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이틀 뒤였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스친 순간 죽지 않고 또 병원에 왔다는 걸 알아챘다.이젠 그녀의 목숨이 질긴 건지, 아니면 하늘이 그녀를 괴롭히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이렇게 망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건 짐이 될 뿐이지 않은가?임슬기의 몸을 닦아주던 간병인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슬기 씨, 정신이 들어요? 제가 가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임슬기는 간병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저 며칠이나 잤어
그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임슬기에게는 한마디 말로도 그의 화를 돋우는 재주가 있었다.사실 그날 밤 그녀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교차로를 두 개 지난 후 갑자기 권민에게 차를 돌리라고 했다. 임슬기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어디로 가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그런데 절반쯤 쫓아가다가 놓쳐버렸고 되돌아가는 택시 기사를 붙잡고 나서야 임슬기가 서촌에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서촌이 어떤 곳인지 배정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권민에게 속도를 내라고 했다.
‘하나같이 나보다 낫다고?’분노가 치밀어 오른 배정우는 무서운 냉기를 뿜으면서 침대에 있는 여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원래는 좋게 좋게 얘기하려 했지만 임슬기가 자꾸만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그래, 임슬기.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배정우가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던 그때 임슬기가 불쑥 물었다.“배정우, 내가 다른 남자들이랑 잤다고 믿는 거 아니었어? 더럽지 않아?”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상스러운 여자라 욕하고 바람을 피웠다고 믿으면서 또
권민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없었어요. 왜 그렇게 물으시죠?”배정우는 눈을 가늘게 뜨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체 뭘 하러 서촌에 갔지?’임슬기가 남자를 만나러 그런 곳에 갔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진승윤은 배정우가 간 걸 보고서야 문을 두드렸다. 임슬기는 간병인인 줄 알고 옷을 입은 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들어와요.”그런데 고개를 든 순간 진승윤과 눈이 마주쳤다.“승윤 씨?”“요 며칠 병원에 여러 번 왔었는데 계속 자고 있더라고요.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임슬기가 고개를
오정태를 구하지 못했기에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오정태는 임슬기가 자라는 모습을 쭉 지켜봤고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그 생각에 임슬기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예전에 그녀는 재벌 집의 공주였고 매일 호사스러운 삶을 누렸으며 사랑도 듬뿍 받았다. 이렇게 모든 걸 잃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슬기 씨?”진승윤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다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그냥 집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슬퍼서요... 괜찮아요
마침 물만두를 사 들고 온 간병인이 진승윤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슬기 씨 보러 오셨어요?”“쉿.”진승윤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슬기 씨한테 비밀로 해요. 난 먼저 갈 테니까 잘 챙겨주고요.”간병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임슬기는 물만두를 다 먹은 다음 시간을 확인하고는 옆에 앉아 있는 간병인을 초조하게 쳐다보았다.‘대체 누가 간병인을 불렀지? 만약 배정우라면 내 행적을 전부 보고하는 게 아니야? 간병인을 내보낼 방법을 생각해야겠어.’“돌보는 환자가 나 하나예요?”간병인이
“집사님 시신 건드리지 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한테 뭘 더 어쩌겠다는 거야?”남자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임슬기의 볼을 어루만졌다.“나랑 하룻밤 같이 보내면 그 늙은이 시신 돌려주지. 어때?”“꺼져!”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그런 더러운 방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도 마.”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슬기의 두 손을 잡아 침대에 짓누르고는 코웃음을 쳤다.“그 늙은이가 너한테 중요한 사람 아니었어? 그런데도 몸을 바치기 싫어? 네 남편은 널 사랑하지도 않잖아. 어차피 그 사람은 우리 둘이 이미 돌
임슬기도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다리가 저려 같은 자세를 유지했던 것이었다.그때 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침대에서 일으켰다.“대답 못 하겠어? 임슬기, 어쩜 이렇게 상스러워? 외로움을 하루도 못 참겠어?”“난 강요당한 거야...”“강요? 꽤 즐기는 것 같던데 어디가 강요야?”배정우의 조롱에 임슬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현장이 이렇게 난장판인데도 모른단 말인가?결국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난 강요당했어.”임슬기가 다시 한번 말했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배정우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
“혼자 와. 한 시간 줄게. 안 오면 지금 당장 임종현 한쪽 팔부터 박살 낸다.”속으론 수상하다고 느꼈지만 종현이를 걸고 도박을 할 순 없었다.임슬기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슬기는 열 번도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었다.이쯤 되자 임슬기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결국 임슬기는 어쩔 수 없이 강재호를 불러 김현정 곁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강재호는 도착하자마자 급히 나가려는 임슬기를 덥석 붙잡았다.“임슬기 씨, 어디 가세요?”강재호가 보기에도 어딘가
“슬기 언니, 매일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돼요. 주말엔 종현이 데리고 잠깐 놀러 다녀와요.”임슬기는 김현정을 흘낏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자꾸 나 보내려고 하니까 더 마음이 쓰여. 종현이도 이제 중3이라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바쁠 거야.”김현정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정말이예요. 슬기 언니, 나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안 해요.”“밥 먹자, 반찬 다 식겠다.”그 말에 김현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임슬기는 몰래 그녀를 흘낏 바라보곤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최근 들어 밤마다 피투성이가 된 김현정이 욕조에
아파트.연다인이 막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크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그런데 문 앞에 선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배정우, 너 여기 왜 왔어?”“내 집인데, 내가 오면 안 돼?”연다인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네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네가 김현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야?”“무슨 짓?”연다인은 잽싸게 그의 팔을 감싸며 새침하게 말했다.“배정우, 설마 너도 날 의심해? 날 믿는다고
배정우는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질투?임슬기는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질투하고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굳이 말하자면 남은 감정이라곤 혐오뿐이었다.“배정우 씨, 참 재밌네요.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두 다리 달린 남자는 널렸어요. 내가 연다인이 남자를 가졌다고 부러워할 이유라도 있어요?”배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임슬기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