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어두운 골목.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온다연은 골목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갑자기 누군가에게 잡아당겨져 어두운 구석으로 끌려 들어갔다.벽 앞에는 술 냄새를 풍기는 취한 남자 두 명이 서 있었고 그들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찢기 시작했다.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와 남자들의 거친 움직임에 온다연은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그들 중 한 남자는 즉시 온다연의 뺨을 세게 때렸다.“감히 소리쳐? 뭘 잘했다고 소리치는 거야!”“오늘 네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가만히 있어. 이 오빠가 기쁘게 해줄 테니까.”...이때 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골목을 가로질러 왔고 차창이 천천히 내리자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나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 행위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옆에 있는 운전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나가서 말릴까요?”도련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가!”이때 온다연은 이미 옷이 찢어진 상태였고 갑자기 나타난 차량 때문에 그녀는 더욱 몸부림쳤다.“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술 취한 남자는 온다연에게 아직도 도움을 청할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두 번 더 때렸다. 또한 온다연의 몸을 잡고 있는 손에도 더욱 힘을 주어 치마를 벗기려고 했다.온다연이 절망하려고 할 때 이미 시동을 걸었던 차가 갑자기 멈췄다.그리고 차 문이 열리더니 키 큰 남자 두 명이 내려왔다.앞에 선 남자는 마른 체격에 브랜드 로고가 없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차갑고 위엄이 있어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것 같았다.그는 구석에서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온다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불빛이 너무 어두워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낮은 울음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남자의 기억 속 목소리와 다소 비슷했다.남자는 차갑고
그때도 지금과 같은 매미가 울어대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소녀의 수줍은 눈빛과 땀에 젖은 옆머리가 그날 오후와 겹쳐졌다.그 모습이 지난 3년 동안 매일 밤 꿈속으로 들어와 밤마다 유강후를 뒤흔들었다.유강후는 방금 온다연의 손길이 닿은 곳이 화끈거려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 순간 공기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유강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여전히 차갑고 고상한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온다연은 즉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사면받은 사람처럼 도망치듯 떠났다. 물론 온다연은 차에 탄 유강후의 맹수 같은 약탈적인 눈빛을 보지 못했다.온다연은 유씨 가문 저택에 들어선 후에야 유씨 가문 식구들뿐만 아니라 유강후의 옛 친구들도 모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 도련님들은 모두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중에서도 최고였다.온다연은 전에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여러 번 목격했었기 때문에 그들을 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하지만 안주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심미진은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다.“나 시간 없으니까 네가 이 술을 네 작은 삼촌에게 갖다줘.”온다연은 거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은 화려했고 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온다연은 가시 장미에 섞인 새하얀 장미처럼 눈길을 사로잡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온다연의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매력적인 골격,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특히 하늘색 치마 밑의 하얀 피부는 사람을 유혹할 정도로 하얗게 빛났다.잠시 동안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도련님, 유씨 가문의 양딸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그새 잘 자랐네요.”유강후 역시 온다연이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든 와인잔을 흔들었다.“몇 년 동안 유씨 집안에서 먹여준 건 맞지만 양딸이라고 할 순
온다연은 고개를 숙였다. 마치 사나운 짐승에게 겨냥당한 듯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문에 한껏 기대어 최대한 유강후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하지만 유강후는 바로 앞에 있고 공간이 좁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유강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꼈다.맑은 솔방울 같은 냄새에 은은한 술 냄새가 섞여 온다연의 피부에 다가왔다. 그러자 온다연은 갑자기 3년 전의 점심에도 이렇게 더웠는데 술에 취한 유강후가 방에 쳐들어와 통제를 잃고 폭력적으로 행동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혼란스러워서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유강후와의 거리를 벌렸다.하지만 너무 가까운 탓에 유강후의 옆을 지나가려 할 때 온다연의 팔은 유강후의 손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닿은 곳은 살짝 화끈거리며 유강후의 기운이 남았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 저택은 학교에서 너무 멀어서 기숙사에 살고 있어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낮아서 유강후는 그녀를 혼내고 싶었다.게다가 이 3년 동안 거짓말하는 것도 배웠다니.하지만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까발릴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는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내 번호 차단했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번호 바꿨어요. 예전에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나서 모든 번호가 사라졌거든요.”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유씨 가문 사람들 중 이모 심미진의 번호만 저장했다.“휴대폰 줘 봐.”온다연은 순순히 휴대폰을 건넸다.살짝 낡은 휴대폰이었는데 스크린은 손상된 정도가 심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자신의 휴대폰으로도 온다연의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해 추가했다.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는...”“알아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말을 잘랐다.“그분들 다 삼촌 친구들이잖아요. 농담한 거 알아요. 괜찮아요.”온다연은 유씨 가문에 오래 머물지 않기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유민준을 밀어냈다.“오빠, 정신 차려요.”유민준은 표정이 변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온다연, 순진한 척하지 마. 너랑 네 그 빌붙으려는 이모가 뭐가 달라?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절해? 그럼 설마 더 대단한 걸 바라는 거야?”온다연은 표정이 바뀌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유씨 가문이 넘볼 수 없는 대단한 집안이란 거 알아요. 당신들한테 빌붙을 생각도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바뀌자 유민준은 답답한 듯 머리를 쥐어뜯으며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그런 뜻 아니야. 나랑 만나면 명분 주는 것 외에 다른 건 다 줄 수 있어. 예전에 내가 지나쳤던 거 맞아. 내가 하령이 시켜서 널 괴롭혔던 것도 인정할게. 그런데 다 지난 일이잖아. 앞으로 내가 배로 잘해줄게. 다연아, 너 나 좋아하지...”유민준이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자 온다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오빠 틀렸어요. 나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온다연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난 유씨 가문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요. 조금도 없다고요.”유강후는 그 말을 듣고 창문에 올려놨던 손을 멈칫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유민준은 그 말에 화가 났다.“나한테 관심 없다고? 그놈 때문이야?”유민준은 주머니에서 사진 여러 장을 꺼내 온다연의 얼굴에 던지며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너 이놈 좋아하지?”사진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불빛이 어두웠지만 온다연은 사진 속 남자가 그녀의 동기 진태윤이라는 것을 보아냈다. 요즘 인턴십 때문에 온다연은 진태윤과 가까워졌는데 유민준이 그들의 사진을 찍을 줄은 몰랐다.바닥에 널브러진 사진들을 보고 온다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씨 가문이 대단한 건 아는데요. 제 학교 친구들은 건드리지 마요. 태윤이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 태윤이 안 좋아해요.”유민준은 손을 뻗어 온다연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내려다보
그 남자는 바로 유강후였다.유강후는 고급 소재의 흰 셔츠에 긴 다리를 감싸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차갑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은 채 길에 서서 눈길을 끌었다.그의 옆에 있는 여자는 하얀색 명품 정장을 입었는데 몸매의 볼륨감이 잘 드러났다. 맑고 귀여운 외모에 눈웃음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두 사람은 무슨 말을 했는지 곧 여자는 유강후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두 사람이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본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책을 얼굴에서 떼어냈다.하지만 이때 유강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멀리서부터 안도연을 바라보았다.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다연은 유강후의 눈빛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꼈고 순간 머리가 질끈거리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유강후는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온다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상현 씨, 미안해요. 저 볼일 있어서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강상현이 말도 하기 전에 온다연은 이미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본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강후와 그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온다연은 몸을 곧추세우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할 수 없이 외쳤다.“삼촌!”유강후은 시선을 온다연이 입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원피스로 옮겼다가 아픈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친구랑 여기서 켜피 마신 거야?”“강후 씨, 누구야? 왜 강후 씨를 삼촌이라고 불러?”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우리 형수님의 조카야.”여자는 놀란 듯 온다연을 훑으며 말했다.“강후 씨가 말했던 그 조카군요. 언제 이렇게 많이 컸어요?”여자는 손을 내밀어 온다연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반가워요. 저는 강후 씨 친구 나은별이에요.”사실 나은별이 자기 소개하지 않아도 온다연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전에 유씨 가문에서 나은별을 여러 번 몰
위험한 분위기가 조금씩 다가오자 온다연은 공기가 질식하는 냄새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가슴이 답답해서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키 큰 유강후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온다연의 몸에 곧 닿을 것 같았다.온다연은 옆에 있는 녹슨 수도관을 꼭 붙잡고 눈을 내리깐 채 감히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빨개진 것을 가렸고 매혹적인 입술만 보일 뿐이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반쯤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그의 어조는 더 차가워졌다.“누구를 피하고 싶어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거야?”유강후는 아주 가까이 다가왔고 큰 몸으로 온다연을 가리자 마치 커다란 그물에 걸린 듯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너무 가까이서 압박을 주는 바람에 온몸에 힘이 풀려 다리를 주체할 수 없이 떨기 시작했고 머리도 너무 어지러웠다.“말해!”온다연은 입을 뻐끔거렸다.“삼촌, 저...”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몸이 앞쪽으로 쓰러졌다.기절한 건가?유강후는 쓰러진 온다연을 두 팔로 감쌌고 그제야 그녀의 체온이 무서울 정도로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고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안아 들었다.온다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가 깜깜하고 빛이 전혀 없었다.당연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고 생각한 온다연은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가죽의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부드럽고 딱딱한 무언가를 만졌다.소파인가? 아니면 의자?갑자기 어두운 불빛이 온다연의 머리 위로 비추면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일어났어?”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차가운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그 어둠은 그녀를 휩쓸어버릴 것만 같았다.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온다연은 어리둥절했다.“사, 삼촌...”왜 자신이 어두운 차 안에서 유강후와 단둘이 있는 것일까?그의 부하 이권은 어디 간 걸까?온다연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
담담한 말투 속에 분노도 섞여 있는 듯했다.온다연은 열이 나는 이유로 정신이 혼미해서 저도 모르게 용기가 생겨 말했다.“삼촌, 너무 가까워요.”온다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는데 살짝 갈라지기까지 했다.유강후는 눈가의 어둠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이 지금 열 때문에 이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면 유강후는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차창을 내리자 밖에서 이권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얼굴을 닦으면서 말했다.“도련님, 차가 왔어요. 다연 양과 함께 얼른 타세요.”유강후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불빛을 번쩍이는 롤스로이스를 흘끗 쳐다본 뒤 열이 나 정신이 혼미한 온다연을 바라보면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구급차 불러.”이권은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으며 쓴웃음을 지었다.“도련님, 몇 년 동안 여기 계시지 않아서 경원시의 상황을 모르실 겁니다. 지금 비로 인해 경원시 절반이 정전되고 교통이 마비됐어요. 이 시간에 어디 가서 구급차를 부를 수 있겠어요?”유강후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려했는데 이권이 또 말했다.“도련님, 마침 이 옆에 도련님 명의의 방이 있는데 오늘 밤엔 거기에 가서 머무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 선생님도 같은 동네에 있어 병원에 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이섭은 유강후의 집에 도착했다.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이 온다연이라는 것을 확인한 소이섭은 눈빛이 복잡해졌다.“왜 다연이 여기 있어?”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수액을 놓는 소이섭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길에서 만났는데 아파 보이길래 데려왔어.”그러자 소이섭이 콧방귀를 뀌었다.“유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착해졌지?” 소이섭은 일어나서 아직 의식이 없는 온다연을 흘끗 쳐다보며 그다지 친절하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유강후, 네가 모를까 봐 말하는데 은별이의 우울증은 이미 매우 심각해졌으니까 더 이상 은별이를 자극하지 마.”하지만 유강후의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