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는 텐트 두 개를 가져왔고, 구은정도 자신의 텐트를 챙겨왔다. 총 세 개의 텐트였고, 밤에는 임유진과 연하가 함께 쓰고, 은정과 진구는 각자 따로 쓰기로 했다.은정은 텐트를 치면서도 계속해서 유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그 여자가 유진의 곁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말하는 게 보였다.그리고 유진이 밝게 웃고 있자, 은정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잠시 후 유진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모두에게 소개했다.“이쪽은 나영하라고 해요. 우리처럼 캠핑하러 왔다고 하니까 다들 인사 나눠요!”영하는 살짝 눈꼬리를 올리며 은정을 바라보았다.‘임유진, 넌 정말 순수한 바보구나!’영하는 손에 체리 한 상자를 들고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다들 과일 좀 드세요. 야외에서는 다 친구잖아요. 멀리서 만나게 된 인연인데, 부담 갖지 말고요!”그러나 연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마워, 하지만 우리도 과일 챙겨 왔어.”그러나 영하는 직접 한 움큼 집어 유진에게 건넸다.“난 과일을 정말 좋아해요. 우리 아빠가 CL국에 가서 직접 체리 농장을 계약했거든요. 그러니 마음껏 먹어요!”유진은 예의 바르게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연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진구와 눈을 맞췄다.‘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 여자, 대놓고 돈 자랑하면서 은정 씨의 관심을 끌려는 거 아냐?영하는 유진과 더욱 친근한 척하며 말했다.“점심은 바비큐 해 먹으려고. 신선한 해산물도 많이 가져왔는데, 같이 먹을래요?”이번에는 유진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은정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괜찮아요. 우린 점심 챙겨 왔어요.”영하는 예상보다 강한 거절에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래요. 밥 먹고 나서라도 같이 놀아요. 저쪽 산 경치가 정말 멋있거든요. 번지점프랑 래프팅도 할 수 있어요!”유진은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추천해 줘서 고마워요!”영하는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친구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멀어지
여진구는 순간 멍해졌다. 구은정은 임유진이 과거에 가장 신경 쓰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은정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죠!”그러나 은정은 맥주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과거라고요?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난 유진이 할아버지께 유진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는데?”그러고는 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네가 직접 말해 봐.”유진은 은정이 자기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압박하자 더욱 화가 났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요.”구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난 농담한 적 없어.”연하는 급히 분위기를 풀려고 나섰다.“유진이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건 맞아요. 나도 안 마실 테니까, 우리 그냥 과일 주스 마셔요!”그러면서 미리 준비한 잘라 놓은 수박과 함께 작은 착즙기를 꺼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이 신선한 수박 주스 봐! 대박이지?”유진은 여전히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연하의 말에 즉시 관심을 돌렸다.“착즙기까지 챙겨 왔다고?”“그럼! 캠핑을 위해 특별히 샀어. 얼마나 잘 되는지 한 번 보자고!”연하는 기계를 작동하며 신이 났고, 유진도 함께 따라 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아까의 작은 실랑이는 금세 잊혀졌다.진구는 고개를 돌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나 마음속에 쌓인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연하는 먼저 착즙한 수박 주스를 구은정에게 건넸다.“수박 주스랑 와인, 의외로 잘 어울린다니까!”“고마워요.”은정은 담담하게 받았다. 유진도 자연스럽게 진구에게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나도 맛봤는데 엄청나게 달아요!”은정은 곁눈질로 유진이 직접 건넨 주스를 보고,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진구는 그런 그를 의식한 듯, 잔뜩 신이 나서 은정을 향해 일부러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조금 전까지 쌓였던 불만이 사라지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은정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유치하기는.’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모두 산을 오르기로 했다. 은정은 휠체어
여진구는 장난스럽게 물었다.“가이드비 받을 거예요?”“당연하죠!”나영하는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톰한 붉은 입술을 곡선으로 말아 올렸다. 그러면서 진구에게 느긋하게 윙크했다.“저녁에 우리한테 밥 한 끼 사면 돼요!”그 순간, 진구는 깨달았다. 구은정이 왜 유진에게 영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는지를.다들 그렇게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산을 올랐다. 그 과정에서 영하의 친구가 오예나라는 이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한참을 걸은 후, 은정이 유진에게 물었다.“피곤해?”유진은 사실 괜찮았지만, 은정이 휠체어를 메고 가는 게 신경 쓰였다. 그래서 살짝 힘든 척하며 말했다.“조금요.”그러자 은정은 즉시 휠체어를 내려 펼쳤다.“앉아.”영하는 은정이 허리를 숙이며 휠체어를 준비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혀끝으로 살짝 입술을 적셨다. 이윽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웃었다.“유진 씨, 다리 다쳤어요?”이에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골절됐었는데, 지금 회복 중이에요.”“그럼 확실히 조심해야겠네요.”영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산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개울이 나타났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유속이 빨랐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간 위험할 정도였다.산을 오르려면 개울 위에 놓인 출렁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는 SNS에서 유명한 포토존이었다.특히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센 물살이 다리 아래를 휘몰아치며 흘러가고 있었다.진구는 다리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와서 말했다.“우린 건너는 데 문제 없겠지만, 유진이는 다리 상태 때문에 큰 보폭으로 이동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내가 안고 건너줄게.”진구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유진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은정도 몸을 숙이며 그녀를 안으려 했다.둘 다 유진의 앞에 도달했을 때,
나영하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돌려 구은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국가대표 챔피언이라고? 재밌네!’그때, 은정은 다리 건너편에서 임유진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 휠체어를 챙겼다. 연하는 운동을 자주 하는 덕에 이런 출렁다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밧줄을 단단히 잡고 흔들림 없이 건너갔고, 여진구도 바로 뒤따랐다.오히려 여기 여러 번 와봤다고 했던 영하와 오예나는 다리 중간에서 한참을 소란스럽게 굴었다.한 번은 비명을 지르며 못 가겠다고 하고, 한 번은 겁에 질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또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장난을 쳤다.이렇게 꾸물거리길 거의 10분. 두 사람은 아직도 다리 한가운데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기다리다 지친 은정은 연하에게 유진을 챙겨달라고 부탁한 뒤, 앞으로 가서 산길을 확인하러 갔다.영하는 자신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척을 했는데도 은정이 전혀 반응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자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다리 구간을 조용히 빠르게 걸어서 건넜다.다리에서 내려오자, 영하는 진구에게 장난스럽게 기대며 말했다.“와 나 진짜 죽을 뻔했는데! 왜 안 구해줬어요?”진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알거든요. 영하 씨가 기다린 사람은 나 아니라는걸. 괜히 분위기 망치고 싶진 않아서죠.”영하는 살짝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누가 됐든 도와줬다면 고맙게 생각했을 텐데요!”이에 진구도 웃으며 받아쳤다.“좋아, 다음번엔 꼭 구해줄게요!”연하와 유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름 끼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잠시 후, 은정이 지형도를 한 장 사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길을 확인해 봤는데, 올라가는 길에 가파른 구간이 있어요.”“유진은 등산하기 어려우니까,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요. 여기 백운 유리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요.”그러면서 지형도
은정은 유진과 함께 길을 따라 걷다가 관광차를 발견했다. 요금을 내고 나서, 운전사는 둘을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나서야 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삼촌, 혹시 여진구 선배 안 좋아하세요?”‘왜 선배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걸까?’은정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신경 쓰여?”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는 나랑 친한 사이예요. 삼촌이 선배를 싫어하면,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따로 다니면 어때요?”은정은 다시 물었다.“어떻게 따로 다닌다는 거지?”“나랑 진구 선배가 같이 다니고, 삼촌은 방연하랑 같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불편할 일 없잖아요.”유진은 조금 전 지형도를 살펴보면서 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굳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한 팀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좁은 케이블카 안에서 그의 차가운 기운이 한층 더 강하게 퍼졌다.그러나 유진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은정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케이블카는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은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푸르른 산세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유진을 바라보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 난 방연하를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나랑 방연하를 엮으려고 하면, 나도 곤란하고, 네 친구한테도 실례야.”유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정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의외였다.그제야 유진은 은정이 굳이 자신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겠다고 한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이에 유진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았네요. 그런데 정말 연하 안 좋아하세요?”“전 여자친구랑도 이미 헤어졌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다
한편, 여진구와 방연하는 나영하, 오예나와 함께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영하와 예나는 조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풍경을 찾고, 각도를 맞추고, 포즈를 바꾸며 한참씩 시간을 끌었다.처음부터 등산 속도가 느렸는데, 이대로 가다간 언제 정상에 도착할지 기약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올라가기는커녕, 오늘 안에 정상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진구는 짜증이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우리가 굳이 같이 가야 해?”이에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우리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쪽이 우리를 따라오는 거죠.”“그럼 그냥 가자. 기다릴 필요 없어. 원래 같이 다니던 사이도 아니잖아. 각자 노는 게 더 낫지.”연하는 영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진구와 함께 속도를 높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연하는 문득 물었다.“진구 선배, 원래 은정 씨랑 알고 지냈어요?”둘이 서로 말하는 걸 보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이에 진구는 얼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알긴 아는데, 친하지 않아.”연하는 한 걸음을 멈추고, 돌계단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은정 씨, 혹시 유진이 좋아해요?”은정이 유진이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했다. 특히 유진이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태도 차이.게다가 연령상으론 유진이의 삼촌뻘이긴 했지만, 사실 나이 차이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그 말을 들은 진구는 날카롭게 눈썹을 찌푸렸다.“아니야. 그 사람은 유진이를 조카처럼 생각하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진구는 더 이상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유진이는 이미 모든 걸 잊었다. 그렇다면 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면 됐다. 그러나 연하는 진구의 반응을 보고 오히려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진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대체 구은정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맨
연하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너무 심했어요. 진짜 미안해요!”진구는 대범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용서해 줄게!”연하는 조심스럽게 진구를 살피며 말했다.“한번 일어나 볼래요? 다친 데 없는지 확인해야죠.”진구는 엉덩이도 아프고 팔도 쑤셔, 연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일으켜 줘.”진구의 손은 길고 하얀 손가락에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까지,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연하는 진구의 손을 잡고 힘껏 당겼다.진구는 그 힘을 빌려 몸을 일으켜 세웠고, 손을 놓은 뒤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며 말했다.“괜찮네. 뼈는 안 부러졌어!”연하는 진구의 유쾌한 태도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구에 대한 호감이 더욱 커졌다.연하가 과하게 장난을 쳐서 이렇게까지 굴러떨어졌는데도, 그는 화내기는커녕 넘어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이런 남자, 진짜 멋있어.’연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선배는 내 절친이에요!”진구는 몸에 붙은 잔디를 툭툭 털며 말했다.“아니야, 난 그 정도로 목숨 걸고 친해지고 싶진 않아!”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웃었고, 진구는 다시 걸으면서 말했다.“진짜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유진이 앞에서 내 좋은 말 좀 많이 해 줘. 내가 유진이랑 잘 되면, 너한테 꼭 보답할게!”연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그건 내 전문이죠. 맡겨봐요!”“좋아, 콜!”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순간,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그렇게 잠시 시간을 허비한 사이, 나영하와 오예나도 따라잡았고, 네 사람은 다시 길을 올랐다.하지만 영하는 계속해서 진구에게 바짝 붙으려 했고, 진구는 그때마다 연하를 앞으로 끌어당겨 그녀를 가로막았다.연하는 조금 전의 일로 미안하기도 했고, 애초에 영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기꺼이 진구를 도왔다.그렇게 한 시간을 더 걸어가다가, 진구가 배낭을 연하에게 넘기며 말했다.“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진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영하는 연하에게 다가
나영하는 화가 난 오예나를 급히 붙잡으며, 여진구를 향해 웃었다.“진구 씨, 너무 흥분하지 마요. 다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작은 오해였어요!”연하는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는 진구의 팔을 잡아당겼다.“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그냥 가요!”진구는 영하와 예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한 번 더 훑어본 뒤, 연하를 따라 걸어갔다.조금 걸어가자, 진구가 문득 물었다.“왜 싸운 거야?”연하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나랑 유진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겨우 한 시간 전에 만난 사이인데,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그렇게 어설픈 수작은 오히려 짜증 나잖아요.”진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꽤 강단 있네.”연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런 사람한테 1초라도 친절하게 구는 건 내 자신에 대한 불친절이죠.”그러다 문득 진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런데 선배도 대단하네요. 왜 우리가 싸운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부터 감싸주잖아요?”진구는 가볍게 배낭을 매만지며 말했다.“당연하지. 난 무조건 내 사람 편을 들어. 난 원래 논리보다는 의리를 따지는 사람이거든.”그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진구가 그렇게 말하니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연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유진이를 맡기기에 선배라면 안심할 수 있겠네요!”이에 진구도 웃으며 답했다.“네가 유진이를 챙겨주는 것도 고맙지.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둘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방금 있었던 언쟁과 불쾌한 기분도 모두 날려버린 채, 산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임유진과 구은정은 먼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주요 관광 포인트라 사람이 많았다.유리 전망대와 번지점프장이 있었고, 맞은편 산에서는 암벽 등반 대회가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유진은 번지점프대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본 은정이 물었다.“번지점프 하고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