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숨을 쉬기 어려워질 때쯤 배정우는 손을 놓고 그녀의 턱을 잡았다.
“임슬기, 나 다인이한테 아이를 위해 복수할 거라고 약속했어. 그러니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뭔지 똑똑히 알려줄게.”
임슬기는 연신 기침을 했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우야, 다인이가 임신한 줄 정말 몰랐어. 그리고 죽일 생각도 없었고...”
배정우가 코웃음을 쳤다.
“흥, 지난 2년 동안 네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미친 짓을 한 게 한두 번이야? 다인이는 네가 질투 때문에 같이 죽으려고 했다던데?”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2년 동안 배정우는 이혼해주지 않고 계속 그녀에게 갖은 모욕만 안겨주었다.
입속에 갑자기 피비린내가 전해지면서 피를 토할 것 같았지만 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억지로 참았다.
“2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배정우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것처럼 표정이 어두워졌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만약 그때 다인이가 나한테 신장을 주지 않았더라면 난 이미 죽었어.”
“신장이라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배정우는 임슬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기 시작했다.
“어디서 모른 척이야?”
깜짝 놀란 임슬기가 울면서 말렸지만 몸이 너무 허약한 나머지 아예 말릴 수가 없었다. 옷이 찢어지면서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이러지 마. 정우야, 이러지 마.”
배정우가 코웃음을 쳤다. 다정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게 네가 원했던 거 아니야? 어디서 모른 척이야?”
임슬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 몸이 더 아픈지, 마음이 더 아픈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목숨처럼 아끼던 배정우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2년 동안 모든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단지 배정우가 그녀를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배정우가 정말로 연다인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어쨌거나 지금까지 그의 스캔들 기사는 많았지만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유독 연다인에게만은 마음을 주고 있었다.
잠시 후 배정우는 임슬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임슬기는 하도 울어서 눈이 다 아팠다.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폐를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6개월이면 충분해.”
그녀는 배정우의 태도를 보고 큰 결심을 내린 듯했다.
‘죽을 때가 되었는데 그 사람 옆에 남아서 뭐 해? 남아 있어봤자 미움만 받을 텐데.’
그녀는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배정우가 왜 변했는지, 아버지는 왜 자살했는지, 그리고 남동생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말이다.
고민 끝에 임슬기는 그 답을 알고 있을 만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지나가다가 온몸이 멍투성이인 걸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날 이토록 미워하면서 왜 만져?’
샤워를 마친 후 임슬기는 롱원피스를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연다인의 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배정우가 없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다인은 임슬기가 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전혀 놀라지 않고 경멸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여긴 왜 왔어? 정우 찾으러 왔어?”
“아니.”
“그럼 내가 왜 정우를 빼앗아갔냐고 따지러 온 거야?”
“그것도 아니야.”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연다인이 짜증을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왜 온 건데? 설마 내 비위 맞추러 왔어?”
임슬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2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연다인은 잠깐 움찔했다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한테 물어? 사람 잘못 고른 것 같은데.”
“우리 아빠 왜 자살했는지 알아?”
“몰라.”
“내 동생은?”
연다인은 얼굴이 창백한 임슬기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밀려와 옆에 있던 과일칼을 던져버렸다.
“임슬기, 그만 좀 물어. 네 집안일을 왜 나한테 묻는 건데? 약 잘못 먹었어?”
임슬기는 허리 굽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더니 실망한 기색으로 연다인에게 다가갔다.
“정말 몰라?”
“모른다고.”
연다인은 임슬기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왜 갑자기 2년 전의 일을 묻는 거지?’
지난 2년 동안 임슬기는 자신을 의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연다인이 모른다고 단정 짓자 임슬기는 더욱 실망했다. 그런데 그녀가 과일칼을 제자리에 놓으려던 그 순간 연다인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더니 칼로 자기 몸을 찔렀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슬기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칼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너...”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옆에 익숙한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뺨을 가차 없이 후려갈겼다.
“임슬기, 죽고 싶어?”
해명하려고 앞으로 다가가 배정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힘에 밀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배정우는 연다인을 안고 급하게 뛰쳐나갔다.
임슬기가 고개를 든 순간 연다인의 입가에 우쭐거리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다인은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 봤나? 아까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그녀는 따끔거리는 얼굴을 움켜쥐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피가 울컥 올라와 화장실로 뛰어가 토했다.
붉은 피가 하수구로 흘러가는 걸 보며 임슬기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입가를 닦았다.
‘폐암이 벌써 이렇게 심해졌다고? 6개월은 버틸 수 있겠지?’
화장실에서 나온 임슬기는 먼저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배정우의 비서 권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별장으로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임슬기는 잠시 멍해졌다.
“혼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권민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대표님의 명령이십니다. 절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 모습에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그럼.”
차에 탄 후 그녀가 무심하게 물었다.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권 비서님더러 감시하라고 하던가요?”
권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은 오늘 사모님이 바다에 들어가셔서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돼서 그러신 겁니다.”
이 말은 권민조차도 믿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난 2년 동안 배정우가 해온 행동들을 모두 지켜봤으니까.
다행히 임슬기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꼭 이혼해서 정우한테서 벗어날 거야.’
예전에는 모든 것을 시간에 맡기면 시간이 가장 좋은 답을 주고 배정우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허비할 여유도 없었다.
배정우가 이미 연다인을 선택했고 연다인을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굳이 그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억울하고 아직 그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에 기다릴 수가 없었다.
별장으로 돌아온 후에도 예상대로 권민은 가지 않고 계속 문 앞을 지켰다.
임슬기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따라다녔다.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 딱히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임슬기가 샤워하겠다고 한 후에야 겨우 권민을 따돌렸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이혼 합의서를 내려놓고 아쉬운 듯 주변을 둘러본 다음 이를 악물고 창문으로 기어나갔다.
방이 2층이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배수관을 따라 내려갔다. 2층이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운전할 수 없어 걸어야만 했다. 게다가 별장이 교외에 있어 시내에 다다르기도 전에 날이 어두워졌다. 너무 지친 그녀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너무 힘들어.”
약 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정신이 흐리멍덩하던 그때 차 한 대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거의 부딪힐 뻔한 순간 차가 급정거했다. 임슬기는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번호판을 확인하려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임슬기, 어디 도망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