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유환의 멋진 폭탄 발언에 장하늘은 역시 내 애인은 멋지네- 하는 생각이 절로 나왔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원들에게 베풀려던 최우현의 진심이 안쓰러워, 녀석은 제 방식대로 그 짐을 나누어 짊어진 것이었다.
유환이 지닌 마음의 그릇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실감한 순간, 장하늘은 다시 한번 녀석에게 속절없이 반하고 말았다. 멍하니 서 있던 장하늘의 손목을 유환이 낚아채듯 붙잡았다. 녀석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평소보다 훨씬 뜨겁고 절박하게 느껴졌다.
“너, 눈이 너무 충혈됐어. 빨리 가서 쉬어야겠다. 네가 자꾸 신경 쓰여서 제대로 밥도 못 먹겠으니까.”
장하늘은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서둘러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켜서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화가 난 이유가 자신 때문이었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이런.’
화면에 비친 모습은 실핏
순간 유도완과 유준철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히며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유환은 이 찰나의 순간을 위해 발톱을 숨기고 기다려왔다.장하늘이라는 명확한 목표는 그에게 할아버지를 반드시 짓밟고 이겨야 할 잔인한 동기가 되었다. 유준철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유도완의 안색을 살폈다.“도완아, 어쩌면 좋겠느냐.”그때, 미간을 잔뜩 좁힌 유도완이 유환의 옆자리로 바짝 다가앉았다.“전 그 장하늘이라는 녀석이 죽기보다 싫어서 말이죠. 아버지, 저랑 내기하시죠. 그 녀석의 존재를 걸고 말입니다.”유도완의 눈동자에 어린 혐오는 마치 한겨울 호수의 살얼음처럼 투명하고도 날카롭게 빛났다. 유환은 순간 혈관 속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전신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아버지, 지금 제정신으로 하시는 소리예요?”자신의 아버지가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걸고 내기를 제안하다니.장하늘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들겠다는 그 뒤틀린 속내를 마주하자, 유환은 테이블 유리를 주먹으로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그래, 좋다. 내가 이기면 유환이가 그 녀석이랑 딱 1년은 마음껏 만나게 해주는 걸로 하지. 대신 도완이 네가 이기면, 유환이는 그날로 장하늘과 깨끗이 끝내는 거다. 어떠냐?”유준철의 동의가 떨어지는 순간, 유환의 내면에서 무언가 처참하게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차서, 유환은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묵직한 대리석 테이블을 내리쳤다.쿠웅—!거대한 굉음이 한남동 저택의 거실을 날카롭게 울렸다.그러나 유도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우아하게 슈트 재킷을 벗어던졌다.
장하늘은 이제 모든 전생을 일단 하얗게 비운 다음 백지장 위에 다시 그려 넣어야 할 판국이었다.모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인생에 대한 고찰부터 함께 짚어 주었다.조기범은 자신이 최우현을 연모하면서도 그 마음을 억누른 채 다른 여성들과 교제하고 결혼까지 했던 과거를 담담히 고백했다.그러나 결국 오랜 세월 자신을 스토킹해온 여학생의 손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던 사연을 전했다.이어 서정우 역시 ‘묻지 마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던 기억을 털어놓으며, 그 비극을 피하고자 전생에 사당동에 살았지만, 이번 생에는 녹두거리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을 덧붙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유경호 누님과 관련해서 전생에 끔찍한 사고를 겪었더라고. 이건 운명이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면서 절대 잊지 말라고 새겨준 경고 같아.”“그럼··· 그 경고를 미리 알고 조심하기만 하면··· 전생의 비극을 뒤틀 수 있다는 걸까?”장하늘은 희망을 갈구했지만, 이미 네 번의 생을 반복하며 유환의 죽음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는 사실에 지독한 회의감을 느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슴을 에어내는 통증에 말을 잇지 못하던 그때, 서정우가 조기범과 눈빛을 교환하더니 장하늘에게 다시 한번 엄청난 말을 건넸다.“그런데 하늘아, 잠깐만! 유환이가 아주 오래도록 살았던 전생도 분명히 존재했어.”서정우의 목소리가 장하늘의 의식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던 기억을 거칠게 끌어올리자, 장하늘은 잊고 있었던 과거의 환영들을 발작하듯 쏟아내기 시작했다.“그래, 유환이가 야구 선수의 길을 중도에 포기했던 경우였어. S대에 입학하긴 했지만 평범하게 학
장하늘의 고백에도 서정우는 크게 놀라지 않은 채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어쩐지. 전생을 기억하니까 그 어려운 종교학 개론 수업도 들었던 거구나? 윤회나 사후세계 같은 게 궁금할 수밖에 없었겠네.”장하늘은 비로소 두 사람에게 온전히 의지하기로 마음먹고, 켜켜이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전생이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었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시기가 매번 앞당겨져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자신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까지.“그래서 유환이와의 시간이 더 애틋하고 절박해요.”올해 12월 24일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찾아올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지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털어 놓았다. 주기가 일정하게 짧아지는 죽음의 규칙을 설명하는 장하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유환이를 정말 많이 좋아하지만··· 때가 되면 녀석의 곁을 떠날 생각이에요. 그게 서로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믿거든요.”유환이 짊어진 왕관의 무게와 그가 나아가야 할 찬란한 미래에, 자신이라는 어둠이 머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경청하던 서정우와 조기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장하늘의 결단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섣불리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그런 마음까지 먹고 있었구나···.”“12월 24일이라니···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장하늘은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그나마 오래 살았다는 점에 위안을 얻으며, 이번 생만큼은 반드시 궤도를 비틀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이번 생에는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있어요. 제 전생들은 늘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관이 압도적인 한남동 저택의 정원.유환은 이곳에 서서 갑갑한 심정을 억누르며 휴대전화 액정만 무의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곧 돌아올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그의 안색은 밤처럼 어두웠다.터가 세기로 유명하지만, 그 기운을 견디기만 하면 만인을 호령할 왕을 배출한다는 천하의 명당.U그룹의 본가는 대대로 이곳을 지켰다. 그래서인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재벌가의 흔한 스캔들이나 오너 리스크, 권력 결탁의 비리조차 이 집안만은 비껴갔다.완벽한 가문인 대신 그들의 핏줄은 늘 귀하고 단출했다. 수려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 타고난 신체 능력까지 모두 갖춘 유전자였기에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 두었다. 유환 역시 예외는 아니었기에 늘 오만했고, 제 욕망을 포기하거나 타인의 눈치를 보며 의지를 꺾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유환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세운 채 상황을 주시했다. 조기범이 보낸 짧은 문자 한 통이 그를 이 갑갑한 본가로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유환아, 앞으로 장하늘을 위해서라도 네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잘해드려.]뜬금없는 조언이었다. 조기범이 왜 갑자기 장하늘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예전에 장하늘과 따로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마뜩잖았는데, 자신에게까지 참견하는 것이 불쾌했다. 하지만 ‘장하늘을 위해서’라는 전제조건은 유환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였다.마침 본가에서 식사 호출이 왔고, 유환은 장하늘을 만나러 가려던 발길을 돌려 찝찝한 기분으로 한남동에 발을 들였다.그때, 정원의 고요를 깨는 발소리와 함께 유도완 사장이 다가와 유환의 옆에 섰다.“오늘따라 웬 바람이 불었냐. 네가 이리 고분고분하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rdq
그러고 보니 유준철의 눈매는 유환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굳은 의지, 세상을 발아래 두려는 오만함 속에 감춰진 올곧음까지도.“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장하늘 군.”물론 장하늘의 1차 목표는 유환을 살리고 자신도 살아 남는 것이다. 그저 더 행복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그런 답은 낼 수 없었다.노회장의 질문은 진부할 법했지만, 유도완 사장보다 훨씬 영민하고 노련한 유준철은 어려운 대화를 무척이나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었다.“전 유환이가 투수로 완벽하게 재기하면 미련 없이 미국으로 떠날 겁니다. 유도완 사장님께 제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되었을 것이다.그래야 유도완이 더 이상 자신을 해하려다 유환까지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겠지.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장하늘이 선택한 거래였다.“역시 장사치의 집안답게 주고받는 게 확실한 사람이군. 떠나 주겠다니, 고맙네.”자신의 인생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실로 묶여 있음을 알기에, 장하늘은 미리 이별의 무게를 덜어내고자 했다.‘이것으로 12월 24일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첫 번째 생은 교통사고, 두 번째는 화재, 그리고 세 번째는 산사태. 이 모든 비극이 유도완의 치밀한 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장하늘은 유환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녀석의 곁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실은 내 아들 도완이가 장하늘 군을 몹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더군. 노인네 입장에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도 자네처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도완은 장하늘 자신이 유환의 곁에 있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터.장하늘은 다음 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단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오피스텔을 거쳐 학교로 향했다.캠퍼스는 평화로웠다. 텅 빈 그라운드 위는 시합이 마무리될 때까지 훈련 일정조차 잡혀 있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던 장하늘은 도저히 이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다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심란한 마음 탓에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장하늘은 가방 속에 휴대전화를 던져두고 무작정 그라운드로 나섰다. 이럴 때는 몸을 혹사하며 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거칠게 지면을 박차고 개인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몸이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던 건, 아마도 자신의 영혼이 이 처참하고도 어두운 진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었으리라.‘유환의 아버지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해서, 전생에 그 MT 장소까지 직접 설계했던 걸까?’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장하늘의 팔등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때로는 정제된 언어나 꾸며진 행동보다, 날 선 육감이 진실의 본질을 더 정확히 꿰뚫는 법이었다.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느껴졌던 그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식의 소중한 친구를 살해하려 들다니.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악의의 심연은 대체 얼마나 깊단 말인가.장하늘은 끔찍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오로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정신은 이미 현실의 궤도를 이탈해 있었다.바로 그때였다.그라운드 건너편, 정적을 깨고 육중한 검은색 세단 세 대가 연달아 멈춰 섰다. 이 시간에 학교 야구장에 고급 승용차 행렬이라니, 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