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6 HERA의 두 공간에서Ⅰ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최고급 멤버십 프라이빗 라운지 ‘HERA’.철저한 신원 확인을 거쳐야만 들어설 수 있는 이곳은,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예약된 VVIP 룸의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양주 세트가 화려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그들만의 은밀한 아지트로, 모임의 멤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현재 상업 모델로 활동 중인 서주환(28살)이었다. 출퇴근에 얽매이지 않은 프리랜서에 가까운 직업 특성상, 시간이 가장 여유로웠다. 뭐, 아예 뒷꽁무니도 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시기도 있지만 말이다. 뭘 걸쳐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피지컬에, 앳되고 귀여운 얼굴과 퇴폐적인 섹시함이 공존해, 업계에서 몸값이 꽤 높은 녀석. 유명 건설사 대표인 아버지를 둔 덕에 돈의 구애 없이 자란 찐 금수저이기도 했다. 그는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여유롭게 핸드폰을 넘기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룸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현민과 최시은 커플이 등장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징글징글한 찐친 바이브였다. 어제 일로 여전히 빡이 쳐있는 현민과, 그의 집요한 단속에 기어이 폭발해 버린 시은이, 앙칼지게 말다툼을 벌이며 들어섰다.
“그러니까, 씨발, 내가 누누이 얘기하잖아. 어딜 가면 어디 간다, 미리미리 보고를 하고 가라고.”
“미리 보고하면? 니가 보내줘? 안 보내 줄 거잖아!”
“내가 무조건 가지 말라고 해? 어딘지, 누구를 만나는지, 그거 확인하고 보내준다니까?”
“너, 입술에 침은 바르고 말하냐? 거짓말 진짜 잘한다, 백현민?”
그 요란한 꼴을 힐끗 쳐다본 주환은 대충 손만 흔들어 인사한 뒤 다시 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하, 저 미친년놈들, 또 발정 나서 난리네.' 라는 무관심의 표본이었다.
차분했던 룸 안은 두 사람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곧이어 룸의 문이 열리고 강경훈(29살)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뼈대 깊은 의사 집안에 아버지가 대형 대학병원 원장님이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 대신 동물을 고치겠다며 수의대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돈으로 개인 동물병원을 차린 괴짜. 귀공자처럼 우아하고 젠틀한 외모 덕에, 그의 병원에는 개나 고양이를 핑계 삼아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찾아오는 여성 보호자들이 끊임없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왔어, 형?”
“서주환, 얼굴 좋네. 아이씨, 쟤들은 또 왜 저래?”
주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경훈은 가벼운 인사와 동시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백현민과 최시은의 2차전이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쟁쟁한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맞춤 정장을 깔끔하게 빼입은 차건우가 룸으로 들어섰다. 룸 안을 한 번 쓱 둘러본 건우는 상석에 앉은 경훈과 주환의 왼쪽, 그러니까 현민과 시은의 맞은편 소파 중앙에 묵직하게 몸을 기댔다.
“핸드폰 줘, 빨리.”
“아, 진짜 또 시작이네? 이건 내 핸드폰이지, 니 핸드폰이 아니야.”
“하, 기운 빼지 말고 빨리 할거 하자, 응?”
“너, 이거 범죄야. 남의 개인 정보를 함부로 막...”
“남 아니고, 내거. 빨리 내놔.”
현민과 시은은 여전히 살벌한 말다툼을 이어갔다. 주환과 경훈은 이미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두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스몰토크를 나누고 있었고, 건우는 마치 TV 속 연애 프로그램을 보듯, 나른하게 시선을 고정 시킨 상태였다.
"씨발, 이 사진은 뭐야? 아니, 왜 이렇게 바짝 붙어서 찍었어?"
결국 시은의 핸드폰을 뺏어 갤러리까지 검열하기 시작한 현민이, 미간을 확 좁혔다.
"우리가 앉아 있는 쪽에 태윤이랑 채민이가 와서 걔들이 찍어준 거라니까?"
"이 개새끼들은 그 널찍한 카페 놔두고 왜 굳이 너희 앞까지 기어 와서 대가리를 들이밀고 지랄이야."
"우리가 워낙 네임드라, 우리가 사진을 딱 올리면, 바이럴이 엄청~ 된다는 걸 알거든.“
시은이 현민의 염장을 지르려는 듯,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여우같이 덧붙였다.
"채민이는 하윤이 보고 '누나 안녕' 하고 먼저 인사도 했어. 그만큼 우리가 유명하다는 거지."
팬덤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이렇게나 대단하다! 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 말은 건너편에 앉아 있던 차건우의 역린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워딩이었다.
‘하아… 뭐? 누나 안녕?‘
건우의 턱관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디서 근본도 없이 굴러먹던 기생오라비 새끼가 감히 내 여자한테 눈을 까뒤집고 안녀엉?’
순식간에 기분 나쁜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훅 훑고 지나갔다.
‘하, 이하윤, 이거... 오늘 진짜 뼈도 못 추리게 존나 씹어 먹어야지, 씨발.'
덕질 인생 5년 차에 접어든 자신의 여자 친구. 무작정 속박하고 억누른다고 해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을 여자가 아니란 걸 알기에 적당히 목줄을 풀었다 조였다 하고는 있지만, 순간순간 들려오는 그녀의 덕질 인생은 그의 심기를 건들이기에 늘 충분했다.
참 이상했다. 그 잘난 아이돌 새끼들 눈엔 그저 수많은 여자팬들 중 하나일 텐데, 왜 이렇게 등줄기가 서늘하고 좆같이 불안한 기분이 드는지.
태현과 하윤이 늦는다는 연락을 미리 남겼기에, 그들은 먼저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건우 역시 제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스트레이트 잔에 담긴 독한 양주를 단숨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어제 일로 티격태격, 방금 전까지 서로 잡아먹을 듯 쌍욕까지 주고받으며 으르렁거리던 현민과 시은.
독한 알코올이 옴 몸을 헤집기 시작하자, 언제나처럼 꼴사나운 모습으로 돌변했다.
어느새 현민의 큰 손이 시은의 맨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쓸어 올리고 있었고, 시은은 야릇한 숨을 흘리며 현민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는 입술을 부벼대고 있었다. 언제 싸웠냐는 듯, 농도 짙은 스킨십이 시작되었다.
"아, 씨발, 진짜 저것들 징그러워서 못 봐주겠네."
경훈이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새끼들 전용 호텔방을 하나 따로 잡아줘야 돼. 아우, 짜증나. 옷 안 벗고 떡치고 앉았네. 토 쏠려, 씨발."
주환 역시, 자신의 눈 안에 들어오는 난잡한 광경에 진심으로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차건우에게 현민과 시은의 저 더러운(?) 장면은 확연하게 다른 의미였다.
그는 나른하게 깔린 눈으로 팔짱을 낀 채 그 진상 커플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어차피 이하윤이 도착하면, 본인 역시 저 짐승 같은 짓거리를 똑같이 해댈 참이었으니까.
아니, 씨발, 저것들보다 더 질척이며 미친 듯이 물고 빨 생각이었으니까.
#45 위험한 만찬“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하윤이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를 찾자 스탭 중 한 명이 안쪽을 가리키며 위치를 안내해주었다.식당 밖의 창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식당 안쪽의 사각지대에, 테이블 여러 개를 붙이고 오목조목 앉아 있는 에테르의 멤버들이 보였다. 시은을 찾으니, 그녀는 테이블의 안쪽 구석에 짱 박혀 앉아 있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에 하윤과 시은의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보였다.“누나, 이리로 와.”시은의 맞은편에 자리 하나를 비워두고 그 옆 자리에 앉아있던 채민이 손을 흔들었다.하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채민의 옆자리에 천천히 앉은 하윤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시은과 다시 한 번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에테르의 루미로서 덕질을 한 지 벌써 5년. 평생 쓸 운을 올해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일반 팬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빠순이로서, 행복에 겨워 뒤질 일들.근데... 묘하게 불편한 것은 왜 인지. 그저 그들의 음악이 취향에 맞았고 그 취향에 맞는 음악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인형 같은 이 예쁜 남동생들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친해져도 되는 건가... 싶은 묘한 불안감.“소문 들었지? 나 고기 엄청 잘 굽는 거?”시은의 옆에 앉은 태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의 테이블에 놓인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하윤과 시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태윤이, 잡고 있던 집게로 두툼한 고기를 집어 들어 불판 위에 올렸다. 불판이 과하게 달궈진 탓에 치지직- 소리가 크게 났다. 이내 약간의 열기와 함께 기름이 사방에 튀기 시작했다.“어, 기름 튄다.”커다란 불판 위에서 투두둑 튀어나오는 기름을 보며 채민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하윤의 앞으로 자신의 몸을 훅 기울였다. 혹여나 기름이 하윤을 향해 튈까 자신의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아... 안 그래도 돼.”채민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리고 너무도 가깝게 다가온 탓에 하윤이
#44 위험한 만찬으로의 초대탈덕 전까지는 세상 밖으로 절대 꺼낼 수 없는 귀한 사진을 잔뜩 찍은 하윤과 시은은, 이제 귀가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윤은 체조경기장 근처의 호텔로, 시은은 현민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빨리 보내.”“응. 에어드랍 켰어?”“응. 빠짐없이 다 보내. 싹 다 지워야 되니까.”현민의 집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시은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시은의 집착광공 남친, 백현민이 핸드폰 검사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에, 방금 찍은 모든 사진은 하윤에게 넘겨 놓기로 했다. 하윤이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클라우드에 모든 사진을 업로드 시키고, 나중에 시은의 클라우드로 넘겨주기만 하면 됐으니까.머리를 맞댄 상태로 각자의 핸드폰을 가까이 두고 현생의 남친들을 방어할 완전 범죄를 위해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훅 다가왔다.“누나.”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홱 들고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태윤이었다.“그...”태윤이 살짝 주변 눈치를 보며 그녀들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밥 먹고 가.”태윤의 말에 하윤과 시은의 눈이 동시에 번뜩 뜨였다. 조금만 더 떴다간 눈알이 빠질지도 몰랐다.“아니, 아니, 아니, 아니!”“아냐, 우리 지금 집에 갈 거야!”하윤과 시은은 다급하게 양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태윤의 입가에 피식-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두 사람의 반응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조금 전에도, 지금도... 이 두 여자의 선을 넘지 않는 개념 장착이 괜히 뿌듯했다. 이런 여자들이 에테르의 팬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분 좋았다.“식당 하나 전체 예약했어. 거기 스탭들 밖에 없어서 괜찮아. 소속사 실장님한테도 말씀드려 놨고.”“아니야, 아니야. 우리 밥 안 먹어도 돼.”“그래. 우리 안 그래도 지금 막 집에 가려고 했어.”두 팬의 염려를 알고 있는
#43 백스테이지의 환희“와, 시야 대박!”에테르의 리더, 강태윤이 시은에게 선물로 준 ‘에테르 VIP 콘서트 티켓’의 좌석은 1층 8구역의 12열이었다. 실질 1열. 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연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태윤의 배려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 해, 뜨거워졌다.체조경기장, KSPO DOME의 8구역은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를 보기에 상당히 좋은 자리였다. 본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멤버들이 움직이는 모든 동선을 따라가기 좋고, 전광판까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돌출 무대가 있어, 그 무대 앞에 에테르 멤버들이 온다면 플로어 좌석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은 자리였다. 거기다 실질 1열의 좌석이니 멤버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자리.“저기... 시우 부모님.”“와, 진짜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그치? 누나도 엄청 예쁘더라. 근데 오늘은 안 왔나 봐."덕질 5년 차의 짬바는 내 최애의 가족도 괜히 친근해지는 법."어? 저기 저 사람, 태윤이 여동생 아냐?”“어? 어디?"시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윤이 가리킨 곳에 태윤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어어, 맞아. 존나 예쁘지?”“응. 진짜 연예인들은 가족들이 다 장난 없네.”“그러니까. 부럽게.”VIP 초대권의 또 다른 혜택. 멤버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보통 콘서트의 두 번째 날인 토요일, 중콘에 가족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윤과 시은이 앉아 있는 8구역에서 에테르 멤버들의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들이었다.***"꺄아아아아악!!!"암전과 함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음악의 비트 소리와 함께 VCR의 화면이 재생되었다.또 다시, 에테르 단독 콘서트 [Luminate]의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시우야~~~!”"강태윤!!!"콘서트가 진행될수록 콘서트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
#42 거짓말의 서막“내일 몇 시에 마치는데?”바쁘게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하윤을 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은 건우가 툭- 물었다. 순간, 하윤의 손짓이 멈칫했다. 가만... 막콘이 몇 시에 끝나더라?막콘의 경우에는 앵콜에서 앵앵콜, 앵앵앵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좀 더 넉넉하게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어느때보다 하윤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음... 8시... 쯤?”“하, 더럽게 늦네. 데리러 가?”“아냐... 후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응, 시은이가 태워 주기로 했어.“어디로 가는데?”아차차!이건 생각을 못 했는데...“어... 그... 우리 회사... 연수원 있잖아.”“아~ 용인에 있는 거?”“아, 응!”다행이었다.아주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다.“그럼, 집까지 1시간 정도 걸리겠네? 우리 집으로 바로 올 거지?”“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하윤은 건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첫콘 때 구매한 콘서트 MD 굿즈는 시은이에게 다 맡겨 놓고 온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안고 귀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할테고 말이다.“내일은 꼭 껴안고 자야지. 아이씨, 연수 개새끼. 월요일에 학교 가서 그 새끼 보이기만 해봐라. 확 대가리 날려 버릴 거야, 씨발.”하윤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차건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였지만, 두 사람의 2,500일인 일요일,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건우의 역린을 살살 건들고 있었다.빠...빨리 가야할 것 같다.“바빠도 중간 중간 연락 자주 해.”“응."시우의 우치와와 네임보드, 스케치북, 또 다른 루미들에게 나눔할 커스텀 미니 굿즈들을 잔뜩 넣은 작은 캐리어를 손에 끌고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건우
#41 사랑의 깊이하윤은 건우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사실, 앵콜곡까지 맛있게 말아줄 에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에테르 멤버들이 콘서트장의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에서 토롯코를 타고 등장하기 직전 빠르게 짐을 꾸려 콘서트 장을 빠져나왔다. 콘서트가 진행된 지 약 3분의 2 지점이 지난 상태였다. 아쉬움이 가득 남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포장 주문했는데요.”건우의 집 근처의 건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덮밥 집에 들려, 미리 앱으로 주문한 포장 주문 음식을 받았다. 어쩌면 피곤함에 쩔어 저녁도 굶고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 6월과 8월의 시험 마지막 날에도 그랬으니까.기왕이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음에도 벌써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띠띠띠띠띠띠띡- 띠리리-건우 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건우가 깨어 있었다면 하윤이 문 따는 소리에 벌써 중문 앞까지 달려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과 함께 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거실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놓은 흔적과 탄산수 한 병을 따서 반쯤 마시다만 흔적이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하윤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옷들은 바르게 펴 스타일러에 넣어 기계를 작동 시켰고, 반쯤 남은 탄산수는 싱크대에 버리고 병은 재활용 통에 넣었다.굳게 닫힌 그의 마스터 룸을 힐끔 보고는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건우가 너무 피곤한 탓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이고, 건우의 그 잘난 얼굴을 못 보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몸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윤은 빠르게 욕실
#40 에테르 단독 콘서트 [ Luminate ]“콘서트 퇴근 길도 못 보고 간다고?”채아의 눈이 커졌다.에테르가 데뷔한 이래로 다섯 번째 단독 콘서트였다. 그때마다, 콘서트 기간 3일 내내,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는 에테르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덕질의 룰이었다.이미 채아를 제외한 직장인 셋은, 반차를 내고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Luminate]가 열리는 [ KSPO DOME ]에 일찍 도착했다. 줄을 서서 콘서트 MD 제품을 구매하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진작에 공원 입구 쪽의 할리스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콘서트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응. 마치자마자 바로 튀어가야 돼.”하윤이 아쉬워하는 채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듯, 예쁜 미소를 흘렸다.가끔, 이 언니들은 참 이상했다. 에테르의 덕질에 정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현생의 일로 에테르의 우선 순위를 바꿔버리는 기행을 하곤 했다. 빠순이질에 진심인 이들에게 현생의 일 따위는 감히 에테르보다 앞설 수 없는데 말이다.“시은아, 너는 애들이랑 같이 보고 와.”하윤은 시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사실 오늘, 하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오늘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차건우의 10월 ‘변시 모고’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쯤에는 그가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금요일의 콘서트는 직장인의 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주말 콘서트보다 늦게 시작하는 이유로 밤 10시가 넘어야 끝날 판이었다.더군다나 토, 일 이틀 간 선행 연구팀의 연수가 있다고 알고 있는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도 억지로 삼키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윤이 보여준 중콘 티켓 취소 내역을 보며, 콘서트 3일 중 하루라도 재밌게 보고 오라며 저 답지 않게, 에테르의 첫콘을 쿨하게 보내준 그였다.그러니... 이하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냐고.“나, 중간에 나가야 될 수도 있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