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도대체 왜 이래?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란 말이야. 이러는 게 쪽팔리지도 않아?’죽을 만큼 미웠지만 그의 잘생김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안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온다연은 시선을 거두고 돌아서서 나갔다.이때 유강후가 성큼성큼 쫓아와 그녀를 가로막았다.“유나 씨.”온다연은 돌아서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호텔도 강후 씨가 준비한 거죠?”유강후는 그녀의 질문을 피하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갔었어요?”온다연은 여전히 그를 등지고 있었다.“내가 어디를 가든 강후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이 호텔 주인이면서 왜 모르는 척해? 내가 길 건너편에 있다는 걸 알면서 도대체 왜 또 물어보는 거야?’‘하나도 변하게 없네. 3년 전이랑 똑같아.’‘여전히 강압적이고 언제 어디서든 날 통제하려고 하네.’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유강후는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저녁에는 위험해요. 그러니까 혼자 다니지 말아요. 커피도 임산부한테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마시지 말고요.”온다연은 아까 카페 맞은편에 있던 사복 차림의 두 남자가 떠올랐다. 딱 봐도 경호원처럼 보였고 손이 무의식적으로 가슴에 닿는 게 꼭 무기를 꺼내려는 것 같았다.물론 본인들은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온다연은 단번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챘다.염지훈이 다가왔을 때 그중 한 명이 밖으로 나가서 전화하는 모습에 온다연은 유강후가 보낸 사람이라고 확신했다.이를 생각한 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카페 있었던 두 남자 알죠? 강후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유강후는 몸이 굳어지며 나지막이 말했다.“걱정돼서 그랬어요.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데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어요?”온다연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마음이 안 놓인다고요? 그래서 통제하려고 했어요? 예전처럼 날 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온다연은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아니면 나은별 씨가 여기에 있다는 걸
유강후가 나타나서 수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유강후는 염지훈을 북아메리카로 유인한 후 많은 골치 아픈 일들을 찾아내어 그의 발목을 묶어두었다.아직까지도 그는 유강후만 없었다면 온다연과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감히 내 앞에서 온다연이랑 애정 행각을 해? 보복이 두렵지도 않은가 봐?’서서히 염지훈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일말의 살기가 새어 나왔다.온다연와 유강후는 앞뒤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주차장의 모퉁이 위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차의 전조등이 켜지며 어디선가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뭔가를 예감한 듯 온다연은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전조등이 켜진 채로 질주하는 벤츠를 바라보며 마치 자신이 심연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모든 감각이 느려지고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마치 낡고 오래된 라디오처럼 자동차의 시동 거는 소리가 한없이 길게 느껴졌고 그 소리는 온다연의 모든 신경을 짓밟았다.마침내 그녀는 익숙한 눈을 마주쳤다.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원망 섞인 살기가 가득했고 이제 막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와 다름없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안돼. 안돼...”갑자기 모든 것이 고요해졌고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던 장면은 2배속으로 전환되었다. 곧이어 시동을 건 차 한 대가 유강후를 향해 돌진했다.온다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안돼.”유강후를 껴안은 순간 하얀 불빛이 그녀를 덮쳐 눈을 멀게 했다.온다연이 달려 나올 줄 몰랐던 염지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핸들을 세게 돌렸다.동시에 유강후도 온다연은 안은 채 몸을 돌려 그녀를 옆으로 피신시켰다.우두둑.쿵.날카로운 굉음이 두 번 울린 후, 공기 중에는 브레이크 패드가 타는 불쾌한 소리로 가득했다.벤츠는 옆에 있는 큰 나무를 들이받았고 엄청난 충격으로 사람의 허리만큼 두꺼운 나무가 두 동강이 났다. 나무가 쓰러지며 차량 지붕에 부딪혔고 몇몇 나뭇가지가 앞 유리를 뚫고 나가면서 상황이 매우 참혹
온다연은 염지훈의 손을 꽉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여기 있어요. 구급차 금방 도착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조금만 더 버텨요.”염지훈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너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어...”“무서워하지 마. 난 진짜 괜찮아...”온다연은 눈물을 터뜨렸다.“알아요.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요.”그녀는 구급차가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개를 돌려 입구를 쳐다봤다.“구급차는 왜 아직도 안오는거야...”염지훈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다연아. 가지 마. 날 떠나지 마...”피를 점점 더 많이 흘리며 목소리까지 약해지는 염지훈의 모습에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지훈 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염지훈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있었다.“다연아, 널 조금 더 일찍 알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널 다치게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텐데...”“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꼭...”“그 사람들을 죽일 거야...”...이 유언과 같은 말은 온다연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3년 동안 이성적인 감정은 생기지 않았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며 어느새 염지훈을 가족처럼 여겼다.그런 사람이 피를 잔뜩 흘리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니 온다연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울어도 소용없다. 염지훈의 점점 힘이 빠지며 손이 처지기 시작했다.당황한 온다연은 그의 손을 꽉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펑펑 울었다.“지훈 씨. 죽으면 안 돼요. 제발 정신 차려요.”염지훈은 목소리마저 몹시 약해져 있었다.“다연아, 가지 마. 날 떠나지 마...”눈물이 앞을 가린 온다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안 떠날게요. 그러니까 죽지 마요.”염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손마저 축 늘어졌다.“지훈 씨!”“염지훈!”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심지어 가슴마저 움직임을 멈춘듯했
온다연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싫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자리를 비우면 안 되죠. 만약 정말 지훈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부모님이랑 박씨 가문을 볼 면목이 없어요.”염지훈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유강후의 옷깃을 잡았다.“잘못되는 건 아니겠죠?”유강후는 그녀를 안아서 의자에 앉힌 다음 부드럽게 말했다.“별일 없을 거예요. 제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의사를 모셔 왔거든요. 곧 도착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꼭 살려내야 해요. 절대 죽으면 안 돼요. 강후 씨, 제발 살려줘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괜찮을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나 못 믿어요?”온다연은 피투성이가 되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염지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죽으면 안 돼... 절대 안 돼...”“만약 지훈 씨가 죽으면 난 평생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거예요.”제정신 아닌 그녀의 모습은 유강후를 걱정하게 했다.그는 간호사에게 푹신한 의자와 따뜻한 물과 우유를 부탁했다.온다연은 배가 조금 불편했지만 염지훈이 잘못될까 봐 걱정되어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따뜻한 물을 마시고 푹신한 의자에 웅크리고 앉으니 그나마 안정되었다.하지만 온몸의 신경은 여전히 곤두선 상태였고 한시도 수술실을 떠나지 못했다.이따금 혈액 주머니가 수술실로 이송되었다.그럴 때마다 온다연은 긴장했고 너무 초조한 나머지 의자를 마구 뜯었다.다행히 이때 유강후가 모셔 온 의사가 도착했다.그는 40세 정도의 백인 의사인데 딱 봐도 경험이 많은 노련한 분위기를 풍겼다.유강후와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의사는 옷을 갈아입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그가 수술실로 향하는 걸 본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저분은 북아메리카 최고의 외과 의사이자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전문가예요. 그러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요. 지금까지 목숨이
임신한 상태에서 잔뜩 지쳐있으니 온다연은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그럼에도 익숙한 숨결이 느껴지자 다른 한 손은 자연스레 유강후의 허리를 감쌌다.유강후는 조금 위안을 얻은 듯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자. 뱃속에 있는 아이들도 널 걱정하고 있을 거야.”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온다연의 옆에 누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렇게 날이 밝아질 무렵 이권이 달려왔다.“도련님, 수술이 끝났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온다연은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어떻게 됐어요?”이권의 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맨발로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이권은 화가 난 유강후를 보고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기분이 몹시 불쾌했지만 유강후도 마지못해 온다연의 뒤를 따랐다.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마침 수술실에서 나오는 염지훈을 마주하게 되었다.그는 인공호흡기와 산소통을 달고 있었고 얼굴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창백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마치 생명의 끝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때 유강후도 도착했다.의사는 간호사에게 염지훈을 중환자실로 이송하라고 한 후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나뭇가지가 가슴을 찔렀어요. 다행히 심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폐를 약간 다쳤어요. 다른 내장에도 미세한 출혈이 있고 갈비뼈 대여섯 군데가 골절되는 등 상황이 많이 안 좋아요.”“앞으로의 72시간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시간 동안 복강 감염이 발생하지 않으면 위험한 시기를 넘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온다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 못했고 유강후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의사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떠났다.긴 복도는 쥐 죽은 듯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온다연은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어젯밤 내내 꾼 꿈들이 다시 떠올랐다.염지훈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녀의 앞에 서서 왜 배신했냐며, 왜 조금의 사랑도 주
온다연은 주먹을 천천히 풀며 가볍게 말했다.“믿을게요. 하지만 설령 강후 씨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모든 일이 나은별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어서 일어난 건 변함없어요. 그리고 난 강후 씨가 나은별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게 어떤 감정이든.”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다연은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들에게 걷어차여 갈비뼈 몇 개가 부러졌고 폐까지 망가졌어요.”“폭탄이 터졌을 때, 파편들이 내 몸을 찌르고 피부를 베는 그 느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바다에 떠다니며 숨을 끊기기 직전 강후 씨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했어요. 그러고선 하느님에 빌었죠.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강후 씨를 만나지 않겠다고.”“그 후로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었어요. 폐가 심각하게 감염되어 여러 번 죽을 뻔했어요.”“혼수상태에 빠진 보름 동안 계속 반복되는 꿈을 꿨어요. 강후 씨가 날 김원도에게 밀어 넣고 날 해변으로 데려가 죽게 만들었다는 꿈.”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유강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그는 온다연이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때 얼마나 아프고 절박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고통을 직접 말하는 걸 들으니 귀가 먹먹해졌고 심장에 큰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숨이 막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특히 온다연이 차분한 말투로 말하는 건 그녀가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왔다.유강후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미안해요...”“내 말 끝까지 들어요.”온다연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강후 씨가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은별과 나를 바꾸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강후 씨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용서할 수 없어요. 감당하지 못 할 고통을 겪었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강후 씨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유강후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알아요.”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유씨 가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들은 날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생
온다연이 원하는 처벌이라면 뭐가 됐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설령 감옥에 보낸다 한들 불평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온다연은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그 인간들은 주한을 해친 것도 모자라 죽기 전에 찍은 영상을 자랑거리로 삼았어요. 짐승만도 못한 것들은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어요.”“도대체 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거죠? 주한은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야 해요.”“강후 씨의 가족이잖아요. 큰형이랑 조카. 가족이니까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지만 나한테는 짐승에 불과한 인간들이에요. 이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는 쓰레기.”“강후 씨, 나 너무 힘들어요.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게 너무 많고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헤어...”“온다연.”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주먹을 꽉 쥐었다.“그 인간들은 쉽게 죽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살려둔 거예요. 이제 결정해요. 어떻게 처리할 건지. 내가 도울게요.”유강후는 목소리마저 떨었다.“그러니까 제발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아줘요.”온다연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견뎌냈고 이미 지쳐있었다.유강후와의 모든 것을 끝낼 준비가 된 건 아니다. 하지만 지난날 자신이 겪은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그를 용서한다면 부모님에게도 미안하고 죽은 주한에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말끝을 흐렸으나 무슨 말을 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극단적인 사랑과 증오가 서로 뒤엉켜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몇 번 심호흡하고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유강후가 갑자기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하지 마요. 제발 그 말만큼은 하지 마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유강후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얼굴에는 전에 없던 연약함과 슬픔이 가득했다. 그는 간절하게 온다연에게 애원하고 있었다.“고칠게요. 내가 다 만회할 테니까 제발 그 말은 하지 말아요. 진짜 무너질지도 몰라요.”온다연은 가슴이
유강후도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그 인간들은 원하는 대로 처리해도 상관없어요. 난 절대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눈빛의 차가움을 감추며 차분하게 말했다.“가만둘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강후 씨가 내 곁에 있거나 나를 도와 무슨 일을 한다면 그게 뭐가 됐든 강후 씨에게는 유씨 가문의 배신자나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예요.”“우리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지금은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강후 씨가 내 앞에 서 있으면 더 극단적인 말밖에 안 나와요. 솔직히 지훈 씨가 저렇게 된 것도 박씨 가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진씨 가문과 박씨 가문은 대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우린 현재 약혼을 약속한 사이예요. 만약 집안 사람들이 지훈 씨가 다친 걸 알게 된다면 두 가문 사이의 관계도 망가질 거예요.”“게다가 우린 많은 비즈니스 협력을 함께 하고 있어요. 이러한 협력이 종료되면 두 가문 모두 큰 손실을 입게 될 거예요. 어쨌든 제가 먼저 계약을 파기했고, 지훈 씨가 다친 상황에서는 돌봐줘야 하는 게 맞아요. 적어도 건강을 회복해야 다른 일이라도 논의하죠.”유강후의 눈에는 짙은 고통과 슬픔이 번쩍였다. 가슴이 찢어질 듯 숨이 막혔고 온다연을 잃을 것 같은 불안함이 밀려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우린 결혼한 사이예요. 혼인신고서도 있다고요. 그러니까 염지훈이랑 약속한 건 무효라고 생각해도 돼요.”“아니요.”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다.“틀렸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온다연은 이미 죽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난 진씨 가문의 장녀 진유나로 살고 있어요. 예전의 정체성은 완전히 지워진 셈이죠.”“그러니까 혼인신고는 무효예요. 강후 씨가 나에 대한 모든 걸 지운 덕분에 살아있었다는 증명조차 사라졌어요. 설령 우리가 혼인 신고를 했더라도 이제는 소용이 없는 거죠.”“그럴 리가 없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