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그날 밤 머릿속이 온통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결국 밤을 꼬박 새워버렸다.다음 날 아침, 강재호는 그녀의 퀭한 눈 밑에 짙게 드리운 다크 서클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누나, 오늘은 그냥 푹 쉬어요. 나가지 말고.”“오늘 월요일이잖아. 출근해야지.”“누나는 공동 대표예요. 회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루쯤 안 가면 어때요.”임슬기는 머리를 괴고 식탁에 앉아 말했다.“커피 좀 내려줘. 오늘 초안 마감인데 진짜 거의 다 끝났거든. 계약 어긴다는 말은 듣기 싫어.”“혹시 석지헌 씨 건이에요?”
“저...”임슬기는 석지헌을 슬며시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석지헌 씨,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그런데 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요.”그 말을 들은 석지헌이 곁눈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짓궂게 물었다.“설마 여자 좋아하는 건 아니죠?”“아뇨!”임슬기는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연애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요. 그러니까...”“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꽃도 그만 보내고 밥도 그만 사라, 이
한동안 날카롭게 대치하다가 임슬기는 입술을 감쳐물었다.“더 볼 일 없으면 먼저 갈게요.”임슬기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배정우 옆을 지나쳐 나가려 했다.그 순간 배정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어둡고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꿰뚫듯 바라보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종현이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지난 4년 동안 네가 사고당했던 그날이면 꼭 묘지에 가더라. 넌 정말 걔 안 보고 싶어?”임슬기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대로 얼어붙은 듯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발을 떼고 싶었지만 다리가 돌덩이처럼 무거워 도저히 움직일 수 없
임슬기는 그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절대 착각일 리 없었다. 4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반지의 모든 디테일을 임슬기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건 배정우가 그녀에게 청혼하며 건넨 반지였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이었다.석지헌은 임슬기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이 반지 마음에 들어요? 제가 사드릴게요.”“아뇨. 괜찮아요.”임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마음에 든 건 아니에요.”그녀는 왠지 모르게 이 자리에 배정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아니, 배정우가 없었다면 이 반지가
집에 돌아온 임슬기는 여전히 그 초대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작업실의 운영 상황이 어떤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돈이 정말 급하면 진승윤이 언제든 송금해 줄 것이다.처음 스튜디오를 차릴 때도 자본금은 전부 그가 댔다.그런데 벌써 4년이나 지났는데 임슬기는 아직도 그 창업 자금을 갚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하지만 배정우만 생각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먼저 밀려왔다.“누나, 가봐. 사람들이랑 좀 부딪히고 어울리는 게 결국 누나한테 도움이 될 거야.”강재호는 과일주스를 한 잔 짜서 임슬기에게 내밀며 말했다
권민은 한참 동안 임슬기를 뚫어지게 바라봤다.“외모는 사모님과 거의 똑같고 행동이나 말투에서도 딱히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세상에 정말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그런 사례들이 있긴 합니다.”잠시 뜸을 들이던 권민은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혹시 사모님께서 기억을 잃은 건 아닐까요?”기억 상실?배정우는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이내 자신이 철저히 조사했던 교도소 화재 사건이 떠올랐다.확실히 이상한 점이 많았다.모두들 그날 의무실에 있던 건 임슬기 혼자였다고
석지헌이 예약한 곳은 분위기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창밖으로 바다가 보여 야경까지 즐길 수 있는 자리였다.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그는 임슬기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자신도 손에 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강하린 씨, 진짜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당신한테 딸이 있을 줄이야.”임슬기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당신이 모르는 건 더 많아요.”“로아 아버지는요?”그녀는 잠시 말을 아끼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었어요.”석지헌은 조금 놀란 듯 물었다.“진짜 죽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헤어진 거예요?”“
로아를 유치원에 데려다준 후, 임슬기는 심리상담사 전승호를 찾아갔다.“강하린 씨, 또 증상이 나타났다고요?”임슬기는 그와 마주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약 계속 먹어야 하죠?”전승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강하린 씨,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걸린 병은 좀 복잡합니다. 저희가 흔히 말하는 PTSD랑은 다릅니다. 당신이 무서워하는 건 예전에 남자에게 학대받고 상처 입은 경험이 전제가 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신이 그 사람을 찌른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심한 보복이 올까 봐
임슬기는 석지헌을 한 번 흘겨보더니 로아를 안아 들었다.“로아, 아무 아저씨한테나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했지? 세상에 나쁜 사람도 많단 말이야.”그러자 로아는 고개를 돌려 석지헌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근데 나 아무한테나 그런 거 아니에요. 잘생긴 아저씨라서 그런 거예요.”잘생겨서라니 어린 나이인데도 외모 보는 눈은 확실했다.하지만 잘생긴 남자든, 예쁜 여자든 다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로아야, 아저씨는 아빠 해도 괜찮은데?”석지헌은 슬며시 다가가 로아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네가 엄마만 잘 설득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