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요요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문 쪽으로 뛰어갔다.하지만 문 손잡이의 위치는 꽤나 높았고, 아직 1미터도 안 되는 요요는 까치발을 들어가면서까지 힘들게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여러 번의 시도만에 겨우 문을 열었고, 사람들로 가득 찬 거실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 즉시 청아한테로 달려갔다.한참 하온에게 물을 따라주고 있던 청아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요요를 발견하고 즉시 웃으며 물었다.“너 어디 갔었어, 요요야?”요요가 자기 손보다 훨씬 더 큰 휴대폰을 청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엄마, 아저씨가 엄마를 찾으세요!”“아저씨? 어느 아저씨?”요요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고개 숙여 들여다본 청아는 수신 번호를 확인한 순간 멍해졌고, 그 바람에 찻주전자 속의 물이 흘러나와 하마터면 청아의 손을 데일 뻔했다.이에 하온이 즉시 다가와 찻주전자를 받아 한쪽에 내려놓고 긴장해하며 물었다.“왜 그래요? 화상 입은 거 아니에요?”“괜찮아요.”“괜찮기는! 어디 봐 봐요.”“아니요, 진짜 괜찮습니다.”“가만히 있어봐요, 그러다 흉이라도 지면 어떻게 하려고요?”[…….]휴대폰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애정’ 대화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똑똑히 듣고 있던 장시원은 더는 참지 못하고 노호하며 청아를 불렀다.[우청아!]분명 스피커폰을 켜지도 않았는데 장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휴대폰을 뚫고 나와 온 거실에 퍼졌고, 순간 웃으며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 물고 요요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에 난감하여 얼굴색까지 붉어진 청아는 바삐 휴대폰을 건네받고 주위 사람들을 향해 해석했다.“저희 대표님이세요, 급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저 잠시 전화 받고 올게요.”그러면서 휴대 폰을 들고 황급히 허홍연의 침실로 들어갔고, 허홍연이 급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청아가 아무래도 세계 명문대를 나왔으니 회사 대표님이 청아를 엄청 중시하나 봐요. 이번에도 틀림없이 중요한 일이 있어 청아를 저렇게 급히 찾고 있
청아도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전 대표님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고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건데, 대표님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맞는 말이긴 했다.그래서 장시원은 깊이 숨을 한번 들이마셔 평정심을 되찾은 후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당장 회사로 와.]“오늘 토요일인데요?”[주말 야근, 몰라?]“압니다. 귀하신 대표님께서 내려준 명인데, 곧 도착하겠습니다.”[요요도 함께 데려와.]“요요는 왜요?”[우청아, 내 말에 의문을 품지 말고, 토도 달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한 후 장시원은 청아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렇게 무정하게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청아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갑갑해졌다. 가뜩이나 허홍연이 강박적으로 그녀와 하온을 함께 엮은 일 때문에 화가 나 죽을 지경인데 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장시원에게 욕을 먹었으니.‘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다들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데?’‘왜 모든 일을 다 내가 책임져야 하냐고!’불과 반나절만에 쌓인 억울함은 밀물 마냥 거세게 밀려왔고, 청아는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여긴 우강남의 집이고, 밖에는 아직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청아는 결국 그 억울함을 짓누르며 평정심을 되찾은 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마냥 문을 열고 나갔다.그리고 청아를 보자마자 허홍연이 궁금해서 물었다.“대표님이 왜 널 찾으신대?”청아는 허홍연과 우강남에게 단지 국내에서 괜찮은 회사를 찾아 당분간 치카고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알렸을 뿐, 그 회사가 장씨 그룹이라는 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허홍연과 우강남은 당연히 금방 전화가 걸려온 게 장시원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고.“아, 그,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 지금 바로 회사로 오라시네요?”“뭐? 지금?”허홍연이 의아해하며 묻자 옆에 있던 우강남이 덩달아 입을 열었다.“이렇게 급하게 가는
“그럼 요요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가서 해석할 게요, 외할머니가 요요를 보고 싶어해서 엄마가 지각한 거라고.”어른 마냥 눈썹을 찌푸리고 청아를 위해 생각해 주고 있는 요요의 모습에 청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요요를 품에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요요는 어쩜 이렇게 철이 들었을까?”“요요는 엄마가 매일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다시는 가지 마요.”청아는 순간 목이 메었다.‘요요가 다 알고 있었어.’……토요일이라 회사에 야근하러 온 사람은 엄청 적었다.청아는 요요를 데리고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 바로 39층으로 향했고, 39층에 도착한 후 청아는 요요를 자신의 자리로 데리고 가서 의자에 앉혔다.“엄마 지금 아저씨에게 업무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요요는 조용하게 여기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 절대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네, 알았어요. 엄마도 빨리 가 봐요, 아저씨가 또 화를 내기 전에.”“그래, 요요 제일 착하지.”청아가 요요의 이마에 뽀뽀를 한번 하고는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마침 장시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그걸 본 청아는 놀라서 얼굴색마저 변했다.장시원은 그러는 청아를 차갑게 한번 흘겨보았다. 하지만 요요가 보는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라 결국 참았고, 심지어 고개를 돌려 요요를 바라본 순간 얼굴에 바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요요야.”너무 순간적으로 변해버린 장시원의 표정에 청아는 속으로 엄지를 내밀었다.그리고 장시원의 부름에 요요가 두 팔을 벌렸다. 장시원이 자신을 안아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이에 장시원이 바로 요요의 앞으로 다가가 요요를 품에 안았다.“아저씨 보고 싶었어?”“네! 엄청 보고 싶었어요.”“아저씨도 요요가 너무 보고 싶었어.”장시원은 사랑이 가득 담긴 두 눈으로 요요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러자 요요가 순간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을 드러내며 장시원을 향해 물었다.“
장난감을 쌓고 있던 장시원의 손은 요요의 대답에 순간 멈추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장시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외할머니의 말이 틀렸어. 네 엄마는 그 아저씨와 함께 있게 되면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왜요?”요요가 듣더니 바로 똘망똘망한 두 눈으로 장시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이에 장시원이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둘이 맞지 않으니까.”너무 어른들 세계의 일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요요는 잠깐 망연한 표정을 지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우리 엄마랑 어울려요?”“아니. 네 엄마가 아저씨를 좋아하지 않거든.”말투는 여전히 덤덤했지만 그 말을 하고 있는 장시원의 눈빛에는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엄마한테 좀 잘해 줘봐요, 그럼 엄마가 분명 아저씨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쳇, 됐거든요? 아저씨는 요요만 있으면 돼.”“걱정 마요, 아저씨. 제가 엄마 앞에서 좋은 말을 많이 해 줄게요.”요요가 어른 마냥 장시원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고, 그러는 요요의 모습에 장시원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뭐라고 할 건데?”요요가 눈동자를 한번 돌리더니, 손에 든 우유 떡을 장시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엄마가 아저씨를 좋아하게 되면, 엄마도 아저씨가 사주는 우유 떡을 먹을 수 있다고요.”“하하하!”동글동글한 우유 떡을 고사리 같은 손에 집어 들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요요의 모습이 너무 깜찍하여 장시원은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똑똑똑-그런데 이때 밖에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문을 열고 들어선 청아는 단번에 카펫에 앉아 요요가 한 말 때문에 호탕하게 웃고 있는 장시원을 발견했다.그리고 그 순간, 청아는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 오랜만에 봐.’하지만 청아를 본 순간, 장시원은 다시 웃음을 거두었다.“엄마! 아저씨가 그러는데, 엄마가 아저씨를 좋아하게 되면 엄마에게도 우유 떡을 사준대요!”“…….”잠깐 멍해 있던 청아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장시원이 화를 내기도
찌개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청아는 얼른 옥수수를 작은 토막으로 잘라 냄비에 넣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장시원을 쳐다보니 그는 아직도 그 줄기상추를 씻고 있었다, 모든 줄기 틈새까지 빠짐없이 깨끗하게.이에 청아가 바삐 입을 열어 장시원을 제지했다.“됐습니다!”장시원은 그제야 줄기상추를 꺼내 좌우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청아에게 물었다.“껍질은 뭘로 벗기는데?”청아는 껍질 벗기는 칼로 한번 시범을 보였고, 장시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아가 배워준 대로 천천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분명 잘 벗기고 있는데 청아는 왠지 불안 불안하여 장시원의 손만 주시하고 있었다, 자칫 했다간 손을 다치기라도 할까 봐.다행히도 장시원이 잡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도련님 치고는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동작이 점점 능숙해졌다.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청아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수시로 고개를 돌려 장시원 쪽 상황을 살폈다.“껍질 벗기는 칼이 예뻐, 아니면 내 손이 예뻐?”청아의 걱정 어린 눈빛에 손등까지 따끔해진 장시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청아를 행해 물었다.“네?”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청아는 순간 멍해졌다. 그러다 안절부절하게 상사의 의도를 한참 분석하다 조심스레 대답했다.“당연히 대표님의 손이 더 예쁘죠?”“그걸 물은게 아니잖아. 왜 자꾸 돌아보냐고.”청아가 듣더니 묵묵히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관심해 줘도 이 태도야!’‘다시는 말 안 해!’얼굴에 억울함과 노여움이 너무 뚜렷하게 섞여 있어 장시원은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장시원도 청아한테 쌓인 게 많았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표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오늘 일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무슨 일을요?”‘껍질 벗기는 칼과 비교했던 일?’장시원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그 의사와 맞선을 본 일.”“저희 선 안 봤어요!”“너희들 오늘 맞선을 봤는지 안봤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
“한번 시도해봐도 될 것 같은데?”장시원의 대답에 요요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눈알만 팽글팽글 돌리고 있었다.한 어른과 어린아이가 나란히 의자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조화롭기만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청아의 마음속은 착잡하기만 했다.‘장시원이 만약 요요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엄청 기뻐하겠지?’‘하지만 그 사실을 장시원에게 알려주게 되면 난 요요를 잃게 될 거야.’‘그러니 난 반드시 이 비밀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영원히 꺼내서는 안 돼.’……얼마 지나지 않아 반찬은 다 차려졌고, 세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한 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한 느낌도 없어 보이는 장시원과 요요와는 달리 청아는 아무리 해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다행히도 장시원은 밥 먹으면서 요요만 돌보느라 청아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고, 점심시간은 그런대로 조용하게 끝났다.그러다 오후 3시쯤이 되어 팩스를 받은 청아는 장시원에게 가져다주려고 다시 대표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느새 몸에 장시원의 양복 외투를 걸친 채 장시원의 품에 기대어 잠든 요요를 발견하고 청아가 놀라 급히 요요를 불렀다.“요요야.”“쉿! 자게 놔둬, 깨우지 말고.”장시원은 청아가 요요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손가락을 입술 쪽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청아는 여전히 미안해하며 말했다.“오래 안고 있으면 팔이 많이 힘들 겁니다, 제가 그냥 요요를 바깥에 있는 소파에 눕힐 게요.”“괜찮아, 깨우지 마. 팩스는 여기에 내려놓고, 가서 일 봐.”“네.”장시원의 말투가 너무 단호하여 청아는 결국 아무 말을 못하고 팩스만 탁자 위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러다 문어귀에 도착했을 때쯤 청아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장시원은 어느새 등을 소파에 기댄 채 왼팔로는 요요를 안고 있었고, 오른손으로는 팩스를 들고 열심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가끔씩 고개를 숙
장시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청아를 쳐다보며 덤덤하게 물었다.“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두, 두렵긴요! 저는 단지 아이를 데리고 회사로 가는 게 규칙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그런 것뿐입니다.”‘거짓말.’장시원은 차갑고 예리한 눈빛으로 청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요요랑 작별인사를 했다.“안녕, 요요야. 아저씨 생각하고.”“네! 아저씨도 요요와 엄마 생각 많이 하고요!”청아는 계속 차안에 앉아있었다간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얼른 요요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장시원의 차가 시선속에서 사라진 후에야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장시원이 곁에 없으니까 청아는 확실히 긴장이 많이 풀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웃으며 요요를 향해 말했다.“요요야, 장 아저씨는 엄마의 상사야. 그러니까 아저씨 앞에서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돼. 아저씨를 너무 귀찮게 해서도 안 되고, 아저씨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하지만 아저씨는 요요의 친구인걸요?”“요요야,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함부로 말 해서는 안 돼.”“네…….”갑자기 기운 없이 청아의 어깨에 엎드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요요의 모습에 청아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저녁에 뭘 먹고 싶어? 엄마가 해줄게.”분명 맛있는 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두 눈이 반짝반짝거렸던 요요인데 오늘따라 흥미가 없어 보였다.“엄마, 요요는 아저씨가 보고 싶어요. 아저씨를 우리 집으로 불러와 같이 저녁 먹으면 안 돼요?”“아저씨는 바빠!”“네…….”그렇게 청아가 요요를 안고 집에 들어서는데 마침 허홍연의 전화가 걸려왔다.허홍연의 말투에는 기쁨이 배어 있었다.[청아야, 하 선생과는 어떻게 되었어?]“저 하 선생님과 똑똑히 말했어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거라고.”[청아야! 너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니? 하 선생의 조건이 얼마나 좋은데, 그것도 주동적으로 너를 쫓는 건데, 대체 왜 거절하는 거야? 너 그러다 앞으로 하
줄곧 소리 없이 옆에 앉아 청아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요요가 갑자기 청아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 청아의 목을 껴안고 다소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엄마, 외할머니도 엄마한테 화냈어요?”청아가 요요를 꼭 껴안고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엄마는 두렵지 않아.”“엄마, 우리 앞으로 다시는 외할머니 집에 가지 마요.”요요는 청아의 슬픔을 느꼈는지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더 진지했고, 그러는 요요의 말투에 순간 목이 메어 오른 청아는 눈물을 꾹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뭐야, 왜 그래?”그런데 이때 마침 장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선 소희는 단번에 소파에 앉아 부둥켜안고 있는 두 모녀를 발견하고 급히 물었다.“소희! 외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혔어요!”요요가 소희의 물음에 바로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이에 소희가 의아해하며 청아를 바라보았고, 청아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소희가 바로 청아의 곁으로 다가갔다.“너 오늘 그 집에 갔어?”“응.”청아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오늘에 일어난 일을 대충 말해 주었다.그리고 소희는 조용히 옆에 앉아 청아의 말에 귀를 귀울이다 청아의 말이 끝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넌? 그 하온이라는 의사를 좋아해?”“아니. 너도 내 상황을 잘 알고 있잖아, 난 남자친구를 찾아 결혼할 수 없어.”“네 아버지의 일을 떠나서 그 사람이 만약 요요를 받아들이겠다면? 그래도 고민해보지 않을 거야?”“응.”청아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녀는 요요의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꼭 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결혼하게 되면 난 또 그 사람과 아이를 낳아야 할 거잖아, 그럼 그때 가서 요요는 어떻게 해?”“그래, 이미 결정이 났으면 더는 고민하지 마. 아줌마가 비록 어른이시긴 하지만, 너도 그렇게 매사에 타협할 필요 없어, 넌 그들을 위해 충분히 많은 걸 했으니까.”“응! 나도 알아. 그래서 난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야!”“그럼 기분 풀고! 내가 방금 가재랑 요요가 제일 좋아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