들이 웃으며 질문했으나 중건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다문 채,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색이 스쳤다.

“이 자리는 나연이랑 어울리지 않거든.”

“하 비서쪽이 더 익숙하니 편해.”

이후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중건은 첫사랑을 보석처럼 애지중지 대하면서도, 이정이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지는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다.

이정도 돈이 필요했기에, 중건이 시키는 대로 부르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야 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그런 말을 직접 듣자, 그녀의 가슴은 칼에 베인 듯이 아팠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이정은 노크하며 말했다.

“대표님, 도착했어요.”

“그래.”

담배를 쥔 중건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불을 껐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이정을 보는 중건의 시선은 싸늘했다.

“먼저 차 대기시켜. 잠시 후 내려갈 테니까.”

이에 이정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차에 앉자마자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울렸다.

[이정아! 돈은? 이번 달 돈 왜 입금이 안 되어 있는 거야?”

[네 엄마 입원비 다 떨어졌어. 지금 안 주면 네 엄마 죽는 꼴 보게 될 거야.]

이에 이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에 2천만 원 보냈잖아요.”

[무슨 2천만 원?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으니까 4천만 원 더 보내.]

“돈이 없어진 건 아빠가 도박에 써서 그렇잖아요.”

이정은 이를 악물었다.

“아빠, 정말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여야 만족할 거예요? 나보고 어디서 4천만 원을 구하라는 거예요? 계속 그러면 엄마 치료비는 어떻게 하라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소란이 일면서, 마치 누군가에게 밀린 듯한 남자의 말투는 더 거칠어졌다.

[도박 안 했다고! 이번 달 돈 자체를 못 받았다니까!]

[곧 병원에서 병원비 내라고 독촉할 거야. 돈 많은 남자친구가 있다면서, 그 사람한테 받던지.]

[돈을 안 보내면 네 엄마는 끝이야.]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

운전대를 꽉 쥔 이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씩씩거렸다.

중건에게 말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자신은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연인이었고 이 관계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업무 외에 중건의 곁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모욕적인 말은 익숙했으나 그날따라 유독 숨이 막혔다.

휴대폰을 열어 어머니의 의료보험 카드 잔액을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떠나기 전까지 치료비와 이후의 생활비를 위해서라도 연말 보너스만은 필요했다.

차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중건은 내려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정은 둘만 있을 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웃음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하 비서가 다른 데로 갈까 봐 걱정은 안 돼?”

“나연 누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 오늘 하 비서 옷차림 봐.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형이 있는데도 부족한 거야? 우리는 그런 여자는 감당 못 해.”

“내기할까? 지금쯤 형이 없는 걸 알면 들어와서 우리한테 돈을 뜯으려고 할 걸? 그 여자, 돈이 급하잖아?”

이정은 눈을 감았다가 문을 열었다.

“대표님.”

문이 열리자, 잠시 이정을 보던 중건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말 그렇게 돈이 필요해?”

그 질문에 이정은 애써 웃었다.

“I국 협력 건...”

그러나 눈빛이 차가워진 중건은 더 듣지 않고 말을 끊었다.

“이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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