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온다연의 뒤에는 건장한 경호원들이 나타났다.한눈에 봐도 굉장히 강하고 전문적인 티가 났기에 남자들은 당황한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가 누군지 알아? 경고하는데 한국인이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거든.”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여기서 사람 때려도 돼요? 강 대표님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겠죠?”경호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장 이곳에서 죽이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습니다.”그러자 온다연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저 인간들이 다시는 누굴 괴롭히지 못하게 불구로 만들어줘요.”“알겠습니다. 사모님.”곧 주차장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조명이 어두워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온다연은 시끄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입 막아버려요.”“알겠습니다.”곧 그들은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바닥에서 꼼짝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앞으로 나서서 그중 한 명을 걷어찼다.“앞으로 또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거예요?”남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아니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온다연은 여전히 싸늘했다.“경찰서로 가서 자수해요. 지금까지 괴롭혔던 사람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털어놓아요. 안 그러면 내가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온다연이 손짓하자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왔다.“저 사람들을 경찰서 입구에 버려줘요.”“알겠습니다.”그 후 온다연은 여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어디 아픈 곳 없어요?”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건 익숙하니까... 고마워요.”온다연은 두통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쩌면 이런 장면이 너무 익숙해 자신이 예전에 겪은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거예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염 대표?”‘염지훈이 왜 여기에 있지?’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비꼬는듯한 어조로 말했다.“레스토랑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새로운 부인과 오붓한 데이트라도 하고 계셨나?”유강후의 시선은 그를 넘어 온다연에게 향했다.온다연도 염지훈을 본 게 분명하다.그녀는 일어나서 가볍게 입을 열었다.“지훈 씨.”부드러운 목소리에 염지훈은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아섰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다연이?”온다연은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맞아요.”염지훈은 시선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물렀고 여전히 이곳에서 온다연을 만나게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정말 다연이야?”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러자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염지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매섭게 노려봤다.“또 그쪽이네요. 어떻게 찾았어요?”유강후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눈에 적의가 번쩍였다.“다연이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염 대표님이 제멋대로 숨겼잖아요. 어떻게 감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지훈은 분노하며 달려들더니 유강후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짐승만도 못한 게 무슨 낯짝으로 다연이를 찾아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넌 다연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유강후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주먹을 맞았다.그러고선 달려드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물러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움직이지 마.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원한이야.”그 말에 경호원들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유강후는 외투를 벗어 차에 던지더니 곧바로 주먹을 날렸고 염지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냈다.두 남자는 실력이 엇비슷해서 싸우기만 하면 목숨을 걸었고 잠깐 사이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온다연은 싸움이 점점 심해지자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곧바로 경호원에게 붙잡혔다.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염지훈은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떠오른 게 아니라면 유 대표랑은...”“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잠깐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요?”그러자 염지훈이 답했다.“나 근처에 사니까 그쪽으로 가자.”염지훈이 지내는 곳은 불과 이곳에서 몇백 미터 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앞장선 염지훈의 뒤에는 온다연이 있었고 유강후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염지훈은 돌아서서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곤 했다.극도로 어색한 분위기나 한참이나 이어졌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과 비슷한 거리를 두었다.별장에 다다르자 염지훈은 유강후를 가로막았다.“그쪽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서...”그러자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염 대표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한 거예요. 잊지 마요.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그쪽이니까.”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염지훈의 손에서는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당장이라도 유강후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였다.“무슨 낯짝으로 다연이의 곁에 있는 거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연이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까요?”“강 대표님이 바꿔치기...”“닥쳐.”분노를 이기지 못한 유강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염지훈의 손목을 잡았다.“상황을 이용한 비열한 놈이 누군데 감히 날 탓해?”“나랑 다연이 사이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우리 둘이 해결할 거야. 너 같은 제 3자가 끼어들 곳은 없어.”제 3자라는 말은 염지훈의 분노 버튼을 눌러버렸다. 결국 그는 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쓰레기 같은 놈. 너랑 네 가족들이 다연이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야.”온다연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린 덕분에 주먹은 유강후에게 떨어지지 않았다.“지훈 씨, 얘기할 생각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염지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저 인간
유강후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꺼져.”가장 소중한 걸 잃은 듯한 괴로운 느낌이 또다시 밀려왔고 그는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경호원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유강후를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눈에 비친 유강후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따로 없었다. 평소 단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래 그룹의 대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이때 유강후가 대뜸 물었다.“두 사람...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저희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선을 지키는 분입니다. 아마 염 대표님과의 약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유강후의 곁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그들은 두 사람이 어떤 풍파를 겪었는지 전부 지켜봤다. 더욱이 지난 3년 동안 유강후가 보낸 힘든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그러기에 그에게 온다연이 어떤 존재인지는 더없이 잘 알고 있다.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편하게 지내지 못할 테니까.그 시각 별장 안.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염지훈은 온다연을 덥석 끌어안았다.온다연은 몸부림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껴안도록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염지훈의 힘은 점점 더 세졌고 마치 그녀를 몸속으로 밀어 넣을 듯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이제 됐어요?”염지훈은 그녀를 놓아주더니 잔뜩 지쳐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아, 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예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염지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왜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염지훈은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계속하여 현실을 부정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질 정도였다.“말도 안 돼. 내가 떠난 지 얼마 됐다고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 심지어 저 사람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어?”온다연
“지훈 씨, 미안해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훈 씨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요. 솔직히 약혼 날짜를 미룰까도 고민해 봤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훈 씨는 그저 저한테 가족이나 오빠 같은 사람...”“듣기 싫으니까 그만해.”염지훈은 거칠게 말을 자르고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 너 진짜 잔인하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널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왜 유강후는 등장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는 건데? 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흔들리냐고. 도대체 왜?”온다연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은 깬 건 그녀가 맞았기에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질책해도 말없이 그걸 견뎌야만 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내 마음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야?”고통을 이기지 못한 염지훈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온다연은 재빨리 그를 말렸다.“지훈 씨, 이러지 마요.”그러자 염지훈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그냥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어? 예전의 온다연은 어디 갔냐고. 돌려내. 돌려내라고.”“내가 아는 말 잘 듣고 착한 온다연은 다른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그런 여자가 아니야.”그는 힘껏 온다연을 밀쳤다.“넌 온다연이 아니야. 나가.”“나가라고.”뒤로 밀려난 온다연은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곧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적시고 나서야 염지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는 온다연을 안아서 소파에 앉힌 뒤 약상자를 찾아와 지혈해 주려고 애썼다.그런데 온다연이 그를 제지했다.“됐어요. 지훈 씨가 더 심하게 다쳤잖아요. 제가 해줄게요.”온다연은 연고와 붕대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피투성이 된 손을
재회가 됐든 다시 사랑에 빠지든, 온다연에게는 돌아갈 길이 없다.마음은 하나뿐이기에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도 단 한 명뿐이다.“감정이 격해진 것 같네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봐요.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얘기해요.”온다연은 붕대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이만 가볼게요. 푹 쉬어요.”염지훈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유강후가 그렇게 좋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을 정도로? 두 사람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긴 해?”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후 그에게 답했다.“지금은 믿고 싶어요.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해도 피할 생각은 없어요. 만약 우리 둘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었다면 하나씩 풀어갈 거예요. 용서할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때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그녀는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우리 둘 사이가 어떻게 되든 제 마음에는 지훈 씨가 없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지훈 씨랑 결혼하는 건 너무 파렴치한 행동이잖아요. 지훈 씨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요.”온다연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레스토랑에서 어떤 여자랑 밥 먹는 걸 봤어요. 그 여자분은 지훈 씨를 많이 좋아해요.”염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뭘 들은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다만 지훈 씨를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애정과 존경은 정확하게 봤어요. 그분은 지훈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염지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 사이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도 없고. 다연아, 내 마음속에는 오직 너뿐이야.”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계속 이러면 더 이상 지훈 씨랑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저도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예요. 당분간 진정하고 괜찮아지면 다시 만나서 얘기해요.”염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유강후한테 가고 싶어? 난 동의 못 해. 강씨 가문으로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경호원이 건넨 약상자를 받아들며 그에게 다가갔다.“여긴 너무 어두워요. 차에서 발라줄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해줘요.”사실 그는 별장의 큰 유리창을 통해 온다연이 염지훈에게 약을 발라주는 걸 목격했다.그는 질투심으로 이미 미쳐가고 있었다.‘염지훈... 분명히 일부러 그런 거야. 보기에는 심각해도 솔직히 얼마 다치지도 않았잖아? 하여튼 꾀병은.’경호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는 유강후를 말리지 않았다면 염지훈은 지금쯤 이미 병원에 누워있었을 것이다.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만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파요.”온다연은 쪼그리고 앉아 다친 부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염지훈이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여러 군데가 파랗게 멍들었고 피부가 벗겨진 곳은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다친 걸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아픈 걸 잘 참는 유강후가 고작 이런 작은 상처에 아프다고 호소하니 온다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난 상처를 조심스럽게 치료해 줬다.“이제 됐으니까 가요. 남은 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의사 선생님한테 처리해 달라고 해요.”유강후가 손을 뻗어 힘을 가하자 온다연은 그의 다리 위에 주저앉았다.곧바로 턱을 잡더니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그는 마치 분노를 표출하듯 온다연을 물어뜯었고 피비린내를 맛보고 나서야 그녀를 풀어주었다.온다연은 찢긴 자신의입술을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미쳤어요?”그러자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도착하자마자 온다연을 차에 앉히더니 문을 닫은 후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화들짝 놀란 그녀는 재빨리 유강후의 손을 붙잡았다.“정말 미쳤어요? 밖이잖아요.”유강후는 전혀 멈추지 않고 계속하여 옷을 찢었다.불과 몇 초 만에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다.온다연은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두 번이나 걷어찼지만 유강후는 이를 무시하고 셔츠를 벗어 그녀에게 입혔다.“나이도 많은 사람이 왜 이렇
강현미를 불러오려던 집사를 온다연이 나서서 말렸다.“별일 아니니까 얘기하지 마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약만 잘 바르면 금방 나을 거예요.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건 괜히 실례일 수도 있어요.”온다연은 도우미들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만 알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물어보면 그냥 넘어져서 다친 거라고 얘기해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아무도 감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온다연은 이제 의심할 여지 없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다. 더군다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유강후의 태도를 지켜봐 왔기에 온다연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 불가능했다.다만 겉보기에 연약해 보이는 온다연이 일 처리할 때만은 매우 냉정하고 단호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게 한편으로는 신기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다가갔다. 그러나 유강후는 고민도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로 내던졌다.부드러운 애무나 키스는 건너뛰고 유강후는 매우 거칠게 그녀를 다뤘다.그들은 신체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기에 아무런 준비동작 없이 이어진 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러나 평소와 달리 유난히 확고한 유강후는 거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온다연은 유강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하여 예전처럼 아프다고 소리치는 게 아닌 오히려 힘을 풀고 자신의 몸을 열어 그를 꽉 껴안았다.전혀 자제하지 않는 유강후 때문에 온다연은 끝내 피를 보고 말았다.어쩔 수 없이 한밤중에 여의사를 불러왔다.의사는 침대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온다연에게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며 최근 며칠 동안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충고했다.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유강후를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그제서야 유강후도 정신을 차렸다.3년 전 온다연을 잃었던 두려움과 무력감이 염지훈이 그녀를 데려간 순간 다시 솟구쳐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