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희는 일부러 놀라는 척했다."비즈니스상 통혼이라고 할 수 있죠. 오래전부터 정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바로 두 달 전에 끝냈고요." 구택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냉정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소희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럼 우리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끝난 거예요? 왜 끝냈죠? 그 아내를 좋아하지 않아서요?"구택은 소희와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기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심지어 나와 결혼한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소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슬픈 이야기 같네요."구택은 예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왜 슬퍼요? 소 씨네 집안이 혼인을 하려고 한 이유가 원래 우리 임 씨네 집안을 빌어 그들을 도와 사업상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나와 그 소 씨네 아가씨는 다른 의미의 도구에 불과해요. 우리 사이에는 감정이 없었고 그녀도 우리가 조만간 끝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소희는 생각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구택 씨 말이 맞네요. 당신은 그 아가씨와 인연이 없어요."구택은 얇은 입술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게다가, 나도 결혼할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왜요? 구택 씨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아요?"소희가 물었다. 그녀는 보통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거나 가족한테 상처를 받은 사람이야말로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구택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소희는 이해할 수 없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지난번에 임가에 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비록 엄숙하고 잘 웃지 않았지만 노부인을 매우 존중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부인은 온화하고 우아하며 부드러워 전혀 남편에게 냉대를 받는 부인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구택은 부모님 사이의 일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차 한 모금만 마셨다. 그리고
소희는 몸을 돌려 화원에서 나와 달 모양의 문을 지나 뒤뜰로 돌아왔다. 이미 깊은 밤이라 온 정원은 조용해졌고 복도 아래의 초롱만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소희는 뒤에 닫힌 나무 문을 돌아보며 객실로 돌아가지 않고 앞마당으로 향했다.어르신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소희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차 활력이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소희는 문을 밀고 들어가 활짝 웃었다."할아버지 아직 안 주무셨어요?"어르신은 벤치에 기대어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축음기를 끄며 그녀를 한 번 보더니 성이 나서 말했다."차를 많이 마셔서 안 졸려!"소희는 한숨을 내쉬었다."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고 싶지도 않으신가 봐요. 그럼 나 자러 갈게요."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손을 문에 걸치기도 전에 어르신이 외쳤다."돌아와!"소희는 웃으며 돌아서서 얌전하게 물었다."지난번에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했을 때 기침을 심하게 하던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이제 와서 나를 관심한다 이거야. 네가 임가네 그 녀석을 위해 그 옥고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더라면 집이 코앞이면서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을 거 아니야!"어르신은 중얼거렸다.소희는 그의 팔짱을 끼고 앉아 물 한 잔 따라주었다."할아버지도 지금 나와 구택 씨의 관계 알고 있잖아요. 나는 돌아오기가 좀 불편해서 그래요. 게다가 나도 아르바이트 끝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어르신은 콧방귀를 뀌었다."너 임가네 그 녀석과 무슨 관계야? 넌 그를 위해 이렇게 진심을 다 하는데 그는 너한테 명분도 하나 안 주잖아. 혼약은 이미 끝났는데 너 기어코 이렇게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뭐야? 너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야?"소희는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맑은 눈빛으로 말했다."그와 함께 있으면 매우 즐거워서요. 전에 할아버지도 자주 나한테 말했죠? 사람은 즐거우면 된다고요!""즐거움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오래된 탁상시계가 울렸을 때 소희는 시간을 한 번 보더니 일어섰다."할아버지 얼른 주무세요. 난 우담화 보러 갈게요."어르신은 흥얼거리며 웃었다."꽃을 보러 가는 거야 아니면 사람을 보러 가는 거야?"소희는 당당했다."사람을 보는 것도 당연하죠. 그는 나더러 자게 하려고 스스로 남아서 꽃을 본 거예요."어르신은 물었다."그럼 넌 누구를 위해서야?""......"어르신은 손을 흔들었다."됐어, 가봐, 나도 자야겠어. 내일 아침에 너희들 밥 먹고 가. 옥고리는 내가 이미 오 씨더러 찾아내라고 했고.""네, 그럼 나 갈게요. 할아버지 잘 자요!" 소희는 부드럽게 웃었다."가봐!" 어르신이 말했다.그는 소희가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천천히 안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 임 씨네 그 녀석은 보기에는 괜찮았지만 그의 아버지처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소희는 어르신의 방 문을 나서자 밤중에 한 사람이 바깥의 받침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사람이 오 씨 집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품에 보온통을 안고 복도 기둥에 기대어 잠들었다."오 씨 할아버지!" 소희는 몸을 숙이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집사는 놀라 깨며 소희를 보고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이 늙으면 이렇게 쓸모가 없네요, 그냥 잠깐 기다일 것 뿐인데 뜻밖에도 잠이 들었지 뭐예요!""나 기다렸어요?" 소희가 물었다.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보온통을 소희에게 주었다."내가 주방 사람들 시켜서 아가씨한테 끓여준 단국이에요. 밤에 추우니까 좀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소희는 마음이 따뜻해지며 보온통을 받고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얼른 돌아가서 주무세요."집사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일 없을 때 자주 돌아와요. 어르신은 비록 전화에서 이거 싫다 저거 싫다 하시지만, 아가씨를 매우 그리워하며 줄곧 아가씨
구택은 우담화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도구로 화분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안 자고 뭐해요?"소희는 그릇에 단국을 부었다."자려고 했는데 주방에서 단국 끓이는 냄새 맡고 먹고 싶어서 깼어요."그녀는 단국을 구택에게 건네주었다."올방개, 배, 그리고 옥수수를 넣었는데, 입맛에 맞는지 한번 먹어봐요."구택은 그릇을 받아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음, 달콤하네요."그는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다."강 씨 집안사람들의 입맛은 소희 씨랑 잘 맞네요!"소희는 그릇을 들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아마도, 이것이 바로 운성 사람들의 입맛일걸요."......두 사람은 새벽이 돼서야 돌아가서 잠을 자려 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으며 놓으려 하지 않았다."내가 봤는데요, 침대는 충분히 커서 우리 두 사람 같이 잘 수 있어요."옆에서 잠든 앵무새는 놀라 깨어나며 문득 고개를 돌렸고 빨갛고 작은 눈은 적외선처럼 두 사람을 주시했다.소희는 앵무새를 힐끗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사람의 집에서 이러면 안 좋아요."구택은 가볍게 웃었다."뭘 하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단지 소희 씨가 낯선 곳에서 자면 두려워할까 봐 그래요."소희는 마음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말을 참 듣기 좋게 했다. 침대에 올라가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면 그는 임구택이 아니었다!"나 안 무서워요. 밖에 앵무새가 지키고 있잖아요."소희는 그들을 쳐다보는 앵무새를 가리키며 농담으로 말했다.앵무새가 소리쳤다."무서워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무서워하지 마, 다만 남자가 거짓말 할까 봐 무섭네 무서워!"구택은 검은 눈동자로 앵무새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웃었다."한 번만 더 말하면 너의 입을 막을 거야!""네가 감히!" 앵무새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그와 맞섰다."쉿!" 소희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다른 사람들 다 자고 있으니까 조용
"펑" 하는 소리가 났다.남자는 소리를 내며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린 채 몸을 돌리려 했지만 비틀거리며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청아도 놀라서 손에 든 방망이를 바닥에 던지고는 재빨리 후퇴했다.그녀는 인차 자기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그고 숨을 크게 쉬었다.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침대 앞으로 달려가 핸드폰으로 경찰에 신고하기 시작했다.전화를 할 때도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15분 후,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이불 속에 숨은 청아는 깜짝 놀랐다.경찰이 도착한 것을 감지한 청아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거실을 지나갈 때 그녀는 그녀에 의해 기절한 남자가 여전히 베란다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살금살금 문 앞으로 걸어가 문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 서 있는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녀는 신속하게 문을 열고 경찰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도둑은 나한테 맞아서 기절했어요. 바로 베란다에 있어요!"다섯 명의 경찰은 들어와서 불을 켜고는 베란다로 향했다.청아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경찰이 기절한 남자를 뒤집은 것을 보았다. 그중 경찰 한 명이 중얼거렸다."도둑 같지가 않은데!"남자는 비싼 양복을 입고 있었고 손목에 있는 시계는 딱 봐도 값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기질은 절대 보통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청아는 호기심에 앞으로 가서 한번 보았는데 남자의 모습을 보자 제자리에 멈칫했다."이 사람이 여기에 왜 있지?"경찰은 뒤돌아보며 그녀에게 물었다."아는 사람이에요?"청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아는 사이 일가?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꽤 심하게 다쳤으니, 우선 병원으로 옮겨. 그가 깨어나면 다시 심문하고!"경찰이 말했다.몇 명의 경찰은 남자를 부축하며 그가 가지고 있는 신분증을 보고 남자의 이름이 장시원이라는 것을 알았다!이 이름을 보고 몇 명의 경찰은 눈빛을 마주쳤다. 모두 의아하며 놀랐다. 설마 장 씨
청아는 한창 분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가 "흥" 하는 소리를 듣고 문득 고개를 들었고 마침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눈이 마주치자 청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꿈속의 이 소녀는 심지어 낯이 좀 익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청아는 의심했다. 남자는 왜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은 것일까? 설마 그녀의 방망이에 맞아 바보로 됐거나 눈이 멀었단 말인가?그녀는 당황해하며 일어나 손을 들어 남자의 눈앞에서 흔들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저기요, 나 보여요?"시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이 쉰 채로 입을 열었다."어지러우니까 손 좀 치워요!"청아는 즉시 손을 거두고 한숨을 돌렸다. 바보도 아니고 눈도 멀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시원은 머리를 움직이면 현기증이 나서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여기가 병원이에요?"청아가 대답했다. "네!"시원은 의혹이 가득했다."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그는 또 청아를 쳐다보았다."아가씨는 왜 또 여기에 있는 거고요?"청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기억 안 나요?"시원은 미간을 찌푸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요!"청아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기억을 잃은 것일까?그녀는 떠보며 물었다."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아요? 올해가 어느 해죠?"시원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그녀를 보았다."나는 단지 내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생각나지 않을 뿐이에요!""아, 그렇군요!" 청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굴리면서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사실대로 말하면 그녀는 그가 흥분해서 자기를 때릴 가봐 무척 두려웠다. 필경 그녀와 함께 있던 그 여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청아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어젯밤에 내가 아래층에서 운동을 하다가 당신이 거기에 쓰러져있는 것을 보고 구급차에 전화를 해서 병원에 데려다준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쓰러졌는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몰라요. 그러니까 당신
경찰은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이미 조사해 봤는데 그 집은 장시원 씨의 명의로 된 집이에요."그는 말을 마치고 의아해했다."아가씨는 거기에 살면서 집주인이 누군지 몰랐어요?"청아는 눈을 크게 뜨고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 집이 장시원 씨의 것이라고?)(소희는 분명 그녀의 둘째 삼촌 친구 집이라고 했는데? 설마 그녀의 둘째 삼촌의 친구가 바로 장시원 씨인가?)(아하!)시원도 다소 의외라 느끼며 경찰에게 물었다."이 아가씨가 내 집에 살고 있다고요?"경찰은 더 의혹해했다."설마 장시원 씨도 모르셨나요?"이거 참 재밌는 일이었다. 집세 내는 사람은 집주인이 누구인지 몰랐고, 집주인도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고 집주인이 들어오자 세입자는 집주인을 도둑으로 생각하며 때렸을 뿐만 아니라 신고까지 했다!이 일을 인터넷에 올리면 아마 이틀 동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시원은 이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전에 구택은 그에게 전화를 하며 그의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잠시 지내겠다고 했다. 그는 어정에 거의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리고, 저번에 그는 청아와 소희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들은 친구였기에 구택이 청아를 도와 집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어젯밤에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일행이 그를 가까운 어정으로 데려다주는 바람에 그도 이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을 잊었다.그리고 그녀는 그를 도둑으로 몰았던 것이다...사실이 밝혀지자 그들 사이의 오해도 풀렸다. 경찰은 시원과 청아 두 사람더러 나중의 병원비와 보상에 관한 일을 상의하게 한 후 사건을 종결하고 두 사람을 위로한 다음 철수했다.경찰이 떠나자 분위기는 무척 어색해졌다!청아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장시원 씨, 물 좀 마실래요?"시원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물을 마시면 내 머리가 나을 수 있나요?"청아는 죄책감을 느꼈다. 시원이 어떤 사람이든,
그날 점심에 시원은 퇴원하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병원의 침대에서 자면 등이 가렵고 또 병원의 소독수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아프고 토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그는 온몸에 편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의사 선생님은 뇌진탕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토하고 싶은 증상이 있는 것은 정상이라고 설명했다.시원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당신은 뇌진탕에 걸린 적이 있나요?"“......”의사 선생님은 침묵했다.의사 선생님은 시원의 금방 나온 검사 보고를 살펴보고 기타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또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퇴원을 허락했다.시원은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고 어정에 갔고 청아가 그를 돌보았다.어정의 집으로 돌아오자, 그들을 따라온 남자 호사는 그에게 샤워를 시키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시원은 침대에 누웠다. 아마도 한바탕 고생해서 힘들었는지 그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청아는 그가 편안하게 자는 것을 보고 병원에서 따라온 호사를 보낸 후 그녀도 씻고 외출했다.그녀는 먼저 디저트 가게에 가서 일주일 휴가를 낸 후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며 시원에게 보신탕을 끓이려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려고 했다.그녀는 마트에서 돌아온 후 시원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걸 보고 주방에 가서 먼저 보신탕을 끓였다.그녀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기에 보신탕 끓일 때 그녀는 주방 탁자 위에 엎드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뚝배기의 뚜껑이 끓는 물에 들썩하며 나는 소리에 그녀는 바로 잠에서 깨났다.보신탕은 거의 다 돼갔고 청아는 보신탕을 그릇에 담아 안방으로 가져갔다.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청아는 보신탕을 옆의 테이블에 놓고 고개를 돌리자 시원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시원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무서워해요. 안심해요.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청아는 얼굴이 약간 빨개지며 입을 열었다."깨어났어요? 내가 보신탕 끓였는데, 좀 마셔요. 몸에 좋아요.""불 좀 켜요!"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