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임슬기는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꿈속에 배정우가 나타났고 두 사람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갑자기 배정우가 임종현의 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위협했다.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때,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기? 내 아기인가?’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임슬기는 그제야 모두 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아이일 뿐이었다.“슬기 언니, 아침 먹어요.”임슬기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오는 김현정을 보며 물었다.“방금 나가서 사 온 거야
해 질 녘, 김현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육문주가 도시락을 가만히 들고 들어왔다.“슬기 씨, 여기 저녁이요.”도시락을 내려놓은 육문주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덧붙였다.“난 정말 정우 형 편이 아니에요. 그냥 의사로서 환자를 돌봐줄 뿐이라고요.”“환자? 이미 퇴원한 거 아니었어요?”육문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슬기 씨, 사실 전에 여러 번 말하려다 계속 말 못했던 게 있어요. 정우 형이 2년 전 교통사고로 뇌진탕을 입었었는데, 그때는 한 달 정도 요양하고 다 나았지만, 최근 다시 두통이
“네.”대답하고 나서야 육문주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로 말을 바꿨다.“아니에요. 안 좋았어요.”배정우는 한참을 침묵하다 욕을 퍼부었다.“쓸모없는 새끼.”육문주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내가 왜 쓸모없어요?”“육문주, 내 기억 상실 어떻게 치료해야 해?”“최면이요.”육문주는 배정우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설명하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한참 뒤 배정우가 물었던‘기분 좋았어?’의 상대가 자신이 아닌 임슬기였음을 알아차린 육문주는 배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임슬기는 강재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동생 잘 돌보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고마워요, 임슬기 씨.”강재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원래 육문주가 두 사람을 배웅하려 했지만, 진승윤이 먼저 임슬기의 짐을 차에 실었다.“육문주, 너는 해야 할 일이나 잘해. 이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육문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승윤 형, 내가 무슨 원수예요?”“배정우의 간첩이잖아.”“진짜 아니라고요.”육문주는 진승윤의 귀에 속삭였다.“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
김서우의 말 한마디에 임슬기는 즉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김서우는 먼저 온라인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걸 구실 삼아 따지러 온 것이었다.임슬기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김서우를 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김서우, 진실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김서우의 눈빛에는 잠시 당황함이 스쳤지만 이내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우리 엄마에게 약을 타서 우리 집 재산을 가지려 했던 거잖아!”“김씨 가문 재산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상관없다고?”김서우는 콧방귀를 끼고는 말
말이 끝나자마자 배정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재빨리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거칠게 임슬기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진승윤은 놓아주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배정우, 적당히 해.”지금 임슬기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진승윤은 배정우와 싸우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배정우는 임슬기의 손을 꽉 잡은 채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임슬기, 이리 와.”이미 얼굴이 백지장만큼 창백해진 임슬기는 목에서 올라오는 피 비린 맛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진승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꽃뱀이라니? 다 너 같은 줄 알아?”“임슬기가 몇 번이나 다친 건 다 김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데, 그게 너랑 상관없다고?”배정우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진승윤은 김서우가 떠오르자,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이 일이 진승윤과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미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서우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결국 말로는 안 통하는군. 행동으로 보여줘야겠네.’얼마 후, 육문주가 응급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두 사람을 훑어보며 물었다.“슬기 씨 혹시 머리를 부딪혔어요?”
병원 복도.김현정은 허둥지둥 달려와 병실 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임슬기를 보더니 진승윤을 향해 물었다.“진 변호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김현정이 나갔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진승윤은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 뒤 물었다.“김서우와 슬기 사이에 또 다른 문제라도 있었나요?”진승윤은 자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김현정은 휴대전화에 저장했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실검에 오른 내용이에요.”진승윤은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