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두 분이신가요?”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임슬기 옆에 앉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우리랑 같이 한잔할래요?”그 말이 끝나자 다른 남자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임슬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정이 먼저 나섰다.“좋죠. 근데 저 술 좀 센데 괜찮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 두 분 술은 제가 쏘겠습니다. 마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세요.”김현정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좋아요, 위스키로 열 잔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열 잔의 위스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게임 하나 하죠. 진
임슬기는 근처 공원에서 김현정을 찾았다.차가운 밤바람 속 한 가냘픈 그림자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예전에 날씨가 좋을 때면 자주 함께 산책하던 곳이었다.가끔은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곤 했었다. 어느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임슬기는 두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김현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인근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김현정을 불렀다.“현정아.”김현정은 임슬기를 보자마자 일어나 그녀의
육문주는 문을 열어젖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현정 씨, 그 아이 우리 아이에요.”김현정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그날 밤 육문주는 분명 다른 여자와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일 수 있단 말인가?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임슬기 역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육문주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임슬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근데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강재호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그의 삶은 이미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진작에 잊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임슬기에게는 늘 고마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도 그녀였는데, 이제는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다니, 이건 그에게 너무 큰 행운이었다.하지만...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는 어렵게 말했다.“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돈 낭비할 필요 없어요. 내 인생은 어차피...”“재호야, 네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