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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세 번째, 귀 뒤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0 16:59:46
“원장님, 다음 환자분 베드로 안내해 드렸어요.”

간호사의 차분한 음성이 진료실 안을 울렸다. 진희는 차트 모니터에 떠 있는 세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안미래]

그 이름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진료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희박해지는 기분이었다.

진희는 자기도 모르게 가운 주머니 속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찌릿할 만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의사였다. 환자를 마주하기 전에 긴장해 본 적도, 사적인 감정으로 평정을 잃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저 커튼 너머에 누워 있는 지금, 가슴이 이질적인 온도로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쿵. 쿵. 쿵.

고요한 진료실 안에 오직 제 심장 소리만 커다란 시계추처럼 울렸다. 호흡을 가다듬으려 할수록, 반항하듯 더 가파르게 뛰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유진희.

스스로를 다잡으며 흐르는 찬물에 손을 씻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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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8. 드라이브 뜨루

    라커룸.미래는 샤워기 아래 서서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이게 뭐지.어젯밤 그 문자를 받고,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보고 싶어요. 그 네 글자에 심장이 얼마나 요란하게 뛰었는지, 아침 내내 정신을 못 차렸으면서.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과 수영을 하고, 이제 아침까지 같이 먹으러 간다.설렜다. 동시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도 되는 건가 싶은 부담도 살짝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 정작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물속에서 마주 봤을 때도,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웃던 얼굴을 봤을 때도. 그냥 좋았다. 걱정도, 부담도, 어젯밤의 콩닥거림도 다 무색해질 만큼.나 왜 이렇게 신기하지.미래는 젖은 머리를 넘기며 피식 웃었다. 이런 자신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같은 시각, 진희는 라커 앞에서 티셔츠를 걸치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아침 한 끼에, 내가 이렇게까지.시합에서 반 박자 늦게 도착하려고 스스로 속도를 늦춘 것도, 물속에서 그녀의 뒷모습만 좇다가 몇 번이나 숨을 놓친 것도.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그런데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미래 앞에서는,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이렇게까지 선명해졌다.미래는 유부녀였다. 그것도 이 단지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박성웅의 아내. 진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이건 안 되는 감정이라고,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그런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 어젯밤엔 손이 먼저 움직여 문자를 보냈고, 오늘은 이렇게 아침까지 함께하자고 청하고 말았다.넘으면 안 되는 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물러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늘 계산되고 정돈된 채로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 하나만큼은 계산이 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는 흔들리지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7. 폼 하나로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미래는 눈을 뜨자마자 협탁 위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화면에는 아무 알림도 없었다. 어젯밤 일이 정말 있었던 건지, 다시 의심스러워질 만큼.“엄마, 나 체육복 못 찾겠어!”서윤의 목소리에 미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몇 시인지도 모른 채 아이 방으로 향했다. 서랍을 뒤지고, 가방을 챙기고, 식탁에 앉은 성웅 앞에 국을 놓고. 몸은 익숙한 동선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미래야, 나 오늘 저녁에 골프 약속 있어서 좀 늦어.”“아…… 네.”성웅이 무슨 말을 했는지, 미래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성웅은 별다른 내색 없이 커피를 마저 마시고 일어났다.현관에서 아이들을 배웅하고, 성웅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미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거실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정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왔다.“사모님, 우리 아침 먹을까요? 계란찜 해놨는데.”“이모, 저 수영 좀 다녀올게요. 갔다 와서 알아서 먹을게요.”정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침부터요? 뭐라도 좀 드시고 가시지.”“괜찮아요. 다녀와서요.”미래는 정례가 뭐라 더 하기 전에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수영복을 가방에 쑤셔 넣는 손이 평소보다 서툴렀다.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네 글자를, 물속에 처박고 나면 좀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팔다리를 움직이고 숨이 차오르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싶었다.평일 오전의 단지 수영장은 한산했다. 파란 물빛이 천장 조명을 받아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미래는 가장자리 레인에 몸을 담갔다. 물의 냉기가 발끝부터 온몸을 감쌌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첫 스트로크를 뻗었다.물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숨소리와 귓가를 스치는 물살 소리뿐. 미래는 몇 바퀴를 돌았는지도 세지 않고 계속 헤엄쳤다. 팔이 저려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에야, 생각이라는 게 겨우 잠시 멈췄다.그러다 문득, 반대편 레인에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6. 남편의 품 안에서

    정오가 가까운 시각.파크 하얏트의 통창 너머로 서울 도심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테이블 위에는 갓 도착한 룸서비스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한우 채끝 스테이크와 새우와 관자가 듬뿍 들어간 먹물 링귀네였다.“야, 여기 뷰 진짜 미쳤다. 너 유진희랑 이런 데서 데이트하면 딱이겠는데? 그냥 여기서 하루 자고 가라 그래.”제시카의 장난에 미래가 피식 웃었다.제시카가 스테이크 맛에 감탄하는 사이, 미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수아야, 실은…… 나 요즘 좀 이상해. 유진희 원장님이랑 있으면 자꾸 휘둘리는 것 같아.”미래는 필러를 맞을 때 무릎 사이를 파고들던 그의 무릎,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자며 따라 나오던 일까지 털어놓았다. 말하는 내내 목소리가 작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제시카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미래를 빤히 보더니 시원하게 웃었다.“미래야, 너 그거 좋아서 그러는 거잖아. 뭘 그렇게 고민해? 거절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겠지.”“어…… 그런가?”“야, 휘둘리면 좀 어때? 유진희가 너한테 눈치나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좋아? 그 정도 박력은 있어야 남사친이지. 얼마나 귀엽냐.”제시카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덧붙였다.“너 유진희랑 대놓고 불륜할 것도 아니잖아. 그냥 동네 친구처럼, 남사친처럼 지내. 선은 지키되, 그 짜릿함은 그냥 즐겨. 너도 여자잖아.”거침없는 말에, 미래는 어깨를 짓누르던 죄책감을 잠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자, 고민은 끝! 다 먹었으면 수영하러 가자. 나 다음 주면 가는데 제대로 놀아야지. 아, 맞다. 성웅 씨는 우리 부부 언제 초대한대?”“아…… 깜빡했네. 이따 성웅 씨랑 얘기해 보고 알려줄게.”미래는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성웅이라는 거대한 성벽 아래에서 잠시 숨을 쉬는 것. 어쩌면 그게, 미래가 찾은 유일한 숨구멍일지도 몰랐다.호텔 수영장의 푸른 물속에서 제시카와 한창 웃고 떠들 때였다. 수영장 가장자리에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성웅 씨]“여보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5. 침묵

    수연네 집에서의 시간은 더없이 유쾌했다.미래와 정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건 밤 10시가 조금 안 된 무렵이었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서재로 향하던 성웅과 거실에서 마주쳤다.성웅의 시선이 미래의 얼굴에 머물렀다.아이스크림을 들고 누군가를 올려다보던 그 웃음의 잔상이, 아직 미래의 입가에 옅게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성웅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사장님, 먼저 들어오셨네요.”정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유 모를 본능으로, 정례는 미래보다 먼저 입을 열고 있었다.“아래층 수연 원장님 댁에서 저희를 초대해 주셔서요. 저번에 유 원장님이랑 저랑 서로 신세 진 게 있어서, 겸사겸사 다녀왔어요.”성웅은 시선을 미래에게 둔 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랬군요. 좋은 시간이었겠어요.”그뿐이었다.더 묻지 않았다. 미래를 향한 어떤 질책도 없었다. 오히려 다정하기까지 한 얼굴로, 성웅은 화제를 돌렸다.“미래야, 딸기 라떼 있지?”“아이고, 사장님! 당연히 있죠. 사장님이랑 애들 좋아한다고 사모님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으셨는데요.”정례가 얼른 냉장고에서 라떼를 꺼내 쟁반에 담아 미래에게 건넸다. 미래는 얼떨결에 쟁반을 받아 들고 서재로 향했다.성웅은 미래가 건넨 딸기 라떼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서재 안을 채웠다.“이거, 참 맛있네.”빈 잔을 쟁반 위에 올려둔 성웅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미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싸 쥐었다.솜사탕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런데 미래는 어쩐지 숨이 멎을 것 같은 무게를 느꼈다.“미래야, 나 오늘 확인할 메일이 좀 많아. 먼저 자.”성웅은 그대로 미래를 서재 문 앞까지 배웅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미래의 등 뒤로, 그의 서늘하고도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성웅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미래의 어깨를 감싸 쥐었던 그 손끝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4.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어느새 식탁 위의 와인 두 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진수가 빈 병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벌써 다 마셨네요. 셀러에서 한 병 더 가져올게요.”그 순간, 미래가 불쑥 따라 일어났다.“아, 이번엔 제가 가져올게요.”이런 대화가 어딘가 불편했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간, 진희의 눈빛을 피할 곳이 없을 것 같았다.“사실 오늘 가져올까 말까 하다가 놓고 온 게 있거든요. 금방 다녀올게요.”“언니, 아니에요! 그냥 앉아 계세요!”수연이 말렸지만, 미래는 이미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자 거실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수연은 이내 정례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이모님, 저번에 주신 갈비찜 있잖아요. 저 그 비법 꼭 알고 싶어요.”“아이고, 비법이랄 게 뭐 있다고.”두 사람이 레시피 이야기에 빠져드는 사이, 진희는 와인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뇌리에 며칠 전 한강 벤치가 스쳤다. 종이 모자를 쓰고, 브라보콘을 베어 물며 아기 새처럼 오물거리던 얼굴.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눈을 반달처럼 휘며 웃던, 그 맑고 무방비한 표정.그 남자 곁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지금,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진희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짐 없는 몸짓에 여유가 묻어났다.“형수, 아이스크림 좀 사 올까요?”수연이 레시피를 받아 적으며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좋아요! 규리 딸기맛 좋아하니까 딸기는 큰 걸로 사다 줘요.”진희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조금 전 미래가 나간 바로 그 현관이었다.진수의 시선이 그 뒷모습을 따라갔다.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 뒤에 숨은 묘한 기류를, 그는 본능적으로 읽어냈다.조금 전의 의심이,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로 바뀌고 있었다.진수는 수연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잔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닫힌 현관문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65층 집에 들른 미래는 셀러에서 알마비바를 꺼내 들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

  • 대치동에 미래가 없다   83. 설마

    저녁 7시.미래와 정례가 46층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연 건 이 집의 주인 유진수였다.단정한 셔츠 차림의 그는 한눈에 봐도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의 남자였다.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직업인 사람답게, 눈빛이 조용하면서도 깊었다.“어서 오세요. 수연아, 서윤 어머니랑 이모님 오셨어.”진수는 과한 호들갑 대신 격식 있고 따뜻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그리고 미래 곁에 선 정례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이모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희가 이모님께 신세를 졌다고 해서, 꼭 직접 인사드리고 싶었어요.”정례가 쑥스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아니에요. 제가 신세를 졌죠. 원장님이 제 손을 얼마나 예쁘게 꿰매주셨는데요.”진수가 두 사람을 거실로 안내하며, 미래에게도 부드럽게 눈을 맞췄다.“서윤 어머니, 그날 진희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제가 대신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그 녀석이 열이 오르면 꼭 그렇게 픽 쓰러지거든요. 땀도 흠뻑 흘리고. 얼마나 놀라셨을지 짐작이 갑니다.”“네, 놀랐죠. 그래도 금방 회복하셔서 다행이에요.”진수가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와인을 따랐다. 이 자리를 위해 그가 고른 건 샤토 무통 로칠드였다.진희와 닮았지만, 훨씬 여유롭고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그 정중한 배려 속에서, 미래는 팽팽하게 긴장했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집안에 흐르는 절제된 기품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짐작이 갔다.식탁 위에는 수연이 직접 구운 갈비살이 달큰한 향을 피워 올렸고, 수산시장에서 갓 떠 온 모둠회가 싱싱하게 놓여 있었다.“미래 언니, 저번에 신라호텔에서도 정말 좋았는데, 오늘은 이모님까지 오셔서 꼭 가족 모임 같아요. 즐겁게 마셔요!”정례가 흐뭇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너무 과한 대접을 받네요. 정말 고마워요.”와인이 몇 번 오가며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현관 도어록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거실로 들어선 유진희는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여유가 묻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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