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연은 자신이 암시를 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임씨 집안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소동을 어떻게 볼까?노정순은 겉보기에는 온화해 보였지만, 말 속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고, 친절함 속에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 그랬기에 진연은 노정순의 진짜 생각을 알기 어려웠다.약 반 시간 후, 임구택이 위층에서 내려오자 소동은 곧바로 돌아서 그를 바라봤다. 베이지색 캐주얼 정장을 입고, 잘생긴 이목구비와 차분하고 고귀한 기품을 갖추고 있는 구택이었다. 또한 구택의 걸음걸음은 마치 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자 소동은 넋이 나가 있었다.구택이 다가오기도 전에, 소동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은 긴장으로 인한 땀으로 축축했다,“구택아, 소씨 집안의 부인과 소동 아가씨가 왔어. 잠시 와봐.”노정순이 구택을 보며 말하자, 구택은 눈길을 돌려 거실에 있는 진연 모녀를 보았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는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진연은 바로 일어나며 말했다. “임구택 사장님!”소동도 일어나며 눈빛이 반짝이고, 표정은 더욱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임구택 사장님, 안녕하세요!”구택은 걸어와 소파에 앉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처럼 냉담하고 차가웠다. “무슨 일이세요?”진연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임구택 사장님이 소동의 축하 파티에 와주신 거에 감사해서요.”“소동이가 직접 찾아뵙고 사장님께서 자신을 좋게 봐주신 거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요.”“시간이 되신다면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좋게 봐줬다고요?” 구택의 얇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소동 씨가 뭘 하셔서 제가 좋게 봐줬다고 하신 건지?”싸늘한 구택의 말에 소동의 웃음은 굳어졌고 놀랐다는 듯 구택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진연의 마음도 무거워져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임구택 사장님이 소동의 축하 파티에 직접 오셨으니, 제가 생각하기에 사장님은 소동의 재능을 인정하신 것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축
소동의 얼굴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고,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했다. 소동은 지금 당장 임구택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고, 진연은 겨우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저는 임구택 사장님이 소희를 챙겨주시는 것처럼, 평소에 소동도 조금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어요.”“사장님께서 소동을 더 알게 신다면, 소동의 재능이 사장님을 놀라게 할 거예요.”“소희와 비교가 됩니까?” 구택은 마치 당치도 않는 말을 들은 것처럼, 더욱 조롱 섞인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차이가 굉장히 날 것 같은데요!”구택의 조롱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 소동은 억울한 감정과 자존심이 상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임구택 사장님이 먼저 소희를 더 좋아하시는 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제 성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겁니다!”소동은 말을 마치고 진연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사장님이 저를 이렇게 오해하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우리의 방문 목적은 이미 분명히 했고, 감사의 마음도 전했으니. 이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돌아가죠!”진연은 아쉽다는 듯 일어나며 말했다. “사모님, 임구택 사장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구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노정순도 하인에게 두 사람을 배웅하도록 했다.진연과 소동은 차를 타고 임씨 저택을 떠났다. 차안에서 소동은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고, 진연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구택의 성격이 조금 차가운 편이야, 그래서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지. 천천히 하자, 서두를 필요 없어!”소동은 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구택 씨가 저를 그렇게 깎아내리는 게 슬퍼요. 저 정말 소희와 비교도 안 되나요?”“말도 마, 넌 소희보다 백 배는 더 강해. 구택이 그렇게 말한 건, 그가 널 이해하지 못해서야.” 진연은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소희를 과소평가했네.”“가정교사 신분으로 임씨 집안에 들어가 임씨 집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소희의 속셈이 내 생각보다 훨씬
소동의 재능을 중요한 홍보 포인트로 삼은 공고는 ‘리틀King’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회사는 King의 인기에 편승해 소동의 인지도와 노출을 빠르게 높이려고 했지만, 이러한 전략은 King 팬들의 반감을 샀다.[단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뿐인데, 어떻게 ‘리틀King'이라고 할 수 있지?][소동의 디자인 스타일이 King과 좀 비슷하기는 하지만, King의 업적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이렇게 언론 플레이하는 건 정말 뻔뻔하다!]……스타쉽 매니지먼트는 King이 수년 동안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고 단단한 팬덤이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 하지만 곧바로 PR팀에게 댓글 조작을 시키기 시작했다.스타쉽 매니지먼트는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태도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소동을 더욱 알리려고 했다. 왜냐면, 악플도 인기의 반증이었기 때문이었고, 트래픽이 있으면 이익이 있는 거였다. 댓글 알바를 고용한 그들은 모든 커뮤니티에서 소동을 예쁘고 재능이 넘치는 캐릭터로 포장했다.[소동은 정말 예쁘고 재능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 팬 됐어, 팬 됐어!][우리 소동은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 재능도 있다니, 다른 이의 팬들이 질투해도 소용없어!][유명한 국제 디자이너가 못생겨서 얼굴을 안 보인다는데, 소동이 누구의 인기에 업혀 간다고?][그럼 당당하게 나와서 얼굴을 비교해 보자고! 누가 누구의 인기에 업혀 가는 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난 소동의 더 많은 작품을 기대하고 있어!]……양측의 팬들은 인터넷에서 격렬하게 다퉜고, 결과적으로 소동은 갑자기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자 자신들의 목적에 달성한 스타쉽 매니지먼트는 굉장히 기뻐했다. 역시 King의 인기를 이용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소희는 드라마 세트장에서도 사람들이 소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미나가 핸드폰을 들고 끊임없이 화면을 스크롤 하며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뻔뻔
진석은 한결같이 무심한 듯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시에 퇴근해? 스승님이 너를 보고 싶어 하셔. 내가 널 데리고 식사하러 가는 김에, 강솔도 함께 부르려고.”진석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는 소희였다.“좋아,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나는 지금 회사에 없어서, 도시로 돌아가려면 조금 늦을 거야. 네가 강솔을 데리러 가서 스승님 집에서 만나자.”“응!” 전화를 끊은 후, 소희는 강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솔도 마침 소희와 할 말이 있었기에, 기분 좋게 수락하며 주예형을 데리고 스승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강솔이 예형을 데리고 도경수를 만나러 가는 건, 거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과 같았기에,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 “어떤데, 약혼 준비하나?”강솔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거의 그런 셈이지, 이미 논의 중이야. 그런데 예형 씨 회사가 바빠서 아직 날짜를 정하지 못했어.”“미리 축하해!”“고마워, 자기야!”소희는 강솔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 약간 쓸쓸함을 느꼈다.강솔이 예형을 스승님에게 데려가는 걸 보면, 오늘 그들의 약혼 소식을 발표할 수도 있는데, 진석은 어떨까?소희도 사랑을 경험해 봤기에 사랑이 주는 희열과 아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솔의 약혼 소식에 진석도 이제는 마음을 접을수도 있게 되었다.
강솔이 커피를 테이블에 놓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강솔을 바라봤다.그러자 스카이블루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강솔, 왔구나!”그녀의 이름은 손민정으로, 주예형의 대학 후배였다. 예형이 귀국했을 때, 손민정은 다른 도시에서 사직하고 예형의 회사에 합류했으며, 현재는 영업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솔은 이전에 예형의 회사 모임에서 민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바쁜가 봐?”숏컷이 잘 어울리는 강솔이 상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께 고객의 요구사항을 말씀드리고 있었어요. 거의 다 얘기했으니, 먼저 나가볼게요. 두 분 이야기하세요!” 민정은 일어서며 강솔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강솔은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다가 소파에 앉아있는 예형을 껴안으며 물었다.“나 많이 보고 싶었어?”예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오지 말라고 했잖아, 별로 좋진 않은 것 같아.”단호한 예형에 강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왜 못 와? 우리 불륜이 아니라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잖아. 누가 뭐라고 갈 수 있어! 게다가 내가 일 끝날 무렵에 온 거잖아.”예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 찾아온 건 무슨 일 때문이야?”“오늘 진석 사장과 소희랑 같이 스승님 댁에 가기로 했어. 당신도 함께 가자고.”“내 부모님이 경성에 계시고 당신이 그쪽에 갈 시간이 없으니, 먼저 스승님 댁에 가보자고. 스승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면, 우리 부모님도 문제없을 거니까.”강솔은 기뻐하며 말했다.“오늘이야?” 하지만 예형은 약간 주저하며 대답했다. “곧 중요한 고객이 올 예정이라, 오늘은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어떤 고객인데, 이렇게 늦은 밤에 오는 거야? 진짜 밉다.”강솔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Y국에서 온 고객이고, 한 시간 후에 도착해서 내가 직접 마중 나가야 해.” 예형은 미안해하며 말했다. “이 고객은 우리 회사에 매우 중요하거든. 그래서 그런데
강솔이 떠난 후, 주예형은 손민정을 찾아갔고, 두 사람은 다시 협력 방안을 검토했다. 민정이 지적한 문제들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작은 문제들이었기에, 민정은 사과하듯 말했다. “제가 너무 예민했나 봐요. 이번 협력이 중요하다 보니, 작은 실수도 걱정됐어요.”하지만 예형은 오히려 칭찬하며 말했다. “꼼꼼한 태도는 좋은 거야.”예형의 말에 민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의 격려 고마워요! 오늘 스미스 씨가 오시는데,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함께 가서 많은 걸 배우고 싶어요.”적극적인 민정의 태도에 만족한 예형은 바로 동의했다.“물론이지!”“감사합니다, 사장님!” 민정은 눈을 반짝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준비할게요!”“그래!”……강솔은 차를 몰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형의 회사 건물 아래 카페에서 소희를 기다리고 있었다.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소희도 딱 맞춰 도착했고, 강솔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소희에게 말했다. “가자!”소희는 강솔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예형 씨는? 같이 안 가?” “오늘 저녁에 고객을 만나야 해서 못 가게 됐어. 다음에 가면 되지!”강솔은 웃으며 소희의 팔을 끼고 함께 밖으로 나갔고, 소희는 예형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적어도 오늘 밤은 진석이 너무 힘들지 않을 것이었다.도경수의 집에 도착하고, 강솔은 들어가자마자 경수에게 달려가 안겼다. “스승님, 보고 싶었어요!”하지만 경수는 강솔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가, 가, 저리 가!” 그리고는 소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소희야, 여기 앉아. 내가 너를 위해 사 온 맛있는 것들을 봐봐!”경수의 말에 소희가 걸어갔다.“스승님!”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달콤한 디저트와 케이크가 놓여 있자, 소희의 눈이 반짝였다.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한 강솔이 투덜거렸다. “이렇게 편애하시면 안 되죠. 어려서부터 항상 소희를 더 좋아하시고, 쳇 저 화났어요!”앙탈을 부리는 강솔에 경수는 냉소적으로 말
“됐어요!” 진석이 강솔을 나무랐다. “스승님하고 싸우지 마!”그 말을 끝으로, 진석은 도경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솔이 항상 생각 없이 말하잖아요. 스승님께서 그녀와 같은 수준에서 대응하실 필요 있나요?”경수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널 봐서 내가 참는다.”“진석 때문에 너하고는 신경 안 쓸게!”경수가 돌아서자. 입에 케이크를 한가득 넣어 볼이 빵빵한 소희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소희는 참 착하다니까, 먹는 것조차 복스럽게 먹네!”“…….”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희는 당황했다. 이내 강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진석아, 봤지? 스승님이 소희를 얼마나 편애하는지!”진석은 강솔을 훑어보며 말했다. “소희는 너보다 훨씬 말을 잘 듣잖아.”강솔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박했다. “소희는 그저 먹는 것을 좋아할 뿐인데, 그게 잘 듣는 거야?”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먹을 때 입이 바빠서, 적게 말하고 스승님을 화나게 하지 않으면, 당연히 착하게 보이지.”강솔은 깨달은 듯 말했다.“음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네!”오늘 모두 모여서 그런지 경수는 기뻤다. 경수는 하인들에게 저녁 식사를 정원으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꽃과 풀, 새와 곤충이 있는 정원에서 저녁을 먹으며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모두가 둘러앉아, 경수는 소희에게 물었다. “네 할아버지는 어떠시냐? 내가 네 할아버지랑 영상 통화할 때마다 항상 건강하다고 자랑하더라고.”“한 번에 삼백 그릇을 먹는다느니, 산꼭대기까지 한 번에 올라간다 느니 하며 허풍을 떨어. 그 정도가 하늘을 찌를 정도야.”소희가 대답했다. “어제 장의건 의사선생님이랑 통화했는데, 할아버지는 회복이 잘 되고 있어요. 큰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요.”“그래, 다행이네. 나한테 강성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 노인네는 고집이 세서 안 온다니까. 정말 고집스러운 사람이지!”“할아버지는 산속 공기에 익숙하다고 하시더라고요.”“나이 든 사람들은 환경을 바꾸기 싫어하지, 나도 그걸
강솔과 진석이 이야기하는 동안, 소희는 자기 식사에만 집중했다. 마치 King의 일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도경수가 갑자기 강솔에게 물었다. “너 남자친구 사귀었니?”강솔은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고, 진석을 향해 눈을 흘겼다. “혹시 네가 스승님께 말한 거야?”진석은 안경 너머로 차가운 눈빛을 숨기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니.”도경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전화해서,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널 좀 지켜봐 달라고 하더라.”“뭐가 볼 거 있어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남자 고르는 눈은 틀리지 않을 거예요.” 강솔이 작게 중얼거리자 도경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남자친구를 나에게 소개시켜 줄 생각은 없어?”“솔직히 오늘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중요한 고객이 왔다고 해서 못 왔어요.” 강솔이 웃으며 말했다. “못 믿겠으면 소희한테 물어보세요.”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강솔의 말이 사실이에요.“소희가 맞다 하니 믿을게.” 도경수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 남자 이름이 뭐고, 뭘 하는 사람이야?”“이름은 주예형이고, 스스로 창업해서 회사 사장이에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엄청 대단하죠!” 강솔은 예형을 언급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자 진석은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처럼 가정 배경이 좋아서 창업한 사람은 차별받는 건가?”“아니 내가 우리 예형 씨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자꾸 자기 얘기를 끼워요?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냐?” 강솔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소희는 진석을 바라보며 그가 받은 ‘공격'에 동정심이 들었다.이에 도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니까 조심해야 해.”“아니에요!” 강솔이 서둘러 자신의 남자친구를 감싸고 돌았다.“예형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자수성가이긴 하지만, 하나도 인색하지 않고, 창업 과정을 즐기고 있어요.”발끈해하는 강솔이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