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숙은 백구연을 대문 앞까지 배웅하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일은 미안해요. 유민이가 고집도 세고 또 정에 끌리는 성격이라 제가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구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괜찮아요. 유민이가 이모와 정이 깊어 가정교사를 바꾸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앞으로 힘들 땐 공부 문제로 언제든 저를 찾으셔도 돼요.”“고마워요.” 우정숙이 진심 어린 눈빛으로 답했다.“별말씀을요, 사모님께서는 이만 들어가세요.”백구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자신의 차에 올라탄 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가방 속 휴대전화가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은 수민이었다.[이모, 오늘 시간 있어요? 저 공부 자료 사러 가고 싶은데 같이 가 주시면 안 돼요?]구연의 얼굴에는 평소의 온화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목소리조차 냉랭했다.“미안해. 오늘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행사에 가야 해서.”요즘 들어 거의 자매처럼 가까이 지내던 이모가 이렇게 선을 긋자 수민은 순간 놀랐다. 이윽고 조금 풀이 죽은 듯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엄마랑 갈게요.]“그래.” 짧게 대답한 뒤, 다른 전화가 들어오자 바로 수민의 전화를 끊고 새 전화를 받았다.[구연아, 임씨 집안 작은 도련님이랑은 잘 지내고 있냐?]백호균의 너그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에 구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낮게 고개를 숙였다.“할아버지, 유민이가 가정교사를 바꾸기 싫어해서요. 전 지금 임씨 저택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그렇구나.] 백호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죄송해요. 제가 부족했어요.”[네 잘못은 아니야.] 백호균이 호탕하게 웃었다.[아이란 본래 익숙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이지, 낯선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잘됐다. 집으로 와서 나랑 함께 있어라.]“곧 돌아갈게요.”이내 구연은 시동을 걸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임씨 저택 거실.구연과 우정숙이 나가자 유민은 곧장 소희를
유민은 구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곧장 소희 곁에 앉았다. 키가 크고 곧은 체격, 또렷한 이목구비와 붉은 기가 감도는 입술은 아직 소년 같았으나 목소리만큼은 단단하고 확고했다.“저는 숙모만 제 가정교사로 인정해요. 다른 사람은 안 돼요.”거실의 분위기가 순간 굳어졌고 우정숙이 나직하게 타이르듯 말했다.“유민아, 억지를 부리면 안 되지. 소희는 이제 곧 아이를 낳을 텐데 더는 힘들게 할 수 없어. 네 삼촌도 소희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하고.”그러자 유민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숙모는 그냥 아기 낳을 때까지 푹 쉬세요. 출산 후에 몸 회복하시면 그때 다시 제 공부를 봐주시면 돼요. 저는 급하지 않아요.”유민은 소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숙모가 제게 기초를 잘 닦아주셔서 반년이든, 1년이든 다른 애들은 저를 못 따라잡을 거예요.”맑고 곧은 눈빛에 소희는 저절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너는 지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해.”하지만 유민은 단호했다.“그건 안 돼요. 숙모가 아기 낳고 회복하시면 다시 꼭 제 공부를 봐주셔야 해요. 삼촌도 말씀하셨잖아요. 숙모는 제 고3 수능까지 책임져 주신다고.”옆에 있던 유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완전히 소희를 붙잡아 두겠다는 거네?”유민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며 반박했다.“숙모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게 누군데? 난 반대했는데 네가 억지로 찬성하게 만든 거잖아.”유진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그럼 내가 구해온 가정교사, 마음에 쏙 들지?”“당연하지. 별로였으면 내가 이렇게 숙모한테 매달리겠어?” 유민이 웃으며 받아쳤다.남매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거실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우정숙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미소 지었다.“결국은 소희가 또 고생을 좀 해야겠네. 방법이 없구나. 유민이가 이렇게 의지하는데.”소희는 따스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유민이는 원래 스스로 잘하는 아이예요. 제 손이 많이 필요하진 않아요.”분위기가 한껏 풀려 있
구연은 휴대폰을 접어 넣고 백호균의 서재로 들어가서 공손히 차를 따라 올리며 말했다.“할아버지, 내일부터 임씨 저택에서 유민이 가정교사를 맡게 되었어요.”백호균은 매서운 필체로 궁서체 글씨를 쓰고 있었다. 붓끝이 예리하면서도 단정해, 한눈에 남다른 내공이 느껴졌다.이윽고 백호균의 손이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구연을 바라보았다.“임씨 집안은 강성에서 명망이 높은 집안이야. 그들이 아무리 온화하게 대한다 해도 너는 더욱 조심하고 겸손해야 해. 순간의 방심으로 교만해져서는 안 돼.”이에 구연은 고개를 숙여 또렷이 대답했다.“명심할게요.”백호균은 다시 붓을 들고 먹을 찍으며 천천히 글을 이어갔다.“강성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임구택과 임씨 집안의 신뢰를 얻은 건 잘한 일이야.”구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보살핌 덕분이죠. 제가 이룬 건 전부 할아버지께서 길러주신 결과예요.”백호균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제 그만 쉬어라. 내일 임씨 댁에 갈 때 늦지 않도록 하고.”“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할아버지도 일찍 쉬세요.”손을 내저어 보이는 백호균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구연은 고개를 숙인 채 서재를 나섰다.다음 날 오전 열 시, 구연은 시간을 어기지 않고 임씨 저택에 도착했다.거실에는 우정숙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봄기운이 점차 무르익는 날씨, 우정숙은 은은한 하늘빛 정장을 입고 있었다.지적이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배어 있었고, 재벌가의 안주인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날카로움이나 세속적인 기운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몇 마디 나누던 중, 소희와 임유진이 위층에서 내려왔다.우정숙은 소희에게 미소를 지으며 유민이의 새 가정교사 문제를 설명했다.옆에 있던 유진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우정숙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게 말했다.“엄마, 유민이 가정교사 바꾼다면서 왜 미리 소희한테 얘기 안 했어요?”우정숙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오늘 구연
오수민은 결국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온 가족이 함께 식당으로 향하니, 식탁 위에는 수민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배가 고프다 보니, 부모에게 서운했던 감정은 어느새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이현주는 구연과 유민에게도 들어와라고 권했으나 유민은 환한 미소로 손을 저었다.“괜찮아요. 저도 이제 집에 가야 해요.”이현주는 두 사람을 향해 거듭 인사했다.“오늘 정말 고마워.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어.”구연은 유민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이건 유민이가 낸 아이디어예요. 부모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거였죠.”그제야 수민은 깨달은 듯 두 사람을 가리켰다.“알고 보니 일부러 그러신 거네요?”구연은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너희 엄마가 어떻게 널 내버려두겠니? 하루 종일 나랑 연락하면서 네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다만 매운 음식만 시켜서 널 굶긴 건 우리가 잘못했지. 다음엔 맛있는 거 사 줄게.”수민은 부모를 힐끔 보더니, 우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그래도 오늘 정말 많이 배웠어요. 고마워요, 이모. 고마워, 유민아.”구연은 담담히 말했다.“됐어. 이제 어서 밥 먹어. 우리도 이만 가 볼게.”수민의 부모는 두 사람을 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뒤따라 나오던 유민은 수민에게 조용히 말했다.“열심히 공부해. 언젠가 너도 집을 떠날 날이 올 텐데, 그때는 스스로 밥 먹고 살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잖아.”수민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부모의 보호와 넉넉한 환경이 없으면 밥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는 걸 오늘 처음 실감한 것이다. 배가 고플 땐 자유니 이상이니 하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든 권리와 선택은 결국 물질적 기반 위에서 성립한다는 걸 깨달았다.수민네 집을 나선 뒤, 구연이 유민에게 물었다.“어떻게 돌아갈래? 내가 태워 줄까?”유민은 손을 내저었다.“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러나 구연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오
세 사람이 식당에 도착하자, 수민은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구연이 주문을 끝낸 상태였다.수민은 목을 빼고 기다리며, 옆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만 봐도 군침이 돌았다.드디어 음식이 차례차례 상에 올랐을 때, 수민은 순간 얼어붙었다.불낙지, 매운 꼬막 비빔밥, 엽기떡볶이, 실비 김치 등 온통 매운 음식뿐이었다.구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우리 셋인데 여섯 가지면 충분하지?”유민이 젓가락을 들며 맞장구쳤다.“충분하죠.”수민은 금방이라도 울 듯 입술을 삐죽였다.“이모, 일부러 그러신 거죠?”자신이 매운 걸 못 먹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하나같이 매운 음식만 시켜 놓은 것이었다.그러나 구연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야채는 시켰어.”그러곤 향이 진한 표고버섯 청경채 볶음을 수민의 앞으로 밀어주었지만 버섯 냄새조차 못 견디는 터였다.“다른 거 하나만 시키면 안 돼요?”수민은 애원하듯 구연을 바라보자 구연은 잠시 이마를 찌푸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미안해, 수민아. 오늘 하루 종일 놀았더니 예산을 이미 넘어섰어.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꼭 사줄게.”유민은 수민의 구겨진 얼굴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구연은 눈짓으로 유민을 제지하자, 그는 얌전히 앉아 젓가락을 들더니 말했다.“야채 있잖아. 괜히 까탈 부리지 마. 다 네 엄마처럼 네 입맛 맞춰주진 않아.”그 말에 수민은 결국 멘붕이 왔고, 눈물이 와락 흘러내려 고개를 숙였다.비록 공부 문제로는 엄격하게 몰아붙이는 엄마였지만, 생활만큼은 세심하게 챙겨줬다.이렇게 밥상 앞에서 서러운 마음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유민은 수민이 우는 걸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떠서 건네며 말했다.“그렇게 맵진 않아. 한번 먹어 봐.”수민은 입에 넣자마자 혀끝이 타들어 가는 듯 화끈거렸고, 급히 기침을 해댔다.이에 구연은 휴지를 건네며 차분히 말했다.“맵게 못 먹겠으면 그냥 야채 먹어.”수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엄마한테서 아직도 전화 없어요?”
유민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이모 정말 대단하네요!”구연은 보호안경을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배워 보고 싶어? 내가 가르쳐 줄게.”그러나 유민은 고개를 저었다.“수민이가 기분 안 좋은데, 아줌마가 수민이 가르쳐 주세요.”“좋아, 내가 해 볼게!”수민은 금세 기운을 차리며 눈을 반짝였다.셋은 사격장에서 한 시간 넘게 머물렀다. 오후 네 시가 되자, 수민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모, 엄마한테 전화 안 왔어요?”구연은 휴대폰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아니? 전화도 없고 문자도 없어.”수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분노와 실망을 동시에 내비쳤다.“봐요, 성적이 잘 나오느냐만 신경 쓰지, 내가 어디 있는지, 안전한지엔 관심도 없다니까요.”그 말에 유민은 코웃음을 쳤다.“그게 오히려 네가 원하던 거 아냐? 이제 자유잖아.”수민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대꾸하지 못했다.사격장을 나온 뒤에도 시간이 남아 세 사람은 영화관으로 향했다.수민은 팝콘을 사고 싶어 했지만, 구연이 단호하게 말했다.“당분간은 안 돼. 당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아.”달콤한 팝콘 냄새가 극장 안을 가득 메우자, 수민은 돈이 없는 처지가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먹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사 먹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영화는 역사극이었다. 어느 왕조의 중전이 죽은 뒤 새로 들어온 후궁이 아들을 낳고, 원래의 적장자와 함께 자라며 형제처럼 지냈다.그러니, 나이가 들고 황제가 노쇠하자 후계 문제로 균열이 생기는 이야기였다.새로운 중전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조정을 휘두르고, 원래 중전의 아들을 모함하며 음모를 꾸몄다. 결국 적장자는 반격에 나서며 형제의 정은 끊어지고 피바람이 불었다.마지막에 적장자는 새로운 중전과 이복동생을 모두 죽이고 황위에 올랐지만, 나중에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죽인 폭군이라 불리며 손가락질을 받았다.동생 역을 맡은 배우는 수민이 좋아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였는데, 결국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 눈물을 글썽였다.이에 구연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