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응? 뭐?"잠에 취한 성웅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낮게 울렸다."진…… 뭐라고?"성웅이 졸린 듯 웅얼거렸다."……진원이? 진원이 꿈 꿨구나"성웅은 피식 웃으며 미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이내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곧 그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하지만 미래는 성웅의 인기척에 깨어났지만 잠에서 깬 척을 할 수 없었다. 성웅의 팔에 안긴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자, 미래는 성웅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밤새 뒤엉킨 꿈의 파편들을 씻어내고 나오자, 거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서윤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공부한 딸의 눈가는 퀭했지만, 표정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엄마! 나 아빠랑 다 끝냈어!"서윤이 들뜬 목소리로 시험지를 흔들어 보였다."학원에서 준 직보 자료 다 풀었는데, 이제 하나도 헷갈리는 게 없어. 엄마, 아빠 진짜 한국사 박사인가 봐. 우리 학원 선생님들보다 훨씬 더 쉽게 잘 가르쳐줘!"서윤은 피로가 극에 달해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였지만, 아빠 덕분에 공부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있었다. 딸의 입에서 나오는 '아빠'에 대한 찬사와 그 순수한 기쁨을 바라보던 미래의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아려왔다.성웅은 서윤에게 더없이 든든하고 완벽한 아빠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미래는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얼음 조각을 품은 듯 시려왔다. 자신이 밤새 진희의 꿈을 꾸는 동안, 성웅은 묵묵히 서윤의 곁을 지키며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미래는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우리 서윤이 고생 많았어. 아빠가 정말 큰 힘이 되어줬네."그녀의 말끝에 실린 묘한 감정을 서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 햇살
"어머, 언니! 오늘 너무 멋져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에요?"수연이 반갑게 말을 걸며 다가왔고, 성웅 역시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원장님."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들. 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던 진수의 세상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성웅의 품에 다정히 안긴 미래가 있었다. 완벽한 메이크업, 우아한 드레스, 그리고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의 미소.몇 시간 전, 스크린룸의 흔들리는 조명 아래서 보았던 그 얼굴과 지금 이 얼굴이 머릿속에서 정확히 포개졌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웅의 품에 안긴 미래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수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진수에게는 그저 먼 곳에서 들리는 소음 같았다. 성웅의 다정한 손길이 미래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 모든 장면이 진수에게는 마치 잔인한 슬로 모션처럼 다가왔다.진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직 동생의 그 뜨거운 숨소리와, 지금 눈앞의 우아한 미래가 겹쳐지며 숨이 막혀 왔다.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위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닫힌 철문 사이로, 겉으로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서늘한 그림자가 그들의 발치에서부터 조용히 차오르고 있었다.미래와 성웅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적막함 속에 스며든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서 울고 있는 서윤이었다. 때마침 거실에 있던 정례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다녀오셨어요... 사모님, 서윤이가..."정례가 말끝을 흐리며 서윤의 방 쪽을 가리켰다. 성웅과 미래는 서둘러 서윤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서윤이 보였다."서윤아, 무슨 일이야?"성웅의 물음에 서윤이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내일이 한국사 시험이라 직전 보충 수업을 다녀왔는데, 마지막 모의 테스트에서 무려 세 문제나 틀렸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집으로 돌아온 미래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성웅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마음이 급했다. 조금 전 들려온 성웅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오늘 저녁에 부부 동반 모임 있어. 시그니엘에서 식사할 거니까 시간 맞춰서 준비해.'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미래의 내면은 순식간에 현실의 톱니바퀴로 전환되었다. 화장을 지우고 다시 공들여 색을 입히는 손길, 헝클어진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기는 동작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서렸다.그녀는 옷장에서 파란색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 성웅이 미국 출장길에 선물한 것이었다. 민소매 라인을 따라 가슴부터 힙 라인까지 우아하게 잡힌 셔링은 입는 순간 그녀를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게 만들었다.거울 앞에 선 미래는 같은 계열의 쨍한 블루 버킨백을 집어 들었다.'미래야, 넌 파란색 같아. 화려하면서도 도도해 보이거든.'성웅이 무심결에 던졌던 칭찬이 기억났다. 거울 속 여자는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성웅의 아내였다.구두는 은색 지미추로 마무리했다.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준비 다 됐니? 회사 차 보냈으니까 주차장으로 내려와.""네,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미래는 낮에 사둔 화장품 세트를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완벽한 장막 아래, 그녀는 여전히 진희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몸은 진희의 품 안에서 가장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체온과 목소리, 그가 남긴 짙은 여운이 아직 피부 깊숙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차가 매끄럽게 도로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미래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풍경 속에, 오늘 하루 그 찬란했던 시간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다는 듯이.시그니엘로 향하는 길 위에서, 미래는 그렇게 두 세계
"어, 지호 어머니."미래가 먼저 수진을 발견하고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어...머, 진원 어머니?"수진은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립스틱을 주워 들며 깜짝 놀란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애써 숨기며, 그녀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화장품 사러 나오셨나 봐요.""아, 네. 진원 아빠 심부름이어서요." 미래가 손에 든 쇼핑백을 살짝 들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답했다.'진원 아빠 심부름…… 그럼 진원 아빠 심부름을 유진희 원장 차로 왔나?'수진의 머릿속에서 톱니바퀴가 요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잠깐만. 아까 그거 아침 11시쯤이었잖아. 지금이 벌써 4시인데. 그럼 그 사이에 대체 어딜 갔다 온 거야? 설마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게 말이 돼?'수진은 속으로 온갖 추리를 펼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평온한 미소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마치 드라마 속 형사가 용의자 앞에서 태연한 척하듯이.'침착해, 최수진. 지금 티 내면 안 돼.'"저도 일 다 봤는데, 이제 집에 가세요?" 수진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네, 이제 가려고요." 미래가 웃으며 답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차장 쪽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진원 어머님은 발렛 맡기셨을 것 같은데요." 수진이 슬쩍 떠보듯 말했다."아, 아니에요. 저는 오늘 차를 안 가져와서요. 택시 타고 가려고요."차를 안 가져왔다는 그 한마디에, 수진의 머릿속 톱니바퀴가 또 한 번 덜컥 맞물렸다."그럼 제 차로 가요." 수진이 불쑥 말을 던졌다. "저 지하 주차장 쪽으로 가는 길이라.""어머, 그래도 돼요?" 미래가 반색하며 물었다."그럼요, 타세요." 수진이 웃으며 앞장섰다.'아니 근데 나 지금 왜 자원해서 태워준다고 한 거지?' 수진은 걸으면서 속으로 자신을 타박했다. '그냥 조용히 헤어졌어야 하는데. 이러다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뭐 캐묻는 거 아니야? 진원 어머니, 혹시 오늘 유진희 원장님이랑…… 이러면 안 되잖아. 정신 차려, 최수진.
격정의 파도가 휩쓸고 간 스크린룸은 묘한 정적과 함께 영화가 끝난 뒤의 엔딩 크레딧만이 흐르고 있었다. 미래는 진희의 품 안에서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고 있었다. 진희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입술 위로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를 끈질기게 퍼부었다.진희가 살며시 입술을 떼며 웃었다."어? 영화가 끝났어요."미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생긋 웃었다. 진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우리 아가씨, 리차드 기어 얼굴은 봤어요?"섹스에 너무 몰두하느라 영화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게 새삼 부끄러워진 미래는, 진희의 품 안으로 얼굴을 묻으며 더 깊숙이 폭 안겼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진희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진희는 그런 미래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녀의 귓가를 짓궂게 핥아 내렸다. 미래가 놀란 듯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진희 씨… 저기, 귀… 위험해요….""그렇구나. 우리 미래, 왜 이렇게 예민해?"진희는 멈추지 않고 더 짓궂게 귓가를 공략했다. 미래는 참을 수 없는 흥분과 간지러움에 "아… 아…!" 하는 신음을 나직하게 흘렸다. 진희는 그제야 만족한 듯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그래, 그래. 알겠어요, 안 할게요. 우리 이러다 오늘 정말 쓰러지겠어요."진희는 미래에게 가운을 다시 정성껏 입혀주고, 자신은 배스 타월을 두른 채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1층으로 올라온 순간, 진희는 걸음을 멈췄다. 집 안의 공기가 아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분명 열어두었던 안방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문을 바라보았지만, 바람 때문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미래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그 작은 의구심을 금세 지워버렸다.두 사람은 나란히 욕실로 들어가 서로의 몸을 씻겨주었다. 씻고 나와 옷까지 갈아입은 미래가 거실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하자, 진희가 자연스럽게 드라이기를 건네받아 그녀의 머릿결을 정성껏 말려주었다.머리를 다 말린 진희가 그녀의 어깨를 돌려 세워 눈을 맞췄다."미래 씨."
진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얼른 닫고, 숨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굳게 닫힌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비밀과 마주한 채, 지하의 공기는 발작적인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굳어버렸다.진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며, 애써 얼굴의 핏기를 지우고 계단을 올라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등 뒤, 저 닫힌 스크린룸 문틈 너머로 터져 나오던 적나라한 소리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굳게 닫힌 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고, 지하 공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쥐 죽은 듯 평화로웠다.진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계단 아래를 돌아보았다. 완벽하게 차단된 방음벽 너머로 그들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확인한 그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거실로 향했다.거실에서 그를 기다리던 수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자기야,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뭐 놀라는 거라도 봤어?"진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당혹감을 억누르며,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를 쥐어짰다."냉장고에 넣은 거, 다시 다 챙겨.""응? 왜? 방금 다 정리했는데?""쌀이랑 김치랑, 와인까지. 전부 다시 담아.""아니, 근데 삼촌 영화 봐? 영화 소리가 왜 이렇게 커? 자기 진짜 왜 그래? 어디 아파?"수연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진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그만 묻고! 얼른 챙겨서 나가자고!! 지금 당장!"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고함에 수연은 몸을 움찔하며 얼어붙었다."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왜 화를 내고 그래…."진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방금 들어간 김치통과 고기 팩을 거칠게 꺼내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식탁 위의 와인 병들도 한 병도 남김없이 챙겼다. 이 집에 자신들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단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됐다.진수는 장바구니를 든 채 수연을 현관 쪽으로 서둘러 떠밀었다. 나가는 길, 스치듯 지나친 1층 안방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욕실 문이 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