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 차건우와 이태현의 사정
이현그룹 R&D 선행연구팀 소속 이하윤.
대리급 주임 연구원인 그녀는 사내에서 꽤 실력을 인정받는 에이스였다.
물론, 하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 대단한 배경에 이현그룹의 후계자 중 한 명인 ‘이태현 상무’의 은밀한 입김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고 양심껏 단언할 순 없었지만, 회사 안에서는 철저하게 남남처럼 지내는 탓에 이 짜릿한 비밀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운도 실력이라고 합리화하며, 하윤은 밀려드는 업무에 치이는 이 팍팍한 현생마저 나름대로 즐기려 노력 중이었다.
오후 5시. 정부 부처와 협업하여 진행하는 대규모 ‘신소재 개발 프로젝트’ 설명회 참석을 위해 컨퍼런스 홀로 이동하는 길. 자신의 직속 후배인 수희와 기현을 옆에 끼고 나란히 걸으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던 하윤의 걸음이 멈칫했다.맞은편 복도 끝. 마치 맞춤 수트와 한 몸이 된 듯 완벽한 핏을 자랑하는 남자. 주위의 공기마저도 완전히 압도하는 범접 불가한 아우라가 밀려오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한 번쯤 숨을 죽이고 돌아보게 만드는 미친 외모의 소유자, 이태현 상무가 임원진들을 거느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스물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상무’라는 직급을 단 것은, 당연히 그가 이현그룹 회장의 총애를 받는 막내아들이기에 하사 받은 '낙하산' 직급이 맞았다. 하지만 괜히 굴지의 대기업 후계자이겠는가. 그를 그저 온실 속 화초로 본다면 큰 오산이었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제 아버지의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제 힘으로 층층의 천장을 깨부수고 올라온 지독한 괴물이 바로 이태현이었다.아, 물론 남들보다 승진 코스가 고속 익스프레스 급으로 빠르긴 했지만 말이다.
무리를 이끌고 다가오던 태현의 서늘한 시선이 허공을 가르더니 정확히 하윤의 눈동자에 꽂혔다. 찰나의 순간, 하윤은 오직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눈웃음을 살짝 흘렸다.태현 역시 걸음을 멈추지 않고, 표정의 큰 변화 없이, 그저 하윤만이 읽을 수 있는 여유롭고 끈적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주 짧게 교차한, 둘만의 은밀하고도 짜릿한 눈빛 교환은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태현의 무리가 코앞까지 다가와 이내 두 무리가 스쳐 지나갈 즈음, 하윤과 후배들은 다른 연구원들처럼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태현은 무심하게 그 인사를 받았고, 먼저 그들이 컨퍼런스 홀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얼어붙어 있던 하윤 일행과 다른 직원들이 숨을 내쉬며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하아… 상무님은 진짜 사람이 맞으실까요?"
자리에 앉자마자 수희가 호들갑을 떨며 하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수희의 흥분도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냥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 따로 없지 않아요? 피지컬 진짜 미쳤다."
평소 꾸미는 건 물론 연애에도 통 관심이 없던 수희마저 발정이 난 것처럼 홀린 것을 보면, 이태현이 풍기는 짙은 수컷의 페로몬은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영역인 듯 했다.
"남자인 제가 봐도... 상무님은 진짜 장난 없습니다. 핏이 아주 그냥 예술이에요, 예술."
기현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태현의 미친 비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자들마저 홀리는 능력이라니.
하윤은 후배들의 반응을 보며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속으론,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은 듯 만족스러워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이하윤에게 있어 저 이태현이라는 남자는 편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친한 오빠이자 제 남자친구의 불알친구였으니 말이다. 괜히 내가 칭찬 받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설명회장 내부는 부서별, 직급별로 철저하게 지정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이태현 상무는 저 멀리 앞쪽 중앙 VIP석에 자리했고, 하윤과 동료들은 왼쪽 사이드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수희와 기현의 시시콜콜한 수다가 이어지던 중, 하윤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이태현이 보낸 카톡이었다.
[마치고 매번 보던 곳에 차 세워 둘게. 좀 천천히 나와. 정부쪽하고 얘기 좀 하고 가야 할 것 같아.]
태현의 건조하지만 은밀한 메시지를 확인한 하윤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가볍게 답장을 남겼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화면을 덮고 후배들의 대화에 섞여 들었다.
설명회는 대략 두 시간 짜리였고, 끝난 뒤에도 부서별로 간단한 브리핑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퇴근은 저녁 8시가 훌쩍 넘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하윤과 태현은 늘 보던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운전기사와 비서실장이 동승한 최고급 외제 SUV 뒷좌석. 나른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차 안에 나란히 앉은 태현과 하윤은 정기 모임 장소인 ‘HERA’를 향해 부드럽게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계는 이미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아, 그러니까 딱 네 장만 빼달라니까? 그 정돈 오빠 짬에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응?"
하윤은 아까부터 태현의 단단한 팔뚝을 붙들고 늘어지며 징징거리는 중이었다.
이현그룹 계열 코스메틱 브랜드 [플루아]에서는, 현재 그녀가 끔찍이 아끼는 [에테르]의 멤버 지한, 채민, 해성이 전속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제품 구매자를 대상으로 팬 사인회 응모 이벤트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고, 하윤은 이때다 싶어, 제 ‘황금 인맥’을 총동원해 팬싸 프리패스 티켓을 노리는 참이었다.
돈 많은 채아가 평소 물심양면으로 조공을 챙겨주고, 금손 재희 역시 커스텀 굿즈며 온갖 것들을 살뜰히 도와주는 터라, 늘 받기만 했던 고마움과 미안함에 하윤도 이번 기회에 든든한 빽(?)이 되어주고 싶었다. 비록 하윤과 시은의 최애 멤버는 모델 라인업에 없었지만, 기왕 빽을 쓰는 거라면 자신들도 그 팬싸에 참석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귀찮아. 네 장 빼는 게 뭐 애 장난인 줄 알아? 내가 위에서 말 한마디 툭 던진다고 딱딱 빠지는 게 아니라고. 뒷말 나오기 딱 좋잖아."
회사에서는 임원들을 덜덜 떨게 만들던 '서늘한 이태현 상무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허물없는 친한 선후배 바이브만이 차 안을 맴돌았다. 어쩌면, 이하윤 한정, 그녀의 모든 투정을 받아주는 ‘친한 아는 오빠’의 텐션일지도 몰랐다. 이태현의 진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에이~ 오빠 입김 한 번이면 프리패스인 거 다 아는데?“
하윤이 태현의 말을 반박하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진짜 디게 비싸게 구네, 이태현...”
하윤이 입술을 비죽이며 태현의 어깨에 제 머리를 살짝 기댔다.
그녀의 의미 없는 그 작은 스킨십 하나에 태현의 목 울대가 미세하게 일렁인다는 것을, 그녀는 절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거 빼주면, 나도 뭐 떨어지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태현이 짙은 시선으로 하윤의 붉은 입술을 찰나에 훑어 내렸다.
“뭐, 뽀뽀라도 진하게 한 번 해줄 거야?"
가벼운 농담의 탈을 썼지만, 그 속엔 지독한 진심이 도사리고 있는 멘트였다. 당장에라도 저 칭얼거리는 입술을 집어 삼키고, 앉아 있는 뒷좌석에 눕혀버리고 싶은 끈적한 진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이태현의 짙은 욕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윤은 경계심 없이 해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건우한테 허락 받아 오면 해줄게, 뽀뽀."
"씨발, 그 미친 개새끼가 존나게 허락 잘 해 주겠다.“차건우라는 가장 거대한 철벽을 내세운 하윤의 말에 태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러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차건우와 이태현, 이 지독한 알파메일 수컷들의 여성 취향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다는 것은.
건우는 고등학교 1학년 입학식 날, 3학년이던 하윤에게 첫눈에 반해 지독하게 사랑을 갈구했다. 하지만 하윤이 고3 수험생이라는 점, 그리고 이듬해엔 성인과 미성년자라는 신분의 벽 탓에 그저 치기 어린 짝사랑으로 치부되곤 했다.
반면, 태현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하윤을 곁에 두고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재계 1위를 다투는 재벌가의 후계자, 그가 가진 지나치게 거대하고 숨 막히는 배경 탓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행여나 그녀가 지레 겁을 먹고 아예 도망쳐버릴까 봐 주위를 맴돌며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결국, 태현의 그 치명적인 망설임이 패착이었다.
건우가 스무 살 성인이 되던 해.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자란 맹수 차건우는, 날 것의 수컷 본능으로 그대로 밀어붙여 기어이 하윤을 눕히고 제 품에 안았다. 태현은 제대로 된 고백도 한 번 못 해본 채, 제 짝사랑을 만천하(친구들)에 강제로 공개 당하는 쓰라린 수모와 패배를 겪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태현이 그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 저 여자 의미 없이 몸을 섞고 만나면서도, 그의 시선은 늘 이하윤을 향해 있었다. 속으로는 건우와 하윤이 언제쯤 파국을 맞이할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는, 참으로 기형적이고도 미친 관계.그들의 정기 모임 멤버에는 건우와 태현을 포함함 다섯 수컷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배경과 썩어 나는 자본, 타고난 외모까지 모든 걸 다 쥐고 태어난 포식자들이었다. 그 쟁쟁한 맹수들 틈바구니에서도 이태현과 차건우, 두 사람은 유독 궤를 달리하는 괴물들이었다.
아마도 인간 자체가 품고 있는 날 것의 본성이 지나치게 서늘하고 무서운 종자들이기 때문이리라. 영악하리만치 똑똑한 두 놈은, 서로가 절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적이 되어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서로의 세계에 어떤 피 바람이 불어 닥칠지 너무나도 잘 알았으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승자의 자격으로 하윤을 차지한 건우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태현은 차건우의 줄을 함부로 쳐낼 수 없었고, 반대로 태현이, 하윤을 향한 미련을 대놓고 줄줄 흘리고 다녀도 건우 역시 차마 그의 숨통을 끊어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껄끄럽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
이들은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수컷들이었다.#45 위험한 만찬“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하윤이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를 찾자 스탭 중 한 명이 안쪽을 가리키며 위치를 안내해주었다.식당 밖의 창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식당 안쪽의 사각지대에, 테이블 여러 개를 붙이고 오목조목 앉아 있는 에테르의 멤버들이 보였다. 시은을 찾으니, 그녀는 테이블의 안쪽 구석에 짱 박혀 앉아 있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에 하윤과 시은의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보였다.“누나, 이리로 와.”시은의 맞은편에 자리 하나를 비워두고 그 옆 자리에 앉아있던 채민이 손을 흔들었다.하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채민의 옆자리에 천천히 앉은 하윤은 맞은편에 앉아있는 시은과 다시 한 번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에테르의 루미로서 덕질을 한 지 벌써 5년. 평생 쓸 운을 올해 다 써버린 것 같았다. 일반 팬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빠순이로서, 행복에 겨워 뒤질 일들.근데... 묘하게 불편한 것은 왜 인지. 그저 그들의 음악이 취향에 맞았고 그 취향에 맞는 음악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인형 같은 이 예쁜 남동생들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친해져도 되는 건가... 싶은 묘한 불안감.“소문 들었지? 나 고기 엄청 잘 굽는 거?”시은의 옆에 앉은 태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들의 테이블에 놓인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하윤과 시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태윤이, 잡고 있던 집게로 두툼한 고기를 집어 들어 불판 위에 올렸다. 불판이 과하게 달궈진 탓에 치지직- 소리가 크게 났다. 이내 약간의 열기와 함께 기름이 사방에 튀기 시작했다.“어, 기름 튄다.”커다란 불판 위에서 투두둑 튀어나오는 기름을 보며 채민이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하윤의 앞으로 자신의 몸을 훅 기울였다. 혹여나 기름이 하윤을 향해 튈까 자신의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아... 안 그래도 돼.”채민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리고 너무도 가깝게 다가온 탓에 하윤이
#44 위험한 만찬으로의 초대탈덕 전까지는 세상 밖으로 절대 꺼낼 수 없는 귀한 사진을 잔뜩 찍은 하윤과 시은은, 이제 귀가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윤은 체조경기장 근처의 호텔로, 시은은 현민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빨리 보내.”“응. 에어드랍 켰어?”“응. 빠짐없이 다 보내. 싹 다 지워야 되니까.”현민의 집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시은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시은의 집착광공 남친, 백현민이 핸드폰 검사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에, 방금 찍은 모든 사진은 하윤에게 넘겨 놓기로 했다. 하윤이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클라우드에 모든 사진을 업로드 시키고, 나중에 시은의 클라우드로 넘겨주기만 하면 됐으니까.머리를 맞댄 상태로 각자의 핸드폰을 가까이 두고 현생의 남친들을 방어할 완전 범죄를 위해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훅 다가왔다.“누나.”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홱 들고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태윤이었다.“그...”태윤이 살짝 주변 눈치를 보며 그녀들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밥 먹고 가.”태윤의 말에 하윤과 시은의 눈이 동시에 번뜩 뜨였다. 조금만 더 떴다간 눈알이 빠질지도 몰랐다.“아니, 아니, 아니, 아니!”“아냐, 우리 지금 집에 갈 거야!”하윤과 시은은 다급하게 양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았다.태윤의 입가에 피식- 기분 좋은 웃음이 터졌다.두 사람의 반응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조금 전에도, 지금도... 이 두 여자의 선을 넘지 않는 개념 장착이 괜히 뿌듯했다. 이런 여자들이 에테르의 팬이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기분 좋았다.“식당 하나 전체 예약했어. 거기 스탭들 밖에 없어서 괜찮아. 소속사 실장님한테도 말씀드려 놨고.”“아니야, 아니야. 우리 밥 안 먹어도 돼.”“그래. 우리 안 그래도 지금 막 집에 가려고 했어.”두 팬의 염려를 알고 있는
#43 백스테이지의 환희“와, 시야 대박!”에테르의 리더, 강태윤이 시은에게 선물로 준 ‘에테르 VIP 콘서트 티켓’의 좌석은 1층 8구역의 12열이었다. 실질 1열. 심지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콘서트를 즐길 수 있도록 연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태윤의 배려에 두 사람의 마음이 따뜻하다 못 해, 뜨거워졌다.체조경기장, KSPO DOME의 8구역은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무대 전체를 보기에 상당히 좋은 자리였다. 본 무대와는 꽤 거리가 있긴 하지만 멤버들이 움직이는 모든 동선을 따라가기 좋고, 전광판까지 정면으로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돌출 무대가 있어, 그 무대 앞에 에테르 멤버들이 온다면 플로어 좌석보다 훨씬 더 시야가 좋은 자리였다. 거기다 실질 1열의 좌석이니 멤버들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자리.“저기... 시우 부모님.”“와, 진짜 어머니 너무 미인이시다.”“그치? 누나도 엄청 예쁘더라. 근데 오늘은 안 왔나 봐."덕질 5년 차의 짬바는 내 최애의 가족도 괜히 친근해지는 법."어? 저기 저 사람, 태윤이 여동생 아냐?”“어? 어디?"시은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윤이 가리킨 곳에 태윤의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어어, 맞아. 존나 예쁘지?”“응. 진짜 연예인들은 가족들이 다 장난 없네.”“그러니까. 부럽게.”VIP 초대권의 또 다른 혜택. 멤버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보통 콘서트의 두 번째 날인 토요일, 중콘에 가족들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 하윤과 시은이 앉아 있는 8구역에서 에테르 멤버들의 가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이 즐거워지는 순간들이었다.***"꺄아아아아악!!!"암전과 함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음악의 비트 소리와 함께 VCR의 화면이 재생되었다.또 다시, 에테르 단독 콘서트 [Luminate]의 두 번째 날 공연이 시작되었다.“시우야~~~!”"강태윤!!!"콘서트가 진행될수록 콘서트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
#42 거짓말의 서막“내일 몇 시에 마치는데?”바쁘게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하윤을 보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은 건우가 툭- 물었다. 순간, 하윤의 손짓이 멈칫했다. 가만... 막콘이 몇 시에 끝나더라?막콘의 경우에는 앵콜에서 앵앵콜, 앵앵앵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좀 더 넉넉하게 알리바이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 어느때보다 하윤의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음... 8시... 쯤?”“하, 더럽게 늦네. 데리러 가?”“아냐... 후배가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응, 시은이가 태워 주기로 했어.“어디로 가는데?”아차차!이건 생각을 못 했는데...“어... 그... 우리 회사... 연수원 있잖아.”“아~ 용인에 있는 거?”“아, 응!”다행이었다.아주 스무스하게 잘 넘어갔다.“그럼, 집까지 1시간 정도 걸리겠네? 우리 집으로 바로 올 거지?”“음... 피곤할 것 같은데? 다음 날 출근도 해야 하고...”하윤은 건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첫콘 때 구매한 콘서트 MD 굿즈는 시은이에게 다 맡겨 놓고 온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바리바리 안고 귀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했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할테고 말이다.“내일은 꼭 껴안고 자야지. 아이씨, 연수 개새끼. 월요일에 학교 가서 그 새끼 보이기만 해봐라. 확 대가리 날려 버릴 거야, 씨발.”하윤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는 차건우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그였지만, 두 사람의 2,500일인 일요일, 그녀와 하루 종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차건우의 역린을 살살 건들고 있었다.빠...빨리 가야할 것 같다.“바빠도 중간 중간 연락 자주 해.”“응."시우의 우치와와 네임보드, 스케치북, 또 다른 루미들에게 나눔할 커스텀 미니 굿즈들을 잔뜩 넣은 작은 캐리어를 손에 끌고 건우의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혹시나 건우
#41 사랑의 깊이하윤은 건우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사실, 앵콜곡까지 맛있게 말아줄 에테르의 마지막 모습까지 끝까지 보고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에테르 멤버들이 콘서트장의 1층과 2층 사이의 통로에서 토롯코를 타고 등장하기 직전 빠르게 짐을 꾸려 콘서트 장을 빠져나왔다. 콘서트가 진행된 지 약 3분의 2 지점이 지난 상태였다. 아쉬움이 가득 남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녀는 이성을 부여잡았다.“포장 주문했는데요.”건우의 집 근처의 건우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덮밥 집에 들려, 미리 앱으로 주문한 포장 주문 음식을 받았다. 어쩌면 피곤함에 쩔어 저녁도 굶고 소파나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 6월과 8월의 시험 마지막 날에도 그랬으니까.기왕이면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콘서트를 다 보지도 못하고 나왔음에도 벌써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띠띠띠띠띠띠띡- 띠리리-건우 집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건우가 깨어 있었다면 하윤이 문 따는 소리에 벌써 중문 앞까지 달려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과 함께 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어두움만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거실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놓은 흔적과 탄산수 한 병을 따서 반쯤 마시다만 흔적이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하윤은 그의 흔적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이내 정리를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옷들은 바르게 펴 스타일러에 넣어 기계를 작동 시켰고, 반쯤 남은 탄산수는 싱크대에 버리고 병은 재활용 통에 넣었다.굳게 닫힌 그의 마스터 룸을 힐끔 보고는 좀 더 자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들어가 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건우가 너무 피곤한 탓에 잠에서 깨지 않는다면 게스트 룸에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이고, 건우의 그 잘난 얼굴을 못 보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몸은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윤은 빠르게 욕실
#40 에테르 단독 콘서트 [ Luminate ]“콘서트 퇴근 길도 못 보고 간다고?”채아의 눈이 커졌다.에테르가 데뷔한 이래로 다섯 번째 단독 콘서트였다. 그때마다, 콘서트 기간 3일 내내, 공연을 마치고 퇴근하는 에테르 멤버들과 인사를 하고 가는 것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덕질의 룰이었다.이미 채아를 제외한 직장인 셋은, 반차를 내고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Luminate]가 열리는 [ KSPO DOME ]에 일찍 도착했다. 줄을 서서 콘서트 MD 제품을 구매하고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은 후, 진작에 공원 입구 쪽의 할리스 카페에 앉아 수다를 떨며 콘서트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응. 마치자마자 바로 튀어가야 돼.”하윤이 아쉬워하는 채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미안한 듯, 예쁜 미소를 흘렸다.가끔, 이 언니들은 참 이상했다. 에테르의 덕질에 정말 진심인 것 같으면서도 가끔 현생의 일로 에테르의 우선 순위를 바꿔버리는 기행을 하곤 했다. 빠순이질에 진심인 이들에게 현생의 일 따위는 감히 에테르보다 앞설 수 없는데 말이다.“시은아, 너는 애들이랑 같이 보고 와.”하윤은 시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사실 오늘, 하윤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오늘은 자신의 남자친구인 차건우의 10월 ‘변시 모고’의 마지막 날이지 않은가. 아무리 늦어도 오후 8시쯤에는 그가 집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금요일의 콘서트는 직장인의 퇴근 시간을 고려하여 주말 콘서트보다 늦게 시작하는 이유로 밤 10시가 넘어야 끝날 판이었다.더군다나 토, 일 이틀 간 선행 연구팀의 연수가 있다고 알고 있는 건우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도 억지로 삼키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하윤이 보여준 중콘 티켓 취소 내역을 보며, 콘서트 3일 중 하루라도 재밌게 보고 오라며 저 답지 않게, 에테르의 첫콘을 쿨하게 보내준 그였다.그러니... 이하윤의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냐고.“나, 중간에 나가야 될 수도 있어.”하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