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노정순은 소희를 잘 돌봐 주었지만, 소희는 오히려 그녀를 속였다.임지언이랑 임시호도 일어났고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소희보고 먼저 앉으라고 해, 애가 불편하겠어.”“자, 내 옆에 앉아.”정순은 소희를 데리고 소파로 갔다.소희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웃는 유민의 눈길을 마주쳤다. 이 순간 더욱 난처해졌다. 소희는 정순 옆에 앉았다. 정순은 신이 난 듯 소희에게 과일을 건네주며 물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하인에게 분부했다. “소희가 단것을 좋아하니까 아까 만든 치크 케이크를 가져와 봐요.”구택은 맞은편에 앉아 낮게 웃으며 말했다.“엄마, 이러지 마요. 안 그래도 긴장한 애가 더 긴장하겠어요.”소희는 구택을 가볍게 째려봤다.‘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우정숙은 웃으며 말했다.“처음도 아니고 다 아는 사인데, 뭘 그렇게 긴장하겠어?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모두 웃기 시작했다.시호는 소희랑 묻기 시작했다.“강 어르신이 편찮으시다고? 우리도 오늘 금방 알았어. 원래 내일에 병문안하러 운성에 가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마침 오늘에 돌아왔지. 뭐니.”소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미 다 나으셨어요. 관심해 주셔서 감사해요.”“아버님이라고 해야지.”구택은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정순은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천천히 적응하게 놔둬. 호칭이야 뭐 급하지 않으니까, 소희가 익숙해지면 그때 가서 고쳐도 늦지 않아.”시호가 물었다.“결혼식은 언제 올리려고?”옆에 있던 정순이가 말했다.“당연히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두 사람 이미 결혼했으니까 식도 가능한 빨리 올려야죠.”구택은 소희가 결혼식을 빨리 올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쑥스러워하거나 입을 열지 못할까 봐 먼저 얘기했다. 결혼식에 대한 소희의 마음을 고려하여 주는 모습이었다. “소희쪽 일이 아직 몇 달은 더 걸려야 해요. 우
모두 웃고 떠들면서 분위기는 계속해서 가볍고 즐거웠다.가끔 소희는 구택과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의 활짝 웃는 표정을 보면서 소희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정말 소희는 구택의 가족이 자신을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진실을 속인 자신을 용서해주고, 구택을 접근한 목적에 대해 묻지 않았다.소희는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구택 부모님의 배려와 따뜻한 마음은 소희를 감싸 안았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았던 중, 구택이 시간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소희가 오후 내내 차를 타느라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소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좀 쉬다가 다시 내려올게요.”노정순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 소희가 너무 반가워서 너희들이 금방 돌아온 것도 다 까먹었네. 소희를 데리고 위층에 가서 쉬어, 이따가 저녁 때에 부를게.”“네.”구택은 대답하고 일어서서 소희의 손을 잡았다. 구택의 가족 앞이라 소희는 다소 부끄러웠다. 그래서 구택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쉽게 이기긴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소희는 담담한 척하며 다른 사람들과 인사한 후, 구택의 뒤를 따랐다.계단을 오르자, 소희는 비로소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아직도 떨려?”구택의 표정은 아주 부드러웠다.“봐봐, 거짓말 아니라고 했잖아. 우리 가족 널 엄청 좋아하고 있어. 바로 식을 올려서 세상 사람이랑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거 꾹 참고 있잖아.”소희는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구택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기 부모님, 정말 좋은 분들이셔.”“앞으로 자기 부모님이 될 사람이기도 해.”소희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들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문을 열자마자, 구택은 소희를 문에 눌렀다. 뜨거운 키스가 소희의 얼굴과 입술에 쏟아졌고, 구택은 소희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소희야, 보고 싶었어.”소희는 이마를 찌푸렸다.“우리 요 며칠 계속 같이 있었잖아.”“같이 있었지만 그저 볼 수밖에 없었잖아.”구택은 소희의 귓가에 입술을 맞
소희는 웃으며 일어나 임유림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문이 열리자 유림의 이쁜 얼굴이 보였다. 유림이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소희를 보며 말했다.“삼촌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 방해한 거 아니야?”소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들어와.”구택은 이미 다 정리된 상태였다.“난 아버지를 찾아가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둘이 얘기해.”“그래.”구택은 나가기 전에 유림이랑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짧게 하고 끝내, 저녁 거의 다 됐어.”“알았어요 삼촌, 걱정하지 마요. 제가 소희를 뭐 어떻게 할까 봐 그래요?”유림이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단 말이에요.”구택은 소희를 한번 쳐다보고 안심해라는 눈빛을 보내고서야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유림이는 소희를 째려보고 또 웃기 시작했다.“나 정말 두 사람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소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속사정이 많아서 너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어.”“됐어!”유림이는 콧방귀를 뀌었다.“이 집에 널 데리고 온 사람은 난데 어떻게 내가 마지막에 알 수가 있어요?”오늘 유림은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정숙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미안해!”소희는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유림은 웃으며 대답했다.“왜 사과를 해? 놀라긴 놀랐지만 기쁜 것도 사실이야. 앞으로 우린 가족이라고!”유림은 소희를 잡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어떻게 우리 삼촌이랑 결혼한 거야?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삼촌이랑 결혼했지? 삼촌을 알고 있었어?”“몰랐지.”소희는 고개를 저었다.유림은 멍했다가 곧 크게 웃기 시작했고 소희쪽으로 넘어지기도 했다.“정말 대단해!”유림은 소희를 집으로 데려온 첫 날을 떠올렸다. 그 날, 소희와 구택은 작은 언쟁을 한 적도 있었다. 유림이는 소희에게 구택을 자신과 같이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권유했고, 소희는 마지못해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웃겼다.소
“예전이랑 같으면 되지. 우린 아직 친구잖아. 너희 삼촌이랑 결혼해도 변하는 건 없어.”소희는 진지하게 말했고 유림은 또 웃었다.두 사람이 한창 웃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유림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유민인게 분명해.”문이 열리자 과연 유민이었다.“여기에 있을 줄 알았어!”유림이가 물었다.“넌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유민이는 앉으면서 말했다.“암튼 누나보다는 빨라.”“너무 했네, 쟤도 알고 있었는데 난 안 알려주고.”유림이는 또 투정을 부렸다.“누나한테 알려줘서 뭐 하려고?”유민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누나는 옆에서 호들갑만 떨 줄 알잖아, 누나를 알려주면 다른 사람들이 아는 건 시간 문제고 삼촌의 계획도 다 틀어진단 말이야.”유림이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왜 나 때문에 계획이 틀어져? 난 반대할 리가 없고 진심으로 축복해 줄 거라고!”“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얘기해준 거로 만족해요!”유민이는 애늙은이처럼 말했다.유림이는 화가 나서 어이가 없었다.“삼촌이 그러면 난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을 거야.”“삼촌의 결혼식을 안 참가해도, 소 선생님의 결혼식에는 참가해야 하잖아?”소희는 옆에서 남매가 말다툼하는 것을 지켜봤다.유민이는 갑자기 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삼촌이랑 화해했어요?”싸움 구경을 하고 있던 소희의 표정은 갑자기 굳어졌다.“어?”“두 사람 싸웠어?”유림이는 곧바로 소희를 바라봤다.소희는 남매가 다 자기를 쳐다보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작은 트러블이야, 이미 해결됐어.”몇 분 후, 구택이 들어와서 저녁 먹자고 얘기했다.유림이는 히죽거리며 말했다.“삼촌, 소희랑 이렇게 만나게 된 거 다 제 덕분인 거 알죠,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유민이는 콧방귀를 뀌었다.“내 선생님인데 누나랑 뭔 관계야?”유림이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나 아니면 소희가 네 선생님이 되었을 것 같아? 제일 중요한 포인트를 까먹지 마.”“선생님을 찾은 것 빼고 뭐 한 거 없잖아? 매일 그림자도 안 보였
구택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언제 본가에 들어와서 산다고 했죠?”노정순은 놀라며 말했다.“두 사람 이미 결혼했는데 여기서 안 살려고? 예전에는 모른다 치고 이미 안 이상 소희를 서럽게 하면 안 되지.”“아니에요!”소희는 고개를 저었다.“지금 사는 곳이 촬영장이랑 가깝고 해서 더 편해요.”“멀어도 괜찮아, 어차피 집에 기사도 있으니까 촬영장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임시호가 말했다.소희는 구택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시선을 보냈다. “저랑 소희는 본가에 들어와서 살 생각이 없어요. 식을 올리고 소희가 원하면 청원에 가서 살려고요.”정순은 눈살을 찌푸렸다.“들어와서 안 산다고? 다 같이 살면 북적북적한게 좋잖아.”유림이도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왜 여기서 안 살아요? 소희가 들어오면 우리 매일 수다도 떨 수 있을 텐데.”우정숙이 물었다.“소희 씨는 지금 어디에서 살아요?”소희가 말했다.“친구랑 같이 살아요.”정순은 더 놀랐다.“본가에서 안 살아요?”유민이는 냉소하며 말했다.“본가에 왜 가겠어요, 소씨 집안은 아예 선생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요!”모두 다 멍해졌고 정순이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야? 원래 구택의 아버지랑 요 며칠에 한 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너희 두 사람이 파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른 채 2년 동안 자주 연락하지 않았어.”“아니에요!”소희가 입을 열었다.“저희 두 사람의 일은 그 사람들한테 알릴 필요 없어요.”정순이랑 시호는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구택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소희는 소 씨이지만 강씨 집안의 사람이에요. 소씨 집안이랑 상관없어요.”정순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소희가 후에 소씨 집안으로 돌아간 일을 알고 있었으며, 더불어 소씨 집안에 양녀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며 소씨 집안에서 양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을 눈치챘다.정순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우여곡절에 찾은 친딸을
“두 사람 아마 한 달 정도 사귄 것 같은데. 여자 쪽은 엔터업계에서 일하는 것 같고 가게 와서 밥 먹다가 이문이랑 고향이 같은 거 알고 연락하고 지냈나 봐. 그러다가 사귄 것 같아.”유림이는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알자마자 결혼할 때 자기가 비용을 다 책임진다고 얘기했어.”“서인이 진짜 의리남이지.”유림이의 눈이 반짝이었다.“맞아, 정말 의리가 넘쳤어. 그래서 부하들도 엄청 충성을 하는 것 같더라.”소희는 이문을 위해 이뻐했다.“주말에 한번 보러 갈게.”“그래, 모두들 너를 그리워하던 눈치였는데!”두 사람이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을 때 노정순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박달나무 상자를 들고 소희에게 건네주었다.“꺼내서 껴봐, 사이즈 맞는가 한 번 봐봐.”“이게 뭐예요?”소희는 아름다운 꽃무늬와 새 무늬가 섬세하게 조각된 박달나무 상자를 받았다. 그녀는 호기심에 가득 차 박스를 열자, 그 속엔 아름다운 비취 팔찌가 담겨 있었다.비취 팔찌는 파릇파릇한 빛을 띠며, 불빛 아래에서는 환상적으로 영롱한 빛을 발산했다.강 어르신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기에, 소희는 어느 정도 물건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알았다. 이 팔찌는 그냥 봐도 가격이 어마어마했고 노정순이 오랫동안 소장해온 팔찌임은 분명하게 느껴졌다.소희는 얼른 정순에게 팔찌를 돌려줬다.“너무 귀중한 것 같아요. 이렇게 값 비싼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아니야!”정순은 소희의 손을 잡고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이 팔찌는 원래부터 한 쌍이었어. 정숙이에게 하나를 주고 나머지 하나는 구택의 배우자로 될 작은 며느리에게 줄 생각으로 남겨뒀어.”그 푸른 빛을 뿜어내는 팔찌는 소희의 가느다란 손목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그 손목을 감싸는 팔찌는 그녀의 피부를 더욱 우아하게 표현해주었고, 피부는 눈처럼 맑고 투명하게 보였다.정순이의 얘기를 듣자 소희는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정말 감사해요!”유림이는 소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방으로 돌아온 구택은 몸을 숙여 소희의 얼굴에 뽀뽀했다.“먼저 샤워하러 갈까?”소희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나 여기서 자?”“그럼 어디서 자고 싶은데?”구택이 웃으며 물었다.“너희 집에 온 첫날인데 바로 너랑 같이 자면, 좀 그렇지 않아?”소희의 눈빛은 물처럼 맑았다.“자기야, 여기에 있는 사람들 우리 결혼한 거 다 알아!”구택은 웃으면서 소희의 손을 잡고 욕실로 갔다.“나 아직 당신 엄마랑 형수에게 인사하지 못했는데.”“했어.”“언제?”“네 잠옷을 가져다줄 때.”소희는 손목을 들어 구택에게 보여주었다.“당신 어머니가 준 팔찌.”“형수도 있던데.”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며느리한테 줄 팔찌도 받고 아직도 우리 어머니야?”소희는 시선을 깔고 말했다.“난 엄마라는 호칭이가 너무 낯설어, 적응할 시간을 좀 줘.”구택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가슴이 아파 났다. 그는 소희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괜찮아, 호칭 정도쯤이야 바꾸고 싶을 때 바꿔. 평생 안 바꿔도 내가 엄마를 설득할게.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소희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호칭 바꿀 거야.”‘이렇게 날 잘 챙겨주는데 나도 제멋대로 할 순 없잖아?’한 시간 후.구택은 소희를 안고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통창 쪽으로 걸어갔다.유리창은 하루 종일 햇볕을 받아 따뜻한 느낌을 주었지만, 소희는 몸 전체가 찌릿찌릿하고 떨렸다.“여기는 싫어.”어정이든 경원이든 높이가 높아서 밖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여기는 3층이었고 별장 마당에는 하인이 수시로 지나갔다.“안 보여.”구택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소희를 달래듯이 계속 키스를 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을 담은 것처럼 깊고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믿어져? 나는 여기서 너와 유민이가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첫 날부터 이런 순간을 상상해 왔었어.”소희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핑크빛이 도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럼 처음 봤을 때 그 진지하
소희는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나쁘지 않아!”구택도 웃는 듯했다. 곧이어 구택은 몸을 돌리더니 소희의 몸을 누르고 키스했다.소희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이대로 키스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우리 달리기하러 가자!”구택은 눈살을 찌푸렸다.“나 겨우 4시간 잤는데?”소희의 귓가가 빨개지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계속 자든가!”“자고 있었는데 누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깨어났지.”소희는 몸을 돌려 그를 피했다.“난 좀 뛰어야겠어, 네가 가지 않으면 유림이를 불러서 같이 뛸 거야.”구택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고 한참을 키스한 후에야 일어나 같이 조깅하러 갔다.그 별장 주변은 아름다운 가로수길이었고, 아침 공기는 특별히 시원했다. 가끔씩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은 마치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만드는 듯했다두 사람은 뛰다가 쉬다가 별장에 돌아왔을 떈 날이 이미 다 밝았다.노정순은 아침부터 소희의 사이즈에 맞춰 옷 세 벌을 보내달라고 했다. 소희는 샤워한 후 옷을 갈아입고 구택의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하룻밤을 거쳐 정순은 소희에게 더욱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가갔다. 우정숙이랑 임지언은 소희를 여동생처럼 대했고 유림이랑 유민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전부터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했다.너무 뜨거운 감정도 아니고 차가운 무관심도 아닌 태도는 소희에게 안락함을 선사했다.아침을 다 먹은 후 소희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정순은 구택이랑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본가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데 주말마다 소희를 데리고 와야 해. 소희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구택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잊으셨어요? 매주 유민이 수업하러 오잖아요. 한번이 아니라 매주 두 번씩은 갈 것 같아요.”정순은 이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나 정신 좀 봐.”“우리 먼저 가볼게요.”구택이 입을 열었고 소희도 뒤따라 구택의 가족들과 인사했다.별장을 떠난 후 소희는 팔찌를 벗어 구택에게 건네주었다.“출근할 때 액세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