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두려워서 몸이 경직되었다. 유강후는 차가운 손등으로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가 거두어들였다.“집사님이 네가 오후부터 열이 나서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열이 내렸네. 의사를 부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온다연은 그제야 자신이 오후에 열이 났고 반나절이나 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잤는데 왜 머리가 아직도 무거울까?온다연은 그 원인을 유강후가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으로 돌렸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삼촌, 불 좀 켜주시면 안 돼요?”유강후는 그러자 문 쪽으로 가서 불을 켰다. 조명이 켜지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강후를 쳐다봤다.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늘씬해 보였고 매력적이었다.그는 넥타이도 맸고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옷깃이 화려하게 빛났다. 무심코 들어낸 손목시계도 비싼 명품 같았다.온다연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많이 봤지만 유강후 같은 분위기를 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차갑고 섹시하고 고급스러웠다.온다연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아까보다 더 긴장되어 절로 눈을 내리깔았다. 유강후는 더웠는지 넥타이를 벗어 의자에 털썩 걸치고 양복을 벗더니 가늘고 흰 줄무늬 셔츠를 드러냈다.외투를 벗은 유강후는 카리스마가 줄었지만 도도함이 더 돋보였다. 온다연은 감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는 외투를 놓고 나갔다가 2분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 그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더 늘어났다.유강후는 쇼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일어나서 뭐 좀 먹어.”온다연은 확실히 배가 고팠기에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손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하얀 진주 머리띠를 쥐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잘 어울리네.”깔끔한 디자인의 이 드레스는 우아하고 세련되어 보였으며 전에 입었던 치마보다 훨씬 소녀답고 예뻤다.온다연은 치마를 잡아당기며 속옷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감사합니다.”그리고
유강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알아. 여기 병원인 거.”그러자 온다연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유강후가 머리가 아프거나 아니면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혹시 온다연을 유하령으로 착각했나? 이렇게까지 온다연을 챙길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그러자 온다연이 한 번 더 말했다.“삼촌, 저는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유강후가 대답했다.“그렇지. 근데 뭐?”온다연은 다시 멍해졌다. 유강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약혼녀인 나은별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곳은 적어도 침대가 많아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자지 않아도 되니깐 말이다.“그런데...”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듣지 않고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그러자 온다연이 다급하게 쫓아갔다.“삼촌!”유강후가 돌아서자 하마터면 달려오는 온다연과 부딪힐 뻔했고 그녀는 황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키 차이가 큰 두 사람이 가까이 서자 온다연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 긴장을 떨며 옷을 움켜쥐었다.그녀의 깨끗한 이마와 긴 속눈을 바라보면서 유강후가 말했다.“왜? 같이 씻고 싶어?”뭐라고?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충격으로 반짝반짝 빛났다.온다연의 눈동자는 보통 사람보다 까맣고 밝아서 사람을 진지하게 바라볼 때 애틋함이 느껴졌다. 지금 화를 내는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 알았지.”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손길을 패했고 머리가 지끈거렸다.금세 화장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의 문은 방음이 잘되지 않고 유리로도 희미하게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유강후의 그림자는 늘씬하고 날렵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온다연은 자기도 모르게 그 황당한 오후가
유강후가 두 팔로 온다연을 양옆을 짚고는 이렇게 말했다.“온다연,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유강후는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온다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열렸다. 벨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숨 막히는 이 공간에서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유강후는 언짢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더니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3시간이 지난 뒤였고 그때 온다연은 이미 잠에 들었다.잠에 든 온다연은 매우 얌전했고 연분홍 입술은 더 매혹적이었다.유강후는 침대맡에 앉아 그런 온다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옷을 두던 유강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주워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눈빛이 차가워지며 벗어둔 옷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이때 온다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하니, 그만.”온지연이 몸을 뒤척이며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잠에 들었다.유강후의 미간이 티 나지 않게 구겨졌다.또 그 고양이 꿈을 꾼 건가? 그렇게 좋다고?유강후가 허리를 숙여 온다연을 안으로 살짝 옮기더니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온다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이튿날, 온다연이 깨어나 보니 집사가 와 있었다.말끔하게 치워진 병실은 어제와 달랐다. 커튼이 전부 열려 있어 따듯한 햇빛이 창틀을 비추며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했다. 테이블에 놓인 유리 꽃병에는 하얀 장미가 한 아름 꽂혀 있었는데 싱그러우면서도 우아했다. 방 한가운데 있는 공기청정기가 방안을 가득 메운 소독수 냄새를 전부 밖으로 빨아내고 있었다.아직 잠에서 덜 깬 온다연은 비몽사몽인 표정으로 집사를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집사 장화연의 얼굴은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아무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았다. 장화연은 온다연이 깬 걸 보고는 준비한 아침을 대령했다.온다연이 아침 메뉴를 한번 슥 스캔했다. 죽만 해도 여러 가지였다. 거기에 계란찜, 우유, 두유, 빵, 그리고 여러 가지 밑반찬까지,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였다.온다연이
유강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로 온다연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온다연, 뭘 하든 하지 않든 다 내가 결정해. 네가 참견은 필요 없어.”화들짝 놀란 온다연이 유강후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맨날 이곳으로 출근 도장을 찍으며 뜬금없는 선물을 하니 온다연은 깊이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마음속으로 유강후의 행동이 다소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지만 온다연은 이내 이 생각을 부정했다. 유강후가 어떤 사람인가? 온다연은 유강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만큼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온다연이 입술을 깨물며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제가 어떻게 감히 참견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유강후의 시선이 온다연이 깨물었던 입술로 향했다. 깨문 곳이 아직 촉촉했다. 유강후는 표정을 굳히더니 온다연을 풀어줬다.“아침 먹어.”목소리가 높지는 않았지만 차갑기 그지없었고 거절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온다연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조금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이상해 몰래 유강후를 훔쳐봤다.유강후는 먹는 속도가 꽤 빨랐지만 동작은 여전히 우아했다. 온다연의 시선을 느낀 유강후가 식기를 내려놓더니 온다연을 바라봤다.“할 말 있으면 해.”온다연은 유강후와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결국엔 참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앞으로 선물은 더 안 해주셔도 돼요. 옷이나 액세서리는 다 너무 비싸요...”유강후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마음에 안 들어? 그럼 바꾸지 뭐. 오후에 비서 보낼 테니까 좋아하는 브랜드나 스타일 알아서 골라.”말문이 막힌 온다연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니에요. 삼촌. 저 이런 거 필요 없어요...”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하령아.”방안이 조용했던지라 온다연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삼촌, 나 돌아온 지도 삼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지금까지 얼굴도 안 보여주고
무슨 무서운 물건이라도 부딪친 것처럼 온다연은 냉큼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유강후를 쳐다볼 엄두를 못 냈다.유강후는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다 못 맸잖아. 계속해.”유강후에게서는 다 가진 자의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말투도 차가운 게 어딘가 기분이 나빠 보였다.온다연은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아 입술을 깨물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깨물었던 입술은 촉촉해졌고 말캉한 입술은 더 빨개졌다.유강후가 눈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유강후의 입술이 온다연의 매끈한 이마에 닿자 온다연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넥타이를 매는 데 계속 실패한 온다연은 조급한 마음에 몸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말캉하고 작은 온다연의 몸집이 유강후의 몸에 찰싹 붙었다. 여름이라 옷이 얇았기에 온다연은 유강후의 체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온다연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긴장하면 할수록 잘 매기가 더 어려웠다. 여섯 번을 맸는데도 매는 데 실패하자 더는 어쩔 방법이 없었던 온다연이 고개를 들고 작은 소리로 유강후를 불렀다.“삼촌.”그 부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온다연은 유강후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고개를 들자 입술이 거의 그의 턱에 닿을 지경이라는 걸 말이다.온다연은 머리가 지끈거려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넥타이를 꽉 움켜쥐고는 버벅거렸다.“삼, 삼촌, 정말 못 하겠어요.”유강후는 터질 듯이 빨개진 온다연의 귀를 보더니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이리 와. 내가 가르쳐줄게.”온다연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 넥타이를 너무 꽉 움켜잡아 주름이 질 지경이었다. 곧이어 유강후가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뼈마디가 선명한 기다란 손과 말캉하고 뽀얀 작은 손이 선명하게 차이가 났다.손이 맞닿은 순간 유강후의 차가운 시선이 잠깐 멈칫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스카프 어떻게 하는지는 알지?”온다연이 고개를 숙이고 유강후의 눈을 마
다행하게도 차를 바로 문 앞에 세워 차에 오른 후, 다연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운전기사는 여전히 이권이었고, 유강후와 온다연은 뒤쪽에 앉아 있었다.돌아가는 내내 유강후는 컴퓨터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차 안에는 그의 타자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온다연은 차 문에 붙어서 유강후와 최대한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제한적인 공간에서 차 문안에 들어간다 해도 그와의 거리는 2미터가 되지 않았다.유강후 옆에 앉은 온다연은 손에서 땀이 나며 그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못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유강후가 컴퓨터를 넣으며 그녀를 흘깃 쳐다보았다.“그렇게 붙어있는 거 안 불편해?”하는수 없이 온다연은 힘을 풀고 치맛자락을 잡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삼촌, 앞으로 이렇게 비싼 옷은 사지 않으셔도 돼요.”유강후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얼마면 안 비싼 건데?”온다연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생트집을 잡는 것처럼 느껴져 방금 전 한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어색한 와중에, 앞에 있던 이권이 분위기를 풀었다.“다연 아가씨, 셋째 도련님과 함께 계시면 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가씨 같은 분이 몇 분이 되든 다 먹여 살릴 수 있어요. 굶은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온다연은 얼굴을 붉혔다. 아까는 이 남자가 얼마나 돈이 많은 남자인지 한순간 깜빡했다. 이 상황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이권이 계속 말을 이었다.“아니면 셋째 도련님 지갑 걱정하시는 거예요? 아직 시작도 안 하셨는데 벌써 관리에 들어가신 거예요?”온다연은 터질듯한 얼굴로 얼른 해명했다.“아... 아니예요!”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이권의 의자를 차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말이 많다!”이권은 어깨를 으씩이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작은 머리를 숙인 온다연의 귀 끝은 빨갛게 달아올라 거의 피가 날 것 같았다. 유강후를 쳐다볼 엄두가 더 나지 않았고, 심지어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이권 님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너무 눈에 띄는 유강후이다 보니 연회홀에 나타나자마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화제도 그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모든 사람을 훑어본 온다연의 시야에 심미진과 유하령이 잡혔다.심미진의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그녀는 당황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고 유하령은 감출 수 없는 악의 가득 찬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오늘 이 자리에 유강후화 유재성이 없었다면, 유하령이 달려와 그녀의 뺨을 칠 것임을 온다연은 잘 알고 있었다. 유하령의 옆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악의에 찬 눈길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온이 고개를 가볍게 늘어뜨리며 뽀송한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정리했다. 앞머리로 가려 다른 사람이 그녀의 표정을 잘 확인할 수 없게 하고 싶었다.유강후가 강요하지 않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불쾌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유강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내 옆에 앉아.”자리는 지정석이었다. 유강후의 자리는 유재성의 오른쪽이었는데, 그 옆에는 유자성이 앉아 있었다.온다연을 본 유자성이 티가 나게 미간을 좁히며 담담히 말했다.“셋째가 오니, 다연이도 집에 돌아오네.”그가 고개를 돌려 사용인에게 지시했다.“수미 씨, 자리 하나 추가하죠.”진수미는 유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용인으로, 유씨 가문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자연히 온다연의 지위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가 돌아오셨으니 의자를 하나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일 끝에 있는 테이블에 착석해 주셔야겠습니다.”말이 끝나자, 유하령과 그녀의 친구들이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유하령은 혐오스럽지 짝이 없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심미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다연아, 잠깐 나 좀 보자.”이내 그녀들은 휴게실로 왔다.
심미진은 그녀를 노려보았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지. 계집애를 낳는다면 네가 저주한 거야. 여자는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해. 네가 아들이었다면 네 아버지도 바람피우지 않았을 거고 네 엄마도 죽지 않았을 거야. 이게 다 네 잘못이야. 알아?”“그리고 유하령이 돌아왔는데, 그 애가 너를 때리고 욕하면 참아. 너 같은 말괄량이 계집애는 피부가 거칠어 몇 대 맞았다고 죽지는 않잖아.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말아. 그러면 내가 유씨 가문에서 힘들어져.”심미진은 온다연이 요즘 밖에서 어디 사는지, 뭘 먹는지, 돈은 있는지 전혀 묻지 않고 잔소리만 해댔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 한마디 반박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후 휴게실에서 나왔다.나오자마자 온다연은 차가운 시선이 먼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 추가된 걸상에 앉았다.이렇게 큰 테이블에서 모든 사람의 의자가 마호가니 식탁과 세트로 된 것이었고 온다연만 낡은 원형 스툴에 앉았다.그 옆자리는 마침 유하령과 그 친구들이었다.그녀가 앉자마자 극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이분이 그날 카페에서 만났던 조카야?”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 옆에 앉은 나은별을 발견했다.흰 치마에 검은 머리의 그녀는 청초하고 달콤한 외모에 기품이 있고 교양 있는 모습이 유강후와 잘 어울렸다.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온다연을 바라보았다.“방금 강후 씨 차를 타고 왔어요?”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유강후는 결벽증이 있어서 자기 방과 차에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 그의 기사와 나은별을 제외하고, 그의 어머니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온다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방금 길가에서 삼촌을 만났는데 같은 방향이라 태워 주셨어요.”나은별은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유강후의 팔짱을 끼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그렇군요. 강후 씨가 결벽증이 심해서 제가 다른 사람과 많이 접촉해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