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구택은 순간 씁쓸하지만 웃긴 상황에 되물었다.“그래도 계속할 거니?”“계속할 거예요!” 임유진은 고집스럽게 대답하자 구택은 잠시 침묵한 후 물었다.“소희를 원망하지는 않아?”어쨌든 서인이 유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중 일부는 소희를 고려해서일 것이지만 유진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아니에요. 저는 그 정도로 분별력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서인을 좋아하지만, 소희도 저에게 매우 중요한 친구예요. 게다가, 제 숙모잖아요!”“그래, 그 정도는 알아야지.”유진은 애원했다.“삼촌, 저는 이미 성인이에요. 대학원도 졸업했어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서인에 대한 제 감정은 호기심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절대 신선함 때문이 아니에요. 제 감정에 확신이 있어요.”“하지만 서인은 너를 좋아하지 않잖아!” 구택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유진은 서글프게 말했다.“삼촌, 그 말은 정말 상처가 되네요.”“진실은 항상 상처를 주지.”유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유진은 구택의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참기 힘들었고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사장님은 예전에는 항상 저를 피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약속했어요.”“사장님은 제가 가게에 오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했고, 저는 규칙을 지키며 예전처럼 친구로 지낼 거예요.”구택은 냉소하며 말했다.“네가 위층에서 서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냥 친구는 아니지.”하지만 유진은 동의하지 않으며 말했다.“소희도 여기 있으면 서인을 돌볼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더 많이 돌볼지도 몰라요.”이에 구택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더 이상 구택을 자극하지 않으려 서둘러 설명했다.“소희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대하죠. 하지만 삼촌에게는 다르잖아요.”구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무엇이 다르지?”“소희는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대하지만, 항상 거리를 두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소희는 먼저 삼촌을 안았잖아요.”“다른
유진은 대답했다.“알겠어요, 제가 도울게요!”“좋아!” 이문은 응답하고 주방으로 돌아갔고 임구택은 일어나 임유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서인은 많은 일을 겪었고, 마음이 성숙하고 심지어는 냉혹할 수도 있어. 그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야.”“그러니 네가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상처받고 울지 말고, 특히 너의 숙모를 원망하지 마.”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마지막 말이 핵심이네요!”이에 구택은 유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모두 중요해.”유진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삼촌, 당신의 말을 명심할게요. 사실 저는 이미 절망을 경험했어요.”“그래서 앞으로도 여전히 저를 좋아하지 않아도, 저는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후회는 없을 거예요.”그러자 구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행이야.”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우리 샤부샤부 먹으러 가요. 이문 오빠가 소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어요.”정말로 소희 이야기를 꺼내면 구택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가자.”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소희는 그들이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 유진의 얼굴이 가벼워진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소희는 구택이 서인과 유진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희는 구택이 유진을 혼낼까 봐 두려웠다.이문은 샤부샤부를 모두 위층으로 가져다 놓으며 미소 지었다.“다들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이에 소희가 말했다.“고마워요!”“우리끼리 고맙긴!” 이문은 웃으며 내려갔고 구택 앞에서 유진은 서인과 너무 가까이 있지 않고 소희 옆에 앉았다. 그러자 소희는 유진의 작은 속셈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물었다.“혼났어?”그러자 유진은 작게 대답했다.“다행히 너를 끌어들여서 막았어. 소희야, 이제 네가 내 방패야!”유진은 구택이 소희를 원망할까 봐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소희에게 기대고 있었고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마든지 막아줄게. 효과만 있으면 돼!
서인이 말을 이었다.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사건은, 소희가 백양의 바지 주머니에 초콜릿을 잔뜩 넣어둔 일이었어.”“훈련 중 날이 더워지면서 초콜릿이 녹았는데, 마침 백양이 소희와 대련을 하다가 소희가 백양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지.”“백양이 바닥에 앉는 순간, 녹은 초콜릿이 1미터나 뿜어져 나왔고,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어!”서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백양은 일주일 내내 놀림을 받았지!”“하하하하!” 임유진이 크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소희는요?”“소희는 팔굽혀펴기 100개와 함께 한 달 동안 백양의 바지를 빨아야 하는 벌을 받았어!”그러자 임구택이 갑자기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물었다. “진짜로 빨았나?”서인이 대답했다. “아니, 백양이 화가 나서 소희를 쫓아 훈련장을 세 바퀴 돌았지만, 결국 바지를 빨게 하진 않았어.”백양을 언급하자 소희는 마음이 아팠다. 소희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때는 훈련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어.”구택이 소희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서인이 말했다. “그래서 강시언 형님은 계속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만약 그 임무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서인과 소희도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에 시언이 말했다. “내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야.”소희가 물었다. “그럼 진심으로 선택한다면, 삼각주에 남을 거예요? 아니면 운성으로 돌아올 거예요?”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선택을 했겠지. 아마도 이 두 달 동안의 휴가에서도 그곳을 잊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곳은 형님 없이는 돌아가지 않으니까.”시언은 차가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은 없어!”서인이 말했다. “하지만 백협의 모든 사람은 형님을 주인으로만 생각해요!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기는 어렵죠!”하지만 소희가 반박했다. “어려운 건 아니지만, 할 수 있어
[소희야, 삼촌이 내가 사장님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어. 만약 삼촌이 너에게 의견을 물어본다면, 나를 좋게 말해줘.]소희는 웃음을 참으며 답장을 보냈다. [너를 혼냈어?]임유진은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혼났어!]소희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 [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사장님 곁에 있고 싶어. 그러니 부탁이야, 숙모.]소희는 유진이 자기를 숙모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임구택이 눈을 돌려 소희를 보며 물었다. “유진이야?”“응!” 소희는 휴대폰을 치우며 말했다. “사실 유진이 서인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미안, 계속 말하지 않아서.”말하지 않은 이유는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인을 좋아하는 것은 유진의 개인적인 비밀이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러자 구택이 이해한다는 듯 말하자 소희는 비꼬듯이 말했다. “이제 와서야 그렇게 말하네? 처음에 내 코앞에서 날 욕하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구택이 소희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욕했다고? 내가 무슨 배짱으로?”소희는 구택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구택은 소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구택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당시 구택은 유진 때문에 화가 났지만, 소희에게 화를 낸 이유 중 하나는 질투 때문이었다. 구택이 질투하고 불안해하면서 이성을 잃은 것이 결국 이별로 이어졌고, 소희가 다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랬기에 구택에게 영원히 가시로 남아있었다. 구택의 표정만 보아도 소희는 구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내 소희는 구택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다친 것과 우리가 헤어진 그 2년은 우리 사이의 후회가 아니야. 오히려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그 사건 이전에는 내 과거를 너에게 털어놓지 않았고, 너도 나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을 하지 않았잖아.”“
따뜻한 방 안에서 소희는 침대에 누워 임구택과 손을 맞잡고 있었고 눈에는 아련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햇살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약간의 나른함과 신비로움을 품고 있었다.소희는 구택과 키스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이때 구택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소희의 얼굴과 귓가에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 시절의 나날들은 즐거웠다며? 그렇다면 나와 함께한 나날들은?”소희의 눈빛은 조금 맑아졌고, 소희는 구택이 키스할 때 간지러워져서 살짝 몸을 피했다. “자기야, 좀 더 아량이 넓게 생각할 수 없나요?”“어, 안 돼!” 구택은 소희의 쇄골을 깨물며 말했다. “빨리 말해!”이에 소희는 천장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행복했어?” 구택이 내려다보며 묻자 소희는 구택의 얼굴을 감싸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준 행복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소희의 긍정에 구택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더 노력할게!”“노력할 필요 없어, 이미 아주 좋아!”“더 노력하면 더 좋아질 거야!”...그날 밤, 강아심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아심은 오후에 술자리에 참석했고, 이후에도 행사가 있었지만, 핑계를 대고 일찍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의 불을 켜고 벽에 기대어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니 갑자기 무기력해졌다.아심은 휴대폰을 꺼내 특정 인물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하자 대화창에는 며칠 전 강시언을 초대했던 대화만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친구가 아니어서 친구처럼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시언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아심은 안전감이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려고 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었고 아심은 이런 적당한 거리를 좋아했다.
강시언은 몸을 돌려 아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대가를 요구하려는 건가?”아심은 시언을 올려다보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준 것은 평생 갚을 수 없으니까요.”이에 시언은 미소를 지었다. “온두리에서, 누가 내게 다 갚았다고 말했지?”“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아심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나도 잊어버려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시언은 갑자기 아심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정신이 없는 건가, 아니면 잊은 건가?”그러자 아심은 부드러운 허리를 앞으로 밀고, 상반신을 뒤로 젖히며 귀가 약간 빨개져 말했다. “농담하는 거죠?”시언은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도 어떻게 도와줄지 말하지 않았어?”아심은 시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목욕하는 거 도와줄 수 있어요? 목욕을 마치면 천천히 가르쳐 줄게요.”아심의 제안에 시언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같이?”“물론이죠!”시언은 아심의 허리를 감싸고, 아심은 시언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올렸다. 부드러운 몸이 시언의 팔에 가볍게 안기자 시언은 한 팔로 아심을 안고 침실로 향했다. 아심은 시언의 어깨에 기대어 거실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둡고 조용했지만, 아심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다음 날,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강재석이 시언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강재석은 시언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할아버지!” 시언이 인사하자 강재석은 웃으며 말했다. “잘 왔다. 위로 올라가자.”시언이 저택으로 들어가려는데, 강재석이 부드럽게 물었다. “강아심이 누구냐?”갑작스러운 말에 시언은 걸음을 멈췄고 강재석이 걸어오며 웃었다. “참을 수가 없어서 물어보는 거다. 말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시언은 담담하게 말했다. “누가 할아버지에게 강아심에 대해 말했나요?”“양재아다.” 강재석의 대답에 시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걔의
오후에 별일이 없어서 강시언은 회사의 계약서를 검토했다. 시언은 강재석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강재석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다. 계약서를 몇 장 읽지 않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시언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시언 오빠!” 양재아가 몇 가지 과자를 들고 들어오며 웃었다. “주방장님한테서 배운 거예요. 할아버지와 강 할아버지께 드렸고, 이건 오빠를 위한 거예요.”하지만 재아를 바라보는 시언의 표정은 차가웠다. “양재아 씨!”재아는 시언의 냉정한 호칭에 놀라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에요?”시언은 손에 든 계약서를 내려놓고 재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손녀로 잘 지내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당신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을 거지만 꼼수 부리지 마세요.”재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 오빠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당신과 소희는 온두리에서 서로 도우며 지냈어요. 운명적으로 만난 사이죠.”“온두리에서도, 강성에서도 소희는 항상 당신을 도왔으니 소희를 실망하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그러자 재아는 눈빛이 흔들리며 작게 말했다. “누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나요? 어젯밤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강재석 할아버지 앞에서 실수로 말했을 뿐이에요.”“만약 오빠가 불편했다면, 사과할게요.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할아버지가 전에 나와 오빠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설명할 필요 없어요.” 시언은 재아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방금 한 말을 기억하고 생각하세요.”재아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시언은 과자를 담은 접시를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나는 단것을 먹지 않으니까 가져가세요.”재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접시를 들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 시언은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강재석의 필체로 여러 계약서를 검토하자 오후가 금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원래는 매우 바쁜 날이었다. 그러나 사장인 강아심은 정오가 되어서야 회사에 도착했다. 늘 시간 엄수와 근면함으로 유명한 사장이 갑자기 늦게 출근하자, 아심의 비서와 다른 부서의 부장들은 모두 놀랐다. 그래서 아심이 남자친구와 약속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며 수군거렸다.강아심은 그들의 농담과 추측을 그저 웃어넘기며, 사무실에 앉아 진지하게 일을 처리했는데 점심도 나가서 먹지 않았다. 비서 정아현은 아심이 열심히 일하는 줄 알고 점심을 가져다주며 칭찬했다.아심은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오늘 아침에는 정상적으로 출근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마치 고대 왕이 미인 때문에 조정을 소홀히 했듯이, 아심도 남자의 매력에 빠져 일을 반나절 땡땡이치게 되었다. 인생의 쏠쏠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좋았고, 그러면서도 게으르지 않은 그런 인생은 확실히 좋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더 탐욕스러워졌다.아심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유명한 시인 이섭이 자신의 시를 이렇게 해석하면 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심은 눈웃음을 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진지하게 일에 몰두했다.오후 내내 바쁘게 일한 후, 퇴근할 무렵 지승현이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를 약속했지만 아심은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오늘은 좀 피곤해. 다음에 만나자.”그러자 승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단둘이 먹는 저녁이 아니야. 친구 회사에서 신뢰할 만한 홍보 회사를 찾고 있어서 너를 추천했어. 오늘 시간이 맞아서 함께 만나 이야기하려고 해.”업무 관련이라 강아심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좋아. 어디서 만나?”“넘버 나인에서 만나자. 익숙한 곳이잖아.”“좋아. 곧 갈게.”아심은 전화를 끊고 짐을 챙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넘버 나인에 도착했을 때, 시언은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 차를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문을 열자, 안에서는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