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침을 놓은 후, 곽혜진은 검은색 알약을 안심에게 건네며 온다연에게 먹이라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이 깨어났다. 그녀는 곽혜진을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았다.“곽 박사님...”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고, 차마 묻지도 못했다.곽혜진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유 대표님은 아직 살아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 한, 최소한 50%의 생존 확률이 있어요. 그러니 지금 유나 씨에게 중요한 건 아이를 지키는 거예요.”초췌한 얼굴과 짙은 다크서클, 온다연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생기를 잃은 모습이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강후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기절했다.곽혜진의 등장은 그런 그녀에게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주었다.그녀는 극도의 심적 고통을 억누르며 간청하듯 말했다.“곽 박사님, 제발 그 사람을 살려주세요.”곽혜진이 대답했다.“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게요.”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조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박사님, 유 대표님이 또 상태가 안 좋아지며 심정지가 왔습니다.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곽혜진은 즉시 자리를 떴다.온다연도 따라가려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목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더니 입에서 피가 뿜어 나왔고, 곧이어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또다시 기절하고 말았다.깜짝 놀란 안심은 달려가 딸을 안고 엉엉 울었다.곽혜진이 뒤를 돌아보더니 조수에게 말했다.“유나 씨한테 안정제를 주사해. 양을 최대로 해서 하루 종일 자게 하는 게 좋겠어. 아니면 오늘 하루를 견디기 힘들 거야.”“우리가 최근에 개발한 신약을 사용해. 여기에 없다면 즉석에서 배합하도록 하고. 얼른 가.”“네.”곽혜진은 재빨리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뒤로 강씨 가문 사람들은 하루 종일 수술실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곽혜진도 수술실을 떠난 적이 없었다.유강후는 사실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중간에 여러 번 심정지
곽혜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어제 응급 처치할 때 은침에 해룡의 피를 묻혔었어. 4시간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았다는 건 해룡의 피와 내 피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괜찮아.”그러자 조수가 말을 이었다.“박사님 피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거잖아요. 암시장에서는 박사님 피가 십수억에 거래되고 있다는데, 지금 200cc나 뽑으셨으니 유 대표님께서 깨어나시면 정확히 계산해야 합니다.”곽혜진이 웃으며 말했다.“자식, 계산에 밝네. 감히 내 피를 가지고 장사를 하겠다고?”“그럼요. 염 대표님은 우리 실험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도 투자하지 못하게 막잖아요. 돈이 이렇게 부족한데, 당연히 한 푼이라도 챙겨야죠.”곽혜진이 말을 이었다.“돈은 작은 문제야. 유강후가 해룡의 피와 내 피를 모두 받아들이면 앞으로 피를 공급하는 개체가 될 수 있잖아. 그러면 나는 해방되는 거지.”조수가 해맑게 웃었다.“그러네요. 유 대표님이 완쾌한 후 이 소식을 퍼뜨리면, 사람들이 더 이상 피를 달라고 우리를 쫓아다니지 않고 유 대표님을 쫓아다니게 되겠네요.”“드디어 이해했구나. 내 가르침이 헛되진 않았네.”...처음 수혈할 때, 유강후는 약간의 거부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두 번째는 훨씬 나아졌고, 세 번째 수혈이 끝난 후에는 더 이상 심정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상태가 안정된 셈이다.모두가 안도감을 느꼈지만,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사흘째 되는 날에는 상황이 더욱 좋아져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기뻐서 곽혜진에게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하루 종일 잠을 자고 깨어난 온다연은 이 소식을 듣고 겨우 심신이 안정됐다.곽혜진이 또 한 번 침을 놓은 후 유산 징후도 거의 사라졌다.이때쯤 유강후가 중상을 입고 거의 죽게 됐다는 소문이 불거졌다.언론들은 우주그룹이 새로운 수장을 맞이할 것으로 추측하며 강씨 방계혈족 실권자들을 비교 분석했다.심지어 유강후가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
이 몇 개 그룹은 개별적으로는 미래그룹과 비교가 안 됐지만 합치면 미래그룹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거기에 동남아시아의 대진그룹과 H국의 하나그룹, 봉씨 가문까지 합세하면서 미래그룹의 주가는 순식간에 급등했다.보름도 채 되지 않아 주가는 사건 전의 수준으로 회복됐고, 그 후에도 계속 상승세를 이어갔다.당시 주식을 팔아버린 사람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미래그룹의 주가가 계속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미래그룹 본사 회의실.온다연이 대표 자리에 앉아 서류들을 바닥에 내던졌다.그녀의 앞에는 미래그룹의 전직 임원 수십 명이 서 있었다.한때 유강후의 신뢰를 받았던 이들은 딴마음을 품고 미래그룹에서 일하면서 중요한 기업 정보를 경쟁사에 팔아넘기고 있었다.그들은 한 달 전에 휘청이던 회사가 다시 활기를 찾고 일사불란하게 돌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 배신자들의 앞에 던져진 서류는 그들이 미래그룹을 팔아먹은 증거들이었다.“이건 최근 한 달간 당신들이 경쟁사에 회사 정보를 팔아넘긴 증거와 대가로 돈을 받은 송금 기록이에요.”온다연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당신들은 미래그룹에서 오래 근무했고 그룹의 성장을 함께한, 강후 씨가 가장 신뢰했던 부하들이었어요. 강후 씨는 당신들에게 최대한의 신뢰와 권한을 줬는데, 당신들은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오히려 돌을 던졌어요.”“미래그룹 법무팀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어요.”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높은 자리에 오른 그들은 세상 물정을 알 만큼 알기에 자기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고 감옥살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반발하는 사람이 있었다.“온다연 씨에게 그런 권한이 없어요. 이게 사실이라 해도 유 대표님이 우리의 거취를 결정해야지, 그쪽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요. 온다연 씨는 유 대표님의 약혼녀일 뿐이에요. 진씨 가문의 따님이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여기 미래그룹에서 주인 행세를 할 수는 없어요.”온다연이 코웃음을 치
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본 강현미는 주스를 따라주라고 비서에게 시켰다.“수고했어. 그 배신자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온다연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한 달 동안 편히 지내게 둔 게 아깝네요.”“역시 너의 아이디어가 좋았어. 한 달간 가만둬서 미래그룹 주가가 바닥을 친 후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리주를 모두 회수한 덕분에 오늘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어.”“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낸 거예요. 저는 그저 실행만 했을 뿐이에요.”“너희가 4년 전에 혼인신고를 해서 다행이야. 이 혼인관계증명서가 없었다면 강후가 가진 것들이 사분오열됐을 거야.”온다연은 혼인신고 후에 찍은 기념사진을 손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4년 전의 그녀는 아직 어려 보였고, 흰색 셔츠를 입은 모습이 마치 고등학생 같았다.이때까지도 유강후의 옆에서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이때 그들은 사이가 좋았고, 그녀는 자기가 원해서 유강후 곁에 있었으며 유강후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어 했다.하지만 이 사진을 찍은 지 얼마 안 돼서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게다가 그녀는 혼인관계증명서도 찢어버렸던 기억이 있다.그럼 이건 유강후가 후에 다시 발급받은 것인가?하지만 전혀 새것 같지 않았다. 모서리도 말려 있고, 사진도 낡아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수천 번 만진 것처럼.온다연은 사진과 혼인관계증명서를 어루만지며 유강후는 이것을 만질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했다. 지금 그녀의 마음과 똑같았을 것이다.그녀의 넋 나간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미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곽 박사님 말로는, 큰 문제 없대. 다만 너무 심하게 다쳐서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고, 그런 피를 받았으니 적응하고 신체 기능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나 봐.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깨어날 거야.”“그동안 너무 지쳤어. 이번 기회에 쉬는 거라고 생각해.”온다연은 사진 속의 유강후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3년 동안 강후 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현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나지막이 물었다.“지금도 입덧이 심해? 장 집사 말로는 요 며칠 더 심해졌다던데.”온다연은 혼인관계증명서와 사진을 가방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괜찮아요. 장 집사님이 매일 새로운 메뉴로 식사를 준비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죠.”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미래 그룹은 당분간 어머님께서 많이 신경 쓰셔야겠어요. 나온 지 오래돼서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병원에 도착하니 염지훈이 와 있었다.그 역시 방금 퇴원했지만 유강후가 입은 부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한 달 만에 만난 염지훈은 회복이 잘 된 듯했다. 그는 온다연을 보자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온다연은 코트 속에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재질 때문에 배 부분이 약간 도드라져 보였다. 염지훈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배가 나오기 시작했어? 몇 개월 됐어?”온다연이 대답했다.“3개월이 거의 됐어요. 쌍둥이라 보통 사람들보다 배가 더 빨리 커져요.”염지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미래 그룹은 이제 정상화된 것 같더구나. 원래 두 달 더 머물며 도와주려 했는데, 이제 필요 없을 것 같다. 내일 동남아시아로 돌아가려고.”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몇 시에 출발해요? 배웅하러 갈게요.”그녀는 말하면서 유강후의 침대 높이를 조절하려고 허리를 굽혔다. 염지훈이 얼른 그녀를 도와주며 말했다.“이런 일은 비서에게 시켜.”“강후 씨는 낯선 사람이 접근하는 걸 싫어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물건을 만지는 것도 싫어해요. 제가 하는 게 나아요.”그녀는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유강후의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머리가 좀 기네요. 이따가 미용사를 불러 다듬어야겠어요. 안 그러면 깨어나서 머리 스타일이 망가졌다고 화낼 거예요.”그러고는 또 유강후의 손을 잡고 꼼꼼히 닦아주었다.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주변에 사람들
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염지훈이 문득 물었다.“너는 언제 H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야?”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강후 씨가 깨어나면 그 사람과 상의한 후에 결정할 거예요.”염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한 번 다녀와야 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그때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과거의 일은...”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염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유씨 가문에 복수하든 용서하든 나는 항상 네 편이야.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온다연이 말했다.“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강후 씨가 빨리 깨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염지훈은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유강후를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유강후와의 경쟁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것 같았다.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 누워 있는 지금도 온다연의 마음속에는 그밖에 없었다.염지훈이 나지막이 물었다.“다연아, 유강후가 정말 그렇게 좋아?”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말했다.“지훈 씨,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요?”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염지훈은 잠자코 있었다.들을 용기가 없었지만 듣고 싶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폈다.그동안 살이 빠져서인지 이목구비가 더 뚜렷하고 준수해 보였지만 원래 남성미 넘치던 얼굴에 약간의 우울함이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죄책감에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어린 소녀가 열 살 때 이모를 따라 명문가에 들어갔어요. 들어간 첫날, 소녀는 호화로운 홀에 서서 열등감에 고개도 들지 못했죠.”“그때 열여덟 살의 소년이 소녀를 도와줬어요. 감사한 마음이 든 소녀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죠. 하지만 소녀는 신분이 너무 존귀하고 잘생긴 소년을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새 소녀의 눈은 그
염지훈이 대답했다.“그건 예진 씨가 나를 돌봐준 대가야. 우리 둘 사이에 다른 일도 있었어. 보상이라고 생각해. 돈 말고는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권씨 집안에서 힘들게 지내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야.”“예진 씨가 권씨 가문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요.”“알아. 하지만 그건 남의 집안일이라 참견하기 좀 그래. 돈이 필요하면 줄 수 있지만 다른 일은 나도 방법이 없어.”이쯤 되자 온다연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두 사람이 한참 다른 얘기를 나누다가 염지훈이 떠나갔다.이때 날이 저물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유강후의 몸을 금빛으로 물들였다.그는 마치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온다연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또렷한 얼굴선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내가 말한 적이 있나요? 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이라고.”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하지만 당신은 눈을 뜨고 있을 때가 더 보기 좋아요. 지금처럼 약해 보이는 모습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빨리 눈을 떠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 깨어나면 아쉬움이 남을 거예요.”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자기 배에 올려놓았다.“만져봐요. 벌써 배가 나왔어요. 이제 예쁜 원피스도 입을 수 없어요. 엄마가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인가 봐요.”“나 혼자 버티기 힘들어요. 계속 이러고 있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저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고 지친 그녀는 그의 곁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유강후의 손은 온다연의 허리에 올려져 있었다. 그 모습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잤던 평범한 어느 날 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3개월 후, 미래그룹 본사 대표 사무실.요 며칠 강현미가 유럽에 출장 가서 사무실에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게다가 중요한 국제회의도 예정돼 있어서 온다연은 하루 종일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이때 북아메리카는 이미 겨울이었다.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저
유강후는 그녀를 꼭 껴안고 머리카락에 키스를 퍼부었다.“미안해. 내가 너무 오래 잤어.”온다연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그동안의 모든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서러움, 슬픔, 그리고 남자에 대한 약간의 원망까지 모두 터져 나왔다.그녀는 돌아서서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그는 그녀가 손을 휘두르는 대로 내버려뒀고, 그녀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미안해. 미안해...”그는 울고 있는 온다연을 끌어안았다.“왜 이렇게 오래 잤어요? 왜? 저 혼자 너무 힘들고 무서웠어요...”“나쁜 놈, 영원히 나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또 약속을 어겼어요...”“그리고 망할 놈의 회사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았어요. 저는 회사 관리에 관심도 없는데, 매일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와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그녀는 너무 속상한 듯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푸념을 들어주었다.그녀는 한참 울다가 지쳤는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기대며 울먹였다.“벌써 임신 5개월 차가 되어 태동을 느낄 수 있어요. 이제야 깨어난 건 너무 무책임해요. 한번 만져봐요.”유강후는 볼록하게 나온 그녀의 배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아쉽게도 태동을 느끼지 못했다.온다연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너무 꽉 안았어요. 좀 놔봐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아서 의자에 앉혔다.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얼굴을 그녀의 배에 대고 조용히 그 속의 작은 생명을 느껴보았다.그 동작은 한없이 부드럽고 경건해 마치 가장 확고한 신앙을 확인하는 듯했다.5개월이 넘었다. 그는 너무 오래 잤고, 깨어나니 그녀의 배가 이렇게 불러 있다.정말 아쉽다. 매일 그녀의 곁에 있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많은 날을 놓치고 말았다.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은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그는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그 속의 작은 생명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그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