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조금 겁이 났다.그녀의 기억 속 유강후는 항상 덤덤하고 차갑고 고고한 사람이었다.화를 내더라도 감정을 절제하고 격한 언사를 퍼붓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이런 곳에 밀어 넣고 이상한 말까지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다.희미한 불빛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눈에서 명백한 분노를 볼 수 있었다.어둡고 얼음처럼 차가워 감히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산 채로 짓밟아 버릴 것만 같았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움츠러들었다.무섭긴 해도 동시에 억울함도 밀려왔다.그녀는 분명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그런데 유강후가 화가 단단히 난 이상 그에게 반항하고 싶지 않아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비비적거렸다. “아뇨, 안 좋아해요.”유강후는 조금 전 상황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온다연을 두 눈에 담았단 생각에 이성을 잃었다.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한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반드시!그는 갈수록 병적으로 온다연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 심해지며 통제하려 드는 자신을 발견했다.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니 두 눈에 자신만 담아야 한다.그러니 온다연의 나약하고 애교 섞인 모습은 별 소용이 없었다.눈 밑의 차가움이 한층 더 짙어진 그는 그녀의 턱을 감싸며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 “전에는, 학교 다닐 때 좋아한 적 있어?”온다연의 등골에 한기가 올라오고 몸이 살짝 굳어졌지만 얌전히 그의 손목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뇨, 좋아한 적 없어요.”그녀는 잠시 멈칫하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요.”그런 환경에서 모두가 그녀를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 피하기 바쁜데 어디 고백이라도 했겠나.간혹 그녀를 불쌍히 여겨 친구로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두명 생겼어도 며칠도 안 되어 얼굴이 시퍼렇게 매를 맞았기에 그때부터는 다들 그녀만 보면 피하기 바빴다.이 말을 들은 유강후
온다연은 그날 밤의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깜짝 놀라 발버둥 쳤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놀란 그녀는 목소리마저 달라졌다.“안, 안 돼요. 아파요. 하지 마요...”유강후의 몸은 터질 것만 같았다.그동안 일부러 참아왔던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며 그녀의 여린 귓불을 잘근 깨물더니 유혹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아파, 이젠 안 아플 거야...”온다연은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고 그와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쓰면서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안 돼요, 밖에선 안 돼요, 제발...”그 순간 밖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터지며 야릇한 분위기가 깨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유강후의 눈은 이성을 되찾은 듯싶었다.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확실히 좋은 장소도 아니었고 방음도 좋지 않았다.주요하게는 정말로 밖에서 그녀를 탐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의 상처를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는 더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그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온다연을 창가에서 안아서 내려주고는 그녀의 옷도 정리해 주었다.평소의 차갑고 진중한 목소리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이따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그냥 집어. 돈 아낄 필요 없어.”온다연은 호기심이 동했다.“아저씨, 돈 많아요?”여기가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고 전부 최고급 명품 브랜드인데 아무렇게나 집으면 얼마나 써야 할까.질문을 뱉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유강후가 얼마나 부자인지는 미래그룹의 규모만 봐도 알 수 있었다.경원에 있는 본사만 해도 대형 공단 크기인데 게다가 땅값이 비싼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듣기론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마다 지사가 있고 해외까지 크고 작게 분포되어 있다고 했다.우연히 인터넷에서 유강후가 미래그룹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체도 가지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그러니 유하령과 유민준이 유강후의 힘만으로도 마음대로 누리며 억대에 달하는 슈퍼카를 차고에 쌓아놓는 것도 당연했다.심지어 유민준에게 투자한 금액은 수백억에 달했다.그 생각에 그녀는 더 이
유강후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쇼핑하러 가자.”VIP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몇몇 유명 명품 브랜드는 이미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다.잘 교육받은 직원들은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고 시종일관 예의를 갖추었다.손쉽게 수많은 액세서리와 옷을 고른 뒤 온다연은 가격표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작 이 정도 물건을 다 합치니 수십억대가 되었다.부자들은 돈을 종이처럼 쓴다더니!사실 대부분 유강후가 골랐고 전부 여성스러운 스타일이었다.그는 온다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되거나 온다연이 한 번이라도 더 보는 물건은 전부 가져갔다.얼마 고르지도 않고 유강후는 온다연이 멍하니 있는 데다 조금 피곤해 보이자 곧바로 휴게실로 안고 갔다.잠시 후 누군가 디저트와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다.유강후는 디저트를 그녀 앞에 내밀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집에 있는 것보다 못하겠지만 대충 먹고 피곤하면 조금 있다가 집에 가자.”금빛 시럽이 뿌려진 예쁜 아이스크림 케이크 옆면에 ‘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온다연은 예전에 대형 쇼핑몰에서 이런 케이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주한은 경원의 유명한 임씨 가문의 개인 제과점에서 나온 케이크이며 주문이 매우 어려워 일주일 전에 예약해도 구하기 힘들 거라고 하면서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런 케이크를 사주겠다고 했다.온다연은 한동안 조용히 케이크를 바라보다가 작은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조금 넣었다.진한 우유의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게 정말 맛있었다.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조금 못한 것 같았다.온다연은 집에서 먹던 과자를 떠올렸다. 보기엔 이것만큼 예쁘지는 않았지만 식감은 훨씬 좋았다.그런데도 여전히 맛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 조각을 크게 떠서 유강후에게 건넸다.“아저씨, 먹어봐요.”유강후는 케이크를 힐끗 보고는 받아먹지 않고 대신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입술을 살짝 깨물
“알았어, 그만해. 하령이 곧 도착할 텐데 그 말 들으면 싫어할 거야! 됐어, 넌 먼저 들어가서 기다려, 난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알았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온다연의 가늘어진 눈매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곧이어 진설아가 들어왔고 이곳 VIP 라운지에는 온다연만 있었기에 진설아는 온다연을 한눈에 알아봤다.그녀는 눈에서 치솟는 질투심을 억누르기가 힘들었고 얼굴은 극도로 추악해졌다.유강후가 온다연을 곁에 둔다는 건 유씨 가문 전체에 알려졌고 모든 집안의 가정부들이 샘을 냈다.특히 진설아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질투가 나서 밤낮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부모도 없이 어릴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온다연 같은 천한 년이 어떻게 유강훈 눈에 들게 된 걸까.유강후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저 높은 위로 올라간 거와 다름없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좋은 것들만 걸친 온다연을 보고 질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 옷들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최고급 브랜드였다.특히 온다연의 손에 착용한 연두색 플라워 다이아몬드 팔찌는 유하령도 아직 사지 못한 C브랜드에서 막 나온 신상으로 몇억짜리였다.온다연은 진설아의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보며 몸에 두른 작은 가방을 쓰다듬더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아 언니, 오랜만이야.”진설아는 어릴 적부터 유하령과 함께 온다연을 따라다니며 괴롭혔기에 온다연이 반드시 보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환하게 맞아줄 줄은 몰랐다.순간 그녀는 온다연의 생각을 읽을 수 없고 제자리에 굳어진 채 우는 얼굴보다 더 일그러진 미소를 보였다.“그래, 오랜만이네.”온다연은 앞으로 다가가 진설아를 훑어보며 말했다.“언니, 이 원피스 유하령이 버린 옷 사이즈만 바꾼 거지? 예쁘긴 한데 안 어울리는 것 같아.”진설아는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온다연, 보복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했다.“언니 오해야. 난 복수할 생각 없어. 과거에 있었던 일도
순간 굳어버린 유강후의 눈가가 눈에 띄지 않게 부드러움으로 물들었다.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갑고 깊었다.“케이크 다 먹었어?”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두 손으로 그의 옷을 꽉 움켜쥔 채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나 이제 여기 있기 싫어요.”유강후의 눈에 온다연은 줄곧 극도로 참으며 자신의 취향조차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오늘 이러는 걸 봐서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은 그의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얼굴을 그의 옷에 파묻고 숨소리마저 불안정하게 들리더니 이윽고 답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유하령이 선물 고르러 온대요.”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렸다.방금 받은 연락도 유자성의 전화였는데 유하령이 어디선가 자신이 온다연과 함께 여기로 쇼핑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집에서 한바탕 물건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리고 이제 여기로 와서 며칠 뒤 할머니에게 드릴 생신 선물을 고른다는 것이었다.그는 당연히 유하령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심미진의 유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을 한 상태라 유하령이 오는 것도 묵인하고 있었다.얼마 전 심미진은 온다연이 자신을 밀어서 유산했다며 우겼고 유하령과 이효진 모두 온다연이 밀치는 걸 직접 눈으로 봤다고 했다.세 사람은 모두 온다연을 감옥으로 보낼 생각이었다.게다가 유산한 아이가 이미 5개월에 형태까지 갖춘 아들이라는 사실에 유자성은 분노하며 온다연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했고 유강후도 당연히 강경한 태도로 맞섰다.미래그룹 100명 규모의 법무팀을 준비시켜 철저히 보호할 작정이었던 터라 며칠 동안 두 형제가 싸우는 난리 통에 유씨 가문은 혼란에 빠졌다.유재성은 이에 격분해 두 형제를 불러 한바탕 꾸짖었고 결국 두 형제는 각자 한 발짝 물러서게 되었다.하지만 물러서는 데는 대가가 따랐다.유재성은 더 이상 온다연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유강후에게 당분간 유하령과 유민준에 대한 투자와 지원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타기도 전에 유강후의 전화벨이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고 몇 마디 말을 한 뒤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차 문 옆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몇 분 후, 검은색 버기카가 옆 공간에 멈춰서더니 이어서 세 명의 젊은 남자가 내렸다.모두 스물다섯, 여섯 살로 보이는 남자들은 껄렁대며 한 명은 한겨울인데도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세 남자는 험한 말을 입에 담으며 차에서 내렸다.그들을 슬쩍 본 온다연은 넋을 잃은 듯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작은 가방에 손을 넣고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군용 칼을 꺼냈다.이 셋은 당시 주한이 죽고 그녀가 조사받으러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다!그녀는 전혀 양심의 가책도 없이 비아냥거리며 경멸하던 세 사람의 추악한 얼굴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그들은 주한을 죽여놓고 벌레를 죽인 듯 쉽고 가벼운 태도를 보였다.주한은 죽었는데 왜 저들은 고작 감옥에서 몇 년 동안 지내고 다시 활개를 치며 밖을 돌아다니는 걸까.머릿속이 윙윙 울리며 죽었을 때 형체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주한의 시신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세 남자는 재빨리 차 문을 닫고 농담을 건네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그들이 가자 온다연이 뒤따랐는데 손에 들려 있던 군용 칼이 어느 순간 벌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런데 몇 발짝 못 가서 옆 차에 있던 이권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빠르게 달려 나와 온다연을 붙잡았다.“온다연 씨, 어디 가세요?”온다연은 멍하니 세 남자의 얼굴만 노려보며 뻣뻣하게 말했다.“나쁜 놈들!”그 순간 유강후도 다가와 온다연이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며 잡아당기려 손을 뻗는데 끈적한 액체가 한 줌 느껴졌다.내려다보니 온다연이 얼마 전에 산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군용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칼은 열려 있었고 손바닥으로 꽉 움켜쥔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손바닥을 베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그의 눈
온다연은 내려오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어깨에 둘러멘 채 억지로 차에 태웠다.그는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 온다연의 상처에 간단한 처치를 해주었다.이 과정에서 온다연은 무감각한 듯 소독을 받으면서도 끙끙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멈추지 않아 옆에 닿아있던 머리카락까지 적셨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치료해 준 후 옆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네가 만족할 만한 답을 줄게, 알았지?”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잡았다.작지 않은 힘에 옷이 구멍 날 것 같았다.가슴도 약간 들썩거리고 입술도 깨무는 모습을 보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유강후의 눈가에 깔린 서늘한 어둠이 점점 짙어지더니 운전하고 있는 이권을 흘끗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진영천 불러. 내가 도착하면 바로 만날 수 있게!”이권은 낮게 답했다.“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그리고 한껏 낮춘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작은 목소리였지만 간간이 대화 소리가 들렸고 전화기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약간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이권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바로 온답니다.”유강후는 덤덤하게 대꾸하고는 온다연을 안아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온다연은 눈을 감고 유강후에게 기댈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창백했고 그 모습은 조금만 건드려도 부러질 것처럼 초췌했다.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저 사람들이 날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내 옷을 찢었어요.”작고 나른한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좁은 공간에서 천둥처럼 사람의 고막을 뒤흔들었다.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격분한 유강후의 눈가가 시뻘겋게 물들었다.온다연의 손목을 잡은 손은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살짝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온다연이 덧붙였다.“아저씨, 난 저 사람들 알지도 못하고 저 사람
온다연은 입을 벙긋했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다시 적막에 빠졌다.마침내 전통 한옥에 도착하기까지 한 세기가 지난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안으로 들어간 뒤 다시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며 약을 바르고 파상풍 주사까지 맞혔다.온다연은 기운이 없는 듯 기력이 쇠약해 보였고 유강후가 주는 물과 우유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그대로 영혼을 빼앗긴 듯했다.유강후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는 그녀가 눈을 감을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이 유강후가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말했다.“진영천이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련님.”유강후는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한마디 말도 없이 서재로 향했고 서재에서 진영천은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40대 초반인 경원 지역 거물답게 깔끔한 옷차림에 점잖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목에 드러난 두꺼운 문신만 아니었다면 모두가 그를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음지 양지를 휘어잡는 거물이라고 해도 유강후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도련님,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앉죠.”단순한 말 한마디, 무심한 행동이었지만 그 속에는 차가움과 위엄, 그리고 위에서 군림하는 자의 강한 위압감이 가득했다.진영천은 앉는 것조차 불안했다.눈앞에 있는 유씨 가문 셋째 도련님은 경원에서 무자비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가문도 출중하고 능력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도 놀라울 정도였다.열여덟 살에 미래그룹이라는 대기업을 물려받아 당시 경쟁자들을 속절없이 무너뜨리고 미래그룹이 그의 손에 넘어간 지금은 몇 배로 몸집을 불렸다고 한다.지난 2년 동안 경원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위상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높아졌고 이 바닥에서 감히 그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하지만 이는 진영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경원에 돈 많은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두려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