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내린 후 유정이 소희한테로 다가가 웃으며 제의했다."저쪽에 뷔페 코너도 있던데, 우리 바비큐 먹으러 가요!""그래요."소희가 듣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임구택도 그제야 소희의 손을 놓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가서 재밌게 놀아, 이따가 찾으러 갈게."소희는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임구택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유정과 함께 떠났다."잘 되고 있는 거 같은데?"내내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시원이 소희가 떠난 후에야 천천히 걸어와 입을 열었다.이에 임구택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후 덤덤하게 웃으며 되물었다."왜 우청아를 데려오지 않았어?"청아의 이름이 언급되자 장시원은 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져 임구택을 흘겨보았다."우리끼리 이렇게 서로 상처를 주기 있기 없기야?""네가 먼저 시작했잖아."장시원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난 우청아와 잘 될 생각이 없어. 케이스가 다르니까 비교하지 마라.""잘 될 생각이 없는 양반이 병원에는 왜 간 거야?"임구택이 듣더니 믿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어제 그가 장시원에게 연락했을 때 장시원은 마침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었고, 임구택은 순간 장시원이 청아 어머니의 병문안을 갔을 거라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그냥, 내키지 않아서. 사고를 치고는 도망쳤다가 2년 후에 다시 나타나 아무 일 없는 사람마냥 아주 잘 지내고 있잖아.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어?""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우청아한테 잘해.""우청아가 소희의 친구라, 소희가 너한테 화풀이라도 할까 봐?"임구택의 진심 어린 충고에 장시원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이에 임구택이 눈썹을 한 번 올리더니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내 말을 기억해 두는 게 너에게도 좋다는 것만 기억해 둬."장시원이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웃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때 조백림이 달려와 두 사람을 불렀다."구택이 형, 시
남자도 유정을 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별로 반갑지 않아 하는 어투로 물었다."너 왜 여기 있어?"유정이 듣더니 순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냉소했다."너희들도 올 수 있는데, 나라고는 왜 못 오겠어?""당연히 올 수 있지."남자가 뜻 모를 웃음을 드러내자 곁에 있던 여인이 즉시 그의 팔을 꼭 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성준 씨, 이분이 바로 유정 씨야?"성준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맞아."그러자 여인이 유정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뭐야, 자기 나를 속인 거였어? 자기 분명 유정 씨가 아주 못생기고 꾸밀 줄도 모르는 시골 여인이라고 했잖아! 분명 이렇게 예쁜데도?"성준이 듣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예뻐? 왜 나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거 같지? 표정도 무뚝뚝한 게 무미건조하기만 하고."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며 자신을 폄하하고 있는 모습에 유정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쓰레기 같은 인간들, 당장 꺼져!"유정이 욕설을 퍼부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성준이 잠깐 놀라더니 얼굴색이 바로 어두워졌다."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죽어서도 땅이나 낭비할 쓰레기 인간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안 그러면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거니까."예전에는 분명 고분고분 말대꾸 한 번한 적이 없던 유정이 갑자기 자신에게 험한 욕을 퍼붓는 모습에 성준은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 유정을 노려보며 말했다."역시 널 차버린 게 잘 된 선택이었네. 유정, 너 딱 기다려!"유정이 듣더니 냉소했다."분명 네가 더러워서 나한테 버림을 받은 거잖아.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당장 꺼져!"화가 제대로 치밀어 오른 성준은 옆에 있는 맥주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술병을 잡기도 전에 갑자기 손등에서 전해오는 통증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왜 그래?"옆에 있던 여인이 보더니 긴장해서 물었다.이때, 소희가 손에 든 꼬챙이로 숯불을 툭툭 건드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꺼져, 다음
소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 말해요."유정이 또 술을 한 모금 크게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때 저 진짜 자아까지 잃어가면서 그를 사랑했어요. 심지어 사고 능력까지 상실한 채 의미 없는 헌신에 혼자 감동하면서.""그렇게 1년 동안 사귀다 그는 우연히 대학 때 좋아했던 첫사랑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 여인은 상냥하고 자상하고 애교도 많고 무고한 척도 하면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척만 하는 저와는 완전히 달랐죠.""그렇게 그 여인 집 등불이 고장 나면 그는 한밤중이라도 달려가 고쳐주었고, 아프다고 전화하면 큰비도 무릅쓰고 약 사주러 가고, 그 여인이 직접 국을 끓였다고 바로 마시러 달려가고, 저와의 약속까지 잊어가면서요.""그가 저에 대해 점점 성의와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저도 진작 알아차렸어요. 하지만 저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아 매번 그에게 기회를 주고, 그의 변명을 들어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두 사람이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침실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 저한테 들켜서야 우리의 감정이 끝나게 되었어요.""분명 그가 바람을 피워 저를 배신한 건데 오히려 그가 목이 터져라 모든 잘못을 저에게로 돌리더군요. 제가 꾸밀 줄 모르고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고, 너무 고루하다면서.""그 순간 저 너무 충격적이었요. 저 사실 여자여자한 슈트나 하이힐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가 좋아하니까 산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저 혼전 동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을 땐 그렇게 제가 자중할 줄 아는 여자라고 좋아했으면서 순간 저를 고루하고 재미없는 여인이라고 하더군요.""그 당시 저는 그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일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죽기보다 못한 나날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바로 사귀게 되었지 뭐예요."유정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또 술을 크게 한 모금 삼켰다."저 정말 하늘 아래 가장 노답인 바보예요."소희가 조용히 다 듣고 나서야 눈살을 찌푸리고 물
소희의 살짝 달라진 표정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소희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살짝 기울여 소희의 시선을 가리고 진지하게 말했다."걱정 마. 시원이는 저 여인을 좋아하지 않아."우민율은 장시원을 2년 넘게 쫓아다녔다. 만약 장시원이 정말 우민율을 좋아했다면 진작 그녀와 만났겠지.소희가 눈을 아래로 드리운 채 담담하게 말했다."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재밌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는 거네."임구택이 듣더니 바로 맹세했다."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없다고? 인터넷에 아직도 당신과 이현의 사진이 있는데?"소희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다소 원망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그건 자기가 계속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잖아."임구택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빠진 순간 이상한 정서가 마음속에서 퍼지는 느낌이 들어 소희는 바로 고개를 돌려 담담하게 말했다."나 당신 때문에 돌아온 거 아니야.""알아, 자기는 날 보고 싶어 한 적이 없었잖아."임구택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소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한참 침묵을 지키고서야 낮은 소리로 물었다."이현이를 건드린 적이 있어?"임구택이 듣더니 웃음을 드러냈다."드디어 묻는 거야?"소희는 순간 난처하여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말해도 돼.""없어."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한 번도 없었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현과 같이 서 있었던 게 가장 가까운 거리였어."소희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이제 안심됐어?""우리 그때 헤어진 상태였으니 당신이 정말 여자친구를 사귄다고 해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우리 언제 헤어진 적이 있었어? 내 생일날 혼인신고서를 선물로 준 게 난 유부남이니 자중해야 한다고 경고한 거 아니었어?"소희가 듣더니 놀라서 임구택을 쳐다보았다."내가 준 상자 안에 쪽지 한
"너 대신 복수해 준다잖아, 어때?"조백림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유정이 눈알을 돌리며 조백림의 의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좋은 일은 아닐 거 같아 바로 거절했다."괜찮아요, 어차피 이젠 남남인데요 뭐.""그래, 이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고마워요.""고맙긴. 부부는 원래 한 몸이니 당신을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거랑 같은 거잖아."조백림의 진지한 농담에 유정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부부라니요?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니에요?""차라리 오늘 밤에 부부가 해야 할 일을 해버리는 게 어때?"조백림이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전혀 농담하는 거 같아 보이지 않았다.이에 유정이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는 대답했다."꿈 깨요!"농담 한마디에 얼굴이 빨개진 유정의 모습이 유난히 재미있었지만 조백림은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유정은 마음속의 초조함을 억누르고 싶어 스스로 술을 따르며 몇 잔이고 원샷했다.그렇게 밤은 점점 깊어지고 파티 현장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밤을 새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평소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소희는 밀려오는 잠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임구택이 소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우리 이만 돌아갈까?"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정이에게 돌아가 쉬겠냐고 물었다.취기가 올라 정신이 더욱 맑아진 유정이 고개를 저었다."저 좀 더 앉아있다가 돌아갈래요, 먼저 가 쉬세요.""알았어."대답하며 임구택을 따라 일어난 소희는 고개를 돌려 장시원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장시원과 우민율은 언제 사라졌는지 자리가 비어있었다.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뭘 하러 갔는지 알 수 있었다.소희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리고 눈빛 하나에 소희의 생각을 읽어낸 임구택이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해."소희는 청아가 불쌍할 뿐이었다."청아 씨는 시원이와 같이 있을 생각도 없잖아. 그러니 시원이더러 계속 솔로를 유지하라는 건 불공평한
소희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낀 임구택은 눈썹을 올린 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소희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나에게 시간을 좀 줘, 우리의 관계를 잘 생각해 보게."소희의 진지한 말투에 임구택이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뭐가 문젠데? 내가 같이 해결해 줄게."하지만 소희는 두 눈을 아래로 드리우고 임구택의 살짝 열린 셔츠 네크라인을 쳐다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이에 임구택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숙여 소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지금 나를 못 믿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높은 벽을 세웠다는 것도 알고.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줬어. 내가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에게로 접근할 거니까 당신도 천천히 나에게로 와줘. 우리 함께 그 장벽을 뛰어넘자, 응?"소희가 잠시 침묵하더니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밝은 달빛은 넓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두 사람의 몸에 은은한 빛을 씌워주었고, 달빛 아래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여태껏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꼭 붙어 있다.그러다 한참 후, 소희가 임구택을 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 졸려, 가서 잘래."임구택은 소희를 더 이상 잡아두지 않고 그녀를 세워 일으켰다.그런데 소희가 첫걸음을 내디디자마자 임구택이 다시 소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왜 갑자기 당신한테 속은 거 같지?""뭐?"소희가 의아하여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소희를 품에 안고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당신이 만약 계속 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한테는 가장 기본적인 이득조차도 없을 거고.""그럼 당신이 선택해, 나의 육체를 원해 아니면 내 마음을 원해?"임구택이 듣더니 이를 악물었다."역시 일부러 의도한 거였어."소희가
일찍 방으로 돌아온 장시원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마침 우민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시원 도련님, 제 방에 있는 샤워기가 고장 나서 그러는데, 한 번 와서 봐주면 안 될까요?"장시원이 듣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담담하게 말했다."정비공을 찾아. 정 안 되면 방을 바꾸든지.""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디 가서 정비공을 찾아요? 게다가 오늘 호텔도 꽉 찼는데 누구와 방을 바꿔요?"우민율의 애교 묻은 어투에 장시원은 여전히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어쩔 수 없지, 씻지 말고 그냥 자.""저 지금 땀을 엄청 흘려서 안 씻으면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아니면 저 시원 도련님 방에 가서 씻어도 될까요? 씻고 바로 나갈게요."장시원의 태도는 너무 미적지근하여 아무런 정서도 알아낼 수 없었다."그래, 건너와.""네! 저 지금 바로 갈게요, 기다려요!"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한쪽에 올려놓은 장시원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고 장시원이 가서 문을 열었다. 우민율은 여전히 전날 저녁의 붉은색 드레스 차림 그대로였다. 그녀는 팔에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장시원의 몸을 흘겨보며 물었다."도련님 휴식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죠?""방해했다고 하면, 갈 거야?"장시원이 농담이 묻은 어투로 묻었다.이에 우민율이 앞으로 다가가 장시원의 몸에 달라붙은 채 매혹적인 눈으로 장시원을 바라보았다."저 이미 왔는데 이대로 돌려보내 게요? 아쉽지 않아요?"장시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방문을 닫았다."씻어.""금방이면 돼요."우민율이 그에게 윙크 한 번 날리고는 욕실로 들어갔다.곧 물소리가 들려왔고, 반투명 형식으로 만들어진 유리에 비친 여인의 매혹적인 몸매는 남자에게 있어 치명적인 유혹이었다.장시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의 야경을 바라보았다.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의 밤은 강성의 밤과 완전히 달랐다. 소란스러운 경적소리도 없고 오색찬란한 네온사인도 없고, 온통 그윽한
"내가 화를 내기 전에 당장 꺼져."그런데 이때 장시원이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난 눈치 없는 여자들이 제일 싫어."우민율은 순간 상처를 받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단념할 수가 없어 다시 뒤돌아보며 물었다."저 줄곧 도련님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도련님은 바람기가 있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지난 2년 동안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었죠. 그게 저 때문이 아닌가요?""그럴 리가."여전히 덤덤하고 차가운 장시원의 목소리에 우민율은 몸을 한 번 세게 떨었다. 그녀가 나타난 후로 장시원은 더 이상 여자 친구를 만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당연히 자신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헛된 망상이었다니."휴식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우민율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힌 후 장시원은 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내가 2년 동안이나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고?’그는 2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괴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우민율 같은 미인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그 순간, 그는 자신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심리적인 문제인 건가, 아니면 신체적인 문제인 건가?’장시원은 초조하게 담배 연기를 뱉으며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와 이상한 말들로 잔잔한 그의 마음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우민율을 원망했다.……유정이 다 놀고 호텔로 돌아왔을 땐 이미 새벽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다 조백림과 같이 배치된 스위트룸에 도착하니 조백림이 마침 한 여인과 문밖에서 치근덕거리고 있었다.여인은 술에 취한 듯 온몸이 나른하여 뼈 없는 연체동물마냥 조백림에게 기대어 있었다."조 도련님, 저 심장이 엄청 빨리 뛰고 있어요, 한 번 만져봐요."이에 조백림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마침 유정이를 발견하게 되었다.유정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마냥 곧장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다 조백림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