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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분명 꿈이었다. 그러나 망막에 맺히는 상은 비정상적일 만큼 선연했다.
뺨을 거칠게 후려치는 빗줄기가 난무하는 불펜 그라운드. 우산조차 포기한 채 대치한 두 남자 사이로, 폐부를 델 듯한 숨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타고 농밀하게 뒤섞였다.
신이 공들여 빚은 듯한 완벽한 비율, 190cm에 달하는 유환의 단단한 체구는 젖은 흑발과 어우러져 야성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빗물을 머금어 번들거리는 그의 근육은 마치 먹잇감을 앞둔 맹수의 그것처럼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팽팽했다.
그 곁에 선 장하늘의 붉은 머리칼 역시 슬림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에 젖어 들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젖은 셔츠 너머로, 잘게 떨리는 하늘의 숨결이 유환의 시선에 적나라하게 박혔다.
“유환아, ······뭐라고?”
“다시 말해줘? 바지 내리고 뒤 돌아. 내 거 받아내라고.”
3월 초의 공기는 뼛속까지 파고들 만큼 시렸으나, 유환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언어는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첫 만남 이후 고작 하루.
찰나 같은 시간 뒤에 떨어진 유환의 요구는 폭력적이었고, 그 파괴적인 언사에 하늘의 목구멍은 경련하듯 꽉 막혀버렸다.
불과 방금 전까지 무구하게 공을 주고받던 동료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포식자의 집요함과 금기된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꿈인가? 그래, 이건 지독한 환각일 거야.’
비에 젖어 몽롱해진 의식, 더그아웃을 메우던 비현실적인 열기. 불펜에서 나누었던 투구의 기억조차 수면 아래로 침잠하듯 아득해졌다. 하지만 꿈이라 치부하기엔 피부에 닿는 빗방울의 감촉과 눈앞의 남자가 뿜어내는 체취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바지를 내리고, 뒤를 돌아, 무엇을 받아내라고?
머릿속을 스치는 노골적인 정사의 장면이 수치심이 되어 전신을 훑었다. 그러나 유환의 표정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네 짐작이 맞다고 선언하듯, 그는 오만하고도 저돌적으로 하늘의 영역을 침범해왔다.
장하늘은 이 사나운 폭언에 짓눌려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평범한 야구 동아리 부원으로 합을 맞추는 건 줄 알았건만, 난데없이 이 차가운 빗속에서 비릿한 정사를 강요받다니.
사건의 발단은 어제였다. S대 야구 동아리 ‘마구마구’의 입부 테스트 직후, 유환의 주도하에 시작된 녹두거리의 술자리. 이긴 자가 진 자를 하루 동안 ‘노예’로 부린다는 그 치기 어린 내기가 화근이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오만한 승부사라 자부해왔다. 학점, 알바, 타석에서의 배팅—그 무엇에서도 패배를 허락지 않았던 그였지만, 오직 알코올 분해 능력만큼은 신이 내린 유일한 결점이었다.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잔을 비운 대가는 처참했다. 유환의 손아귀에 저당 잡힌 하루, 그리고 지금 눈앞에 닥친 이 비릿한 현실.
사실 유환을 인생 3회 차 내내 남몰래 연모해오며, 그의 품에 안기는 상상을 수만 번도 더 했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순간은 달콤한 스킨십이 아닌 서늘한 모멸감이었다. 무엇보다 녀석이 쏟아내는 것이 '욕정'이 아닌 '분노'에 가깝다는 사실이 하늘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유환, 비 오는 거 안 보여? 우리 둘 다 젖었어. 일단 들어가자.”
하늘이 떨리는 음성을 갈무리하며 말했지만, 유환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장하늘, 젖었다니···. 이봐, 사람 홀리는 악마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린가. 압도적인 피지컬과 강건한 신체, 배우보다 유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유환. 재벌가 망나니라는 꼬리표마저 치명적인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그는 존재 자체로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하지만 유환의 진정한 마력은 껍데기가 아닌 그의 '투구'에 있었다. 고막을 찢는 구속과 타자의 자존심을 짓이기는 묵직한 구위. 그가 던지는 공은 타석에 선 자를 실금 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포이자 매혹이었다.
그 공을 건드리지 못한 타자들은 처절한 패배감을 넘어, 자아를 상실한 채 지독한 죄책감의 늪으로 침잠하곤 했다.
‘너 때문에 지옥을 맛본 타자들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인데···.’
그런 악마 같은 녀석이 지금은 장하늘의 이성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건 논리를 벗어난 파멸이었다. 하늘이 받아내야 할 것이 그의 뜨거운 진심이나 묵직한 공이 아니라, 고작 배설물 같은 정액이라니.
“장하늘, 빨리 벗어.”
“너 미쳤어?” “시간 없어. 내 인내심도.” “어제 처음 본 나랑 이러고 싶어? 진심으로?”덥석—! 유환의 커다란 손이 하늘의 멱살을 잡아 낚아챘다. 젖은 천 너머로 서로의 체온이 노골적으로 섞여 들었다. 속눈썹을 타고 내리는 빗물 때문에 눈을 뜨기조차 힘든 지경이었지만, 유환의 의지는 맹목적이고도 거대했다.
장하늘의 사고가 마비되려던 그 순간, 녀석의 손이 하늘의 은밀한 곳을 침범하려다 돌연 멈추었다.
“······.”
내면의 갈등에 휩싸인 듯 유환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오히려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행보를 기다리는 꼴이 되어버린 하늘은 견딜 수 없는 민망함에 휩싸였다.
“유환, 선 넘지 마.”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경고를 날렸다. 사실은 너에게 미친 듯이 반해있다고, 이 굴욕조차 너라면 달콤하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거세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폭풍 같던 대치를 소강상태로 이끌었다. 정적을 깨고 유환이 낮게 읊조렸다.
“그럼 넌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본 거지? 어제오늘, 처음 본 사내놈을 그런 눈으로 훑는 놈이 어디 있어?”
순간, 하늘은 심장이 발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숨길 수 없었던 연심의 흔적을 녀석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제가 야구 광팬이라 모 프로야구 구단 연간 회원이라 야구장을 다니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또 C대학교 투수인 지인 분의 자문을 받아 소설에 녹여내게 되었습니다. 야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강공인 천재 투수와 그림자로 묵묵히 안방마님으로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병약수 천재 포수와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즐겁게 즐겨 주시길요. 그리고 저의 야심찬 신작! [치명적인 거짓말]도 연재 시작했습니다. 전 종로 및 광역수사대에 근무하신 이회림 (드라마 시그널, 더킹, 보이스, 영화 사냥의 시간, 선물 등 시나리오 감수 다수)형사님의 범죄 자문과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송X(아기를 품은 앙큼한 그녀, 닥치고 내게로 와!, 언더커버 스캔들 등 웹소설 다수)의사 선생님의 의학 자문을 받아 내실 있게 구성한 장편 소설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도완은 장하늘 자신이 유환의 곁에 있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터.장하늘은 다음 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단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오피스텔을 거쳐 학교로 향했다.캠퍼스는 평화로웠다. 텅 빈 그라운드 위는 시합이 마무리될 때까지 훈련 일정조차 잡혀 있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라커룸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던 장하늘은 도저히 이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다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심란한 마음 탓에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장하늘은 가방 속에 휴대전화를 던져두고 무작정 그라운드로 나섰다. 이럴 때는 몸을 혹사하며 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거칠게 지면을 박차고 개인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몸이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던 건, 아마도 자신의 영혼이 이 처참하고도 어두운 진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었으리라.‘유환의 아버지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해서, 전생에 그 MT 장소까지 직접 설계했던 걸까?’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장하늘의 팔등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때로는 정제된 언어나 꾸며진 행동보다, 날 선 육감이 진실의 본질을 더 정확히 꿰뚫는 법이었다.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느껴졌던 그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식의 소중한 친구를 살해하려 들다니.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악의의 심연은 대체 얼마나 깊단 말인가.장하늘은 끔찍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오로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정신은 이미 현실의 궤도를 이탈해 있었다.바로 그때였다.그라운드 건너편, 정적을 깨고 육중한 검은색 세단 세 대가 연달아 멈춰 섰다. 이 시간에 학교 야구장에 고급 승용차 행렬이라니, 도무
깊은 어둠이 창밖에 자욱하게 내려앉았다.별빛조차 삼켜버린 도시의 밤은 차가운 유리창에 푸르스름한 막을 드리우고 있었다.유환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욕실에서부터 이어진 격정적인 행위 끝에 찾아온 만족감이 그를 깊은 수면 속으로 몰아넣었으리라.장하늘은 그의 일정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 휴대전화를 챙겼다.테라스로 나선 장하늘은 서울의 불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야경을 응시하며 차가운 생수를 들이켰다. 액정에 비친 얼굴은 잠들지 못한 자 특유의 안색으로 파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조기범 선배님은 아직 깨어 계시겠지······.’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자신과 동일한 기현상을 겪고 있는 조기범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실마리였다. 오늘 병실에서 그가 보여준 간절한 눈빛을 떠올리니, 도저히 이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장하늘은 용기를 내어 메시지를 보냈다.[조기범 선배님, 이제 몸은 좀 어떠신가요? 늦은 시각이라 주무실까 걱정되지만, 안부가 궁금해 연락드립니다.]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읽음’ 표시가 떴다. 곧바로 답신이 도착했다.[오늘 하루가 워낙 소란스러워서 그런지, 도무지 잠이 오질 않네.][저 역시 선배님께서 제게 못다 하신 말씀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여 잠들지 못했습니다.]그 순간, 징―― 하고 휴대전화가 진동하며 정적을 깼다. 발신자는 조기범이었다.장하늘은 마른침을 삼키며 통화 버튼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자신의 인생에서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만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장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유환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하늘은 그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욕조의 투명한 물결을 따라 비누 거품이 흩어졌다. 유환의 뜨거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이 일었지만, 장하늘은 밀려오는 열기를 거부하지 않았다.“뜨거운 물에 몸 좀 풀고 나면 개운해질 거야.”낮은 목소리가 습기 가득한 욕실 벽면에 부딪혀 농밀하게 울렸다. 장하늘은 그 달콤한 명령에 온몸의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굳어 있던 근육 깊숙이 침투했다.“그나저나······ 서진원은 의외네. 조기범 선배님 병실에서 안 보이던데.”아까 겪은 발작의 여파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넌지시 물었다.“멀쩡한 거 확인하자마자 바로 내려갔어. 쿨한 건지, 뜬금 없는 건지.”유환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낮에 보여준 서슬 퍼런 반응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분명 두 사람 사이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장하늘은 감히 그 심연까지 파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조기범 선배님이 무사히 퇴원하셔서 정말 다행이야.”“그러게. 이제 남 걱정은 그만하고, 오로지 우리 둘만 즐길 시간이야.”거울 속에 비친 실루엣은 현실을 초월한 세계의 연인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유환의 커다란 손이 장하늘의 젖은 등을 감싸 안자, 단단한 허벅지가 매끄러운 허리에 노골적으로 밀착되었다.물속에서 은밀하게 팽창한 유환의 욕망이 등에 닿는 순간, 장하늘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숨을 삼켰다.“윽······ 누가 지켜
황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다.죽음의 원인도, 전생의 악연도 모두 맞았다. 직접 손을 대어 목숨을 빼앗은 것은 아니었으나, 조기범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조기범의 시선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본 장하늘은 더 이상 묻는 것이 실례라 판단해 몸을 돌렸다. 그때 마침 유환이 다가오고 있었다.“많이 피곤해?”유환이 장하늘의 안색을 살피며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아니, 유환아. 괜찮아.”“네가 쓰러지면 내가 제일 곤란해지는 거 알잖아.”유환의 손길이 닿은 자리마다 진득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장하늘은 유도완과 얽힌 전생의 악연을 떠올리며, 유환에게만은 이 참혹한 의구심을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감정을 갈무리했다.‘현생에서도 그렇게 야구하는 것을 싫어하는 유환의 아버지였는데.’심장이 하나의 답을 가리키듯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한바탕 소동이 잦아들고, 조기범의 병실을 채웠던 학생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조기범은 병실을 수소문해 준 유환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자신이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 안색이 파리해진 장하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실상 조기범은 이제 몸 상태가 너무도 멀쩡해, 병문안을 온 이들에게 도리어 민망할 지경이었다.“기범아, 짐은 다 챙긴 거지?”“응, 어머니 오시면 바로 퇴원할 수 있어.”조기범의 어머니가 퇴원 수속을 위해 원무과로 향하자, 병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이는 최우현뿐이었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고, 최우현은 가방에서 캔맥주 두 개를 능청스럽게 꺼내 들었다.“자, 멀쩡하게 살아 돌아
조기범의 그림자가 창백한 형광등 불빛을 받아 천장까지 길게 뻗어 나갔지만, 정작 그의 고개는 폭풍을 만난 초목처럼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거구의 어깨가 경련하듯 미세하게 떨렸고, 테이블 밑으로 숨긴 손끝은 축축한 식은땀을 쥐어짜며 시트만 구겨댔다.장하늘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조기범의 눈동자에 고인 짙은 불안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튀어 오르더니, 장하늘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꽂히는 기분이었다.유환은 어느새 몰려든 Y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타인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린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조기범을 응시하자, 그가 치킨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무리를 멍하게 바라보다 경직된 음성을 뱉어냈다.“있잖아, 장하늘. 난 그 스토커가 근처에만 있어도 가슴이 찢길 듯 갑갑해져. 머릿속이 시커먼 공포로 가득 차서,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어.”190cm가 넘는 신장에 100kg은 족히 넘을 법한 당당한 체구의 조기범이, 아이처럼 유약한 목소리로 무섭다 고백했다. 장하늘은 그가 자신이나 서정우와 같은 궤의 고통을 공유하는 회귀자임을 확신하며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 오고,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한 숨 막히는 괴로움인가요?”“맞아! 정확해. 딱 그런 기분이야.”장하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대로 조기범 역시 같은 형벌을 받고 있었다.“실은······ 전생에서도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던 아이였어.”역시, 짐작이 맞았다.“혹시 전생의 악연이었나요?”장하늘의 물음에 조기범은 미간을 좁히며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묵직한 한숨을 끌
상황은 좋지 않았다.오해하기 딱 좋고, 사실 이건 오해도 아니었다. 장하늘은 유환과 사귀고 있으니까 말이다.“아버지, 애 놀라잖아요! 제발 나가세요! 몸이 안 좋아서 부축하는 것뿐이라고요!”“이놈이 아비한테 어디서 소리를 질러!”유도완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켜 올라가자, 장하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환의 옷자락을 파르르 떨며 움켜쥐었다.“저희 지금 나갈게요!”“가긴 어딜 가? 장하늘이라고 했나? 너 몸 관리 똑바로 해! 우리 환이가 너 때문에 너무 진을 빼는 것 같으니까!”병실 안엔 날카로운 고성이 오갔고, 열린 문틈 사이로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깜짝 놀라 힐끔거렸다. 배가 뒤틀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며 정신이 가물거리는 와중에 장하늘은 미칠 것만 같았다.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 기묘한 감각이 장하늘을 스쳤다.이 고통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견뎌낼 수 있는지 본능적인 요령이 생긴 것이다. 장하늘은 숨을 멈추고 유도완의 그림자에서 시선을 완전히 거두었다.마음의 창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듯 생각을 멈추자, 거짓말처럼 저주의 무게가 조금씩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저분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게 확실해. 전생에서도 내가 유환이랑 가까이 지내는 걸 시기해서 압박했던 거야!’고통과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지만, 장하늘은 유환의 옷깃을 생명줄처럼 잡고 흩어지는 정신줄을 다잡았다.살다 보면 본능적으로 사실 싫은 사람, 근처만 와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건 다 전생에 악연이 있어서가 아닐까 묘한 의심이 들었다.유환과 유도완이 실랑이를 벌이는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