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이준이 함께 커왔다는 허도현의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던 찰나, 임동현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좀 쿨하게 행동해요. 삼촌도 엄마와는 그냥 친구 사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러지 마요. 창피해요.”한이준은 임동현을 안고 한쪽으로 돌아서서 물었다.“정말 그렇게 말했어?”임동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빠, 삼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삼촌이 엄마를 좋아하는 건 잘못이지만 그래도 엄마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했어요.”그러면서 작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이건 제가 엄마 방에서 찾은 거예요.”학교에서 나눠줬던 수첩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한이준은 손을 뻗어 빼앗으려 했다.“뭐라고 썼는지 보자.”임동현은 즉시 몸을 옆으로 틀어 수첩을 감추며 말했다.“이건 내가 찾은 거예요. 아빠가 갖고 싶으면 뭔가와 바꿔야죠.”엉뚱한 아들의 말에 한이준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또 뭘 갖고 싶은 건데?”임동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엄마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고 2천만 원을 넣어서 저한테 주세요. 돈이 필요해요.”“어디에 쓰려고?”“그건 아빠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줄 거예요, 안 줄 거예요? 미리 말해두는데 이 수첩을 안 가지면 후회할 거예요.”한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 2천만 원이 뭐 별거라고. 하지만 그 돈으로 나쁜 짓을 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겠지? 이제 수첩 내놔.”임동현은 수첩을 내밀며 말했다.“약속 어기면 안 돼요. 그리고 될수록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보세요. 아빠가 또 우시는 걸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아휴, 창피해. 다른 집 아빠들은 남자 대장부로써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는데 우리 아빠는 반년 동안 두 번이나 울다니.”한이준은 임동현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요놈이, 아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임동현은 얼굴을 휙 돌리더니 그를 휴게실이 있는 방향으로 밀며 말했다.“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보세요. 내가 삼촌이 엄마에게 너무
원래도 기운이 없었던 터라 그의 키스에 숨까지 막혀왔던 임혜린은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어봤지만, 오히려 그의 강렬한 그립에 더 깊숙이 끌려들 뿐이었다.한이준은 마치 오랜 굶주림에 미친 야수처럼 입술이 닿자마자 본능적으로 빼앗으려 들었고,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임혜린이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한이준은 그녀를 놓아주었다.임혜린은 침대를 잡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참 후 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화가 치밀어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미쳤어요? 왜 이래요?”한이준은 억울해하며 말했다.“그냥 키스 한 번 했을 뿐이야. 당신은 내 아내잖아. 반년 동안 키스 한번을 못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반성할 줄 모르는 그의 태도에 임혜린은 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나가요!”한이준은 임혜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밥상을 다시 차리더니 그녀를 부축해 식탁 앞에 앉히며 말했다.“조금이라도 먹어. 계속 안 먹으면 얼굴이 다 소멸해서 없어질 것 같아.”겉으로는 순해 보이지만,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서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한이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임혜린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대충 몇 숟가락 뜨고 그릇을 밀어냈다.“됐죠?”한이준은 거의 손대지 않은 반찬들을 보고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아니. 너무 적어.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았잖아.”그는 죽을 조금 맛보고 말했다.“맛이 괜찮네. 전부 최고급 전복으로 직접 끓인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먹어. 당신 지금 봐봐. 엄청나게 야위었다고.”요 며칠 부쩍 야윈 임혜린의 갸름해진 얼굴에 한이준은 가슴이 아려왔다. 게다가 하얀 목선이 유난히 도드라져 몰래 쓰다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그녀가 화를 낼지 두려워 그저 머리만 쓰다듬으며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더 먹자.”마치 집에서 키우는 골든 리트리버를 쓰다듬는 듯이 자신을 쓰다듬는 한이준의 행동에 화가
하지만 병약한 한이준이 나타난 후부터 임혜린의 시선은 온통 그 녀석을 향해 있었다.그러다 한이준이 병에서 회복되고 점점 키도 크고 멋있어지자, 임혜린의 마음은 더욱 분명해졌다.허도현은 씁쓸한 눈빛으로 수첩을 덮어 임동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이건 엄마 물건이니 잘 보관해 둬. 잃어버리지 말고.”임동현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삼촌, 공책에 아빠 이름이 많이 보이던데 혹시 엄마가 아빠에게 쓴 연애편지인가요?”허도현은 마치 오랫동안 간직해 온 보물을 누군가한테 빼앗긴 듯한 기분에 마음이 아파져 왔다.하지만 그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임혜린이 이미 선택했다면 그는 억지로 그녀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잘 간직해야 해. 잃어버리면 안 된다.”임동현은 허도현의 품에 안겨져 있는 빨간 장미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런데 삼촌은 왜 엄마에게 빨간 장미를 선물해요? 엄마 아빠는 부부니까 빨간 장미를 주는 거고, 삼촌은 친구니까 노란 장미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꽃 색깔을 바꾸는 거 어때요?”허도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것도 좋겠다. 그러면 나랑 같이 다시 꽃 고르러 갈래?”임동현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요. 삼촌은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예쁘고 좋은 이모가 삼촌을 사랑해 줄 거예요.”병실에서 한이준은 가져온 국과 반찬들을 꺼내 놓고 정성껏 끓인 죽도 그릇에 담아 임혜린에게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먹어. 반찬 맛이 괜찮아. 집에서 먹었던 맛이야.”임혜린은 아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입맛이 없으니까 치워요. 그리고 한이준 씨, 경고하는데 동현이 입에서 나온 말들 당신이 시킨 게 아니길 바라요. 만약 당신이 시킨 거면 두 번 다시 안 봐요.”한이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나 아니야. 맹세해. 나도 처음 듣는 말이라고.”그는 임혜린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혜린아, 동현이 벌써 다섯 살이야. 워낙 똑똑한 아이라
전화기 너머로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연히 효과 있지. 불쌍한 척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야. 내 말대로 하면 분명히 잘될 거야.”임동현이 말했다.“내가 알아봤는데 엄마 아빠는 진짜로 결혼 안 한 것 같아. 이거 너무 큰 일이잖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해?”“계속 불쌍한 척하고 아픈 척하고 계획한 대로 잘하면 돼.”“알았어. 성공하면 네가 원하는 거 줄게. 하지만 나한테 또 다른 조건이 있어.”“뭔데?”임동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강아름의 통통한 볼을 떠올리며 말했다.“네 여동생 며칠만 빌려줘. 내가 데리고 놀자.”강우림은 곧바로 화를 냈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꿈 깨!”말을 마친 강우림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임동현은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진짜 쩨쩨하네.”임동현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자, 키가 큰 한 남자가 병원으로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베이지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채 그 안에 같은 색 계열의 양복을 입어 젠틀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남자가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본 임동현은 눈을 반짝이더니 곧바로 달려갔다.“삼촌.”허도현은 즉시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 올리며 물었다.“동현아, 여기서 뭐 해?”“아빠 엄마가 지금 나한테 여동생을 만들어 줄지 말지를 상의하고 있어요. 엄마가 그런 건 애들이 들으면 안 된다고 해서 나와 있었던 거예요.”허도현은 어두워진 얼굴빛으로 물었다.“무슨 여동생? 동현아, 혹시 네 아빠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그런 헛소리를 다 믿으면 안 돼.”임동현은 그의 품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삼촌, 저는 삼촌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빠는 한 명이었으면 좋겠어요. 죄송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아빠 편이에요.”허도현은 갑작스럽게 바뀐 임동현의 예상치 못한 태도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동현아, 너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들 일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거 아니야. 애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임동현은
임동현은 입을 가리고 웃더니 임혜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왜냐하면 엄마는 임신했기 때문이에요. 뱃속에 아기가 있거든요. 그래서 치마를 좀 크게 그렸어요. 어제 제가 엄마 뱃속에 여동생이 있는 꿈을 꿨거든요.”임혜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가르친 거야? 아빠가 가르쳐 준 거야?”임동현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니에요. 내가 꿈에서 본 거예요. 친구들 대부분 다 여동생이 있는데 저도 여동생이 갖고 싶어요! 엄마, 빨리 여동생 낳아 줘요. 나 혼자 너무 외롭고 불쌍하잖아요. 강우림이 맨날 자기 여동생을 나한테 자랑하는데, 너무 귀엽단 말이에요. 그리고 유치원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매일 자기는 여동생이 있다고 자랑하는데 나만 없어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외롭고 불쌍한 아이예요.”어이가 없었던 임혜린이 고개를 들어 한이준을 쏘아보자, 한이준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진짜 말한 적 없어. 요즘 우림이랑 자주 놀게 했더니 저래. 우림이가 워낙 똑똑하잖아.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지.”임동현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약속할게요. 엄마가 여동생만 낳아 주면 진짜 말 잘 들을 거예요. 그리고 동생도 잘 돌볼게요. 엄마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그는 작은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제가 기저귀도 갈아 주고 우유도 먹여 주고 재워도 줄 거예요.”임혜린은 임동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이건 어른들의 문제야. 어린이는 이런 일에 신경 쓰는 거 아니야.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면 키 안 큰다?”임동현은 입을 삐죽 내밀고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엄마 아빠는 이제 나 안 사랑하는구나. 그러니까 나한테 여동생도 안 낳아 주고, 나를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아이로 만들려는 거구나.”임동현이 말을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척을 하자, 임혜린은 마음이 아파 얼른 아들을 안아 달랬다.임혜린은 항상 임동현에게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북아메리카에 있을 때 임
한이준은 아들을 번쩍 안아 무릎에 앉히고 작은 뺨에 뽀뽀했다.“역시 아빠를 위로할 줄 아는 건 너밖에 없구나. 그거 알아? 네 성격이 엄마 어릴 때랑 똑같아. 좀 더 크면 아빠가 제대로 훈육해야겠어.”임동현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는 어릴 때 어떤 모습이었어요?”임혜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한이준은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엄마는 말이야, 대장 노릇을 하는 걸 좋아했어. 싸움이 나면 제일 먼저 달려 나갔고 숙제는 전부 아빠한테 시켰어. 그러다 누가 아빠 험담이라도 하면 뛰쳐나가서 아빠 대신 싸우고 그랬어.”임동현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그러면 아빠는 어릴 때 엄마가 보호해 준 거네요.”한이준은 임동현의 작은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사실 아빠는 엄마 보호가 필요 없었거든. 아빠 옆에 항상 누가 따라다니는지 몰라? 경호원이잖아. 전국 최고의 경호원! 하지만 엄마는 아빠를 보호해 주고 싶어 했으니까 그냥 만족시켜 준 거지. 그리고 아빠는 원래 그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었는데, 엄마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그 학교에 남은 거야. 안 그랬으면 엄마가 대장 노릇을 할 기회도 없었을걸?”임동현은 동경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대장 노릇 하는 거 재미있어요? 나도 하고 싶어요.”한이준은 고개를 저었다.“안돼. 남자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야. 항상 침착하고 냉정해야 하고, 모든 걸 싸움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돼. 너는 앞으로 한씨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이잖아.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려야 하는데 싸움으로 해결하면 되겠어?”임동현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그런데 엄마는 왜 아빠를 때리는 거예요? 아빠가 엄마를 못 이겨요?”한이준은 웃으며 말했다.“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돼. 더더욱 아내를 때리면 안 되지. 아내는 아껴 주는 존재야. 알겠어?”임동현은 알아듣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아빠는 엄마 때문에 화나서 두 번이나 울면서도 안 때리더라.”한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