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심장이 당기는 듯한 고통이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침묵하다가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손인지 몰랐어...”한 번도 사과를 해본 적이 없는 경원시 도련님이 또 침묵하다가 난생처음으로 사과를 했다.“다 내 잘못이야.”온다연이 가볍게 웃었다. 눈빛은 붕대를 감고 있는 손을 스쳐 지나갔다.그 위에는 아직도 피가 나고 있었다.그런 뼈를 가르는 듯한 고통은 이번 생에 제일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하지만 온다연에게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게 했다.하는 말마다 다 거짓말이다. 자기한테 모든 걸 주겠다고 하고 아껴주겠다고 하고 자기한테 미래를 함께하겠다고 한 사람이다.유강후는 당시 그런 친밀한 자세로 다정한 애정 행위를 했었다.한번, 또 한 번 온다연에게 키스를 하며 꼭 껴안고 흥분했을 때는 몸이 떨리고 힘이 세 유강후의 품에서 으스러질 거 같았다.당시 온다연은 유강후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의 마음은 다시 깊은 늪으로 빠졌다.온다연의 운명이 원래 하천했지만 유강후가 직접 칼을 쥐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더러 온다연에게 칼을 꽂게 해서는 안 됐다.그리고 그 한 발을 나은별이 밟은 것이지만 유강후가 눈감아 준 것이다.유강후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렇게 온다연을 마음대로 짓밟아도 된다는 것인가?유강후는 나은별보다 더 나빴다.온다연은 도대체 뭐인 건가?그냥 하천한 애완견? 기분이 나쁘면 손가락을 끊여도 되고 좋아하는 사람은 온다연의 손가락을 세게 밟아도 된다는 것인가?이 일들이 유강후가 허락한 것이 아니면 누가 감히 할 수 있겠는가?이제 와서 왜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건가?온다연의 눈에는 차가움이 스쳐 지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온다연이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아저씨. 안 아파요.”유강후는 온다연이 아래를 쳐다보는 눈과 입가에 연한 웃음이 아주 눈부셨다.안 아
하지만 지금 두려운 건 또 다른 것 같았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심해 봤자 한바탕 괴롭히기나 하지 어떻게 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니 온다연의 마음은 그렇게 무겁진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붕 뜨는 것 같았다. 당시 주희가 죽었을 때처럼 온다연은 또 아무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 느낌도 좋은 것 같았다.온다연이 머리를 들고 유강후의 눈을 직시했다.“아저씨 꼭 보상을 해야한다면 돈 주세요.”유강후가 온다연을 쳐다봤다.그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고 목소리도 나른했으나 어딘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유강후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정서두 알 수 없었다.“다연아, 뭘 사고 싶은데?”유강후는 온다연에게 돈을 주고 싶지 않았다.돈은 유강후에게는 그저 수자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온다연에게는 안전하지 않아 많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돈이 없어도 달아날 생각을 하는데 돈이 생기면 무슨 수를 쓰든 달아나려고 할 것이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돈을 주기 꺼리는 것을 눈치채고 가볍게 웃었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래요. 어떤 건 아저씨랑 화연 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으니깐요.”이 대답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유강후는 눈빛이 좀 나른해지며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다연이 얼마 갖고 싶은데?”온다연이 유강후를 보며 말했다.“10억이요.”주희의 수술비가 대략 6억에서 10억 정도였다.본가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맞은 것 하고 유강후와 잠을 잔 돈과 손가락 하나를 더하면 10억도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라 이미 낮춘 가격이었다.유강후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온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이렇게 많은 돈으로 뭘 하려고 그래?”10억으로는 이곳에서 세상 어느 나라에나 도망갈 수 있었다.심지어 신분을 바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한평생 살 수도 있다.온다연은 고개를 떨구고 눈에 스쳐 지나간 냉기를 감추었다.많은가?유하령의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빛은 약간 어두웠다.이 녀석이 1억에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전에 해준 게 아직 부족한 것 같으니 더 많이 사줘야겠다고 유강후는 생각했다. 그 뒤로 온다연은 인터넷 쇼핑에 푹 빠진 듯했다.처음에는 별로 값어치가 없는 작은 물건을 샀다. 분홍색 공책, 햄스터 무늬의 붓 같은 물건을 한 무더기 샀다.그 후로는 구월이에게 작은 방울도 많이 사줬고 여자아이들만이 쓰는 포장 귀여운 스킨케어 제품도 이것저것 사들였다.별로 값어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귀여운 것들이었다.양이 너무 많아서 장화연은 작은 방 하나를 비워 그녀의 이런 너저분한 물건들을 넣어줘야 했다.나중에는 천천히 더 비싼 것을 샀다.어떤 때는 새로 나온 이어폰을 사고, 어떤 때는 핑크의 작은 스피커를 산다.한 두 번 기분이 좋았을 때는 유강후한테 곰돌이 커프스 링크 한 쌍과 곰돌이 무늬의 컵을 사주기도 했다.유강후는 이 물건들을 받았을 때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장화연에게 대신 가지고 있으라고 했을 뿐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그의 냉랭한 태도는 마치 냉수처럼 온다연의 열정을 퍼부었다. 그 후부터 온다연은 그에게 무엇을 선물하지 않았다.나중에는 오히려 장화연에게 작은 선물 두 개를 주었다.하나는 아이리스 모양의 브로치였고, 또 하나는 부드러운 양가죽 장갑이었다.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정성 들여 고른 것 같았다. 장화연은 그녀가 소파에 엎드려 수십 개를 비교하면서 한참을 고르는 것을 보았다.장화연은 선물이 맘에 들었는지, 한 번은 연회에 참석할 때 그 아이리스 브로치를 하고 갔다.그 뒤로도 온다연의 쇼핑을 계속했는데 유강후는 천천히 묻지 않기 시작했다.그는 몇천 원, 몇만 원짜리 작은 물건은 그녀가 사고 싶은 만큼 사도록 했다. 안 되면 옆에 있는 집을 사서 그녀를 위한 창고로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다연이 나중에 휴대전화를 새로 사고 전화카드를 새로 사도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거의 한 달 후, 온다연의 손은
하지만 그녀는 뼛속까지 전형적인 백인이었다. 오면서 유강후랑 많은 얘기를 했는데 자기는 예쁜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다.하지만 온다연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가 예쁜 여자애와 같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잠시 멍해 있다가 옆방으로 숨었다.유강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내어 왜 숨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 여자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 친구를 사귀었나 봐요?”질투 섞인 말투였다. 마치 바람피우는 남편을 잡아낸 것처럼 말이다.유강후는 사실 속으로 좀 기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온다연은 태도가 담담해서 그는 사실 줄곧 불안했었다.지금은 그녀가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 불안해하던 마음을 놓았다.그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냥 친구라고만 하고는 온다연을 데리고 갔다.오히려 그 여자애가 몇 번이나 따라와서 온다연의 전화번호를 따려 했다. 근데 이권이 막아냈다.하지만 온다연의 눈에는 이게 다른 그림으로 보였다. 유강후는 며칠 동안 어린 여친을 데리고 외국에 있다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린 여자 친구는 가기 싫어했지만 그의 경호원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보였다.유강후는 온다연이 질투한 일을 생각하며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온다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집에 돌아와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씻고는 온다연을 침대에 눕힌 채 덮쳤다.이번에는 유강후는 많이 부드러워진 듯했다. 통제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던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제했다.온다연도 전에보다는 다소 얌전했다. 최대한으로 그를 받아들이려고 했다.이번에는 그래도 문제없이 잘 해낸 셈이었는데 유강후는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정말 너무 달았다. 그는 그녀가 성인이 되자마자 그녀를 데려가지 않은 것을 점점 더 후회했다.그 후의 시간은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었다.스킨십을 하는 것에서 유강후는 자기 생각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는 꼭 해야 했다.하지만 온다연이
말을 하면서 커다란 손이 온다연의 부드러운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라인을 따라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동작은 느렸지만 느낌은 있었다.온다연은 몸이 굳었다.아저씨가 오늘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자기가 잠이 덜 깼을 때 이미 한번 해서 온몸이 아팠다. 점심까지 내내 잤더니 좀 나아졌다.저녁에는 당연히 안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흥이 오른 것 같았다. 아까 그렇게 오래 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나 하고 온다연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아팠다. 여러 번을 해봤지만 아직 적응이 잘 안 되었다.하지만 그녀는 내일 꼭 영원시에 가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를 만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그녀는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주동적인 적도 없었다. 그저 그의 모습을 따라 하며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기만 했다.그런데 그녀는 이게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아저씨가 이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녀의 서툰 손길은 마치 그의 몸에 불을 붙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는 제어할 수 없어 몸을 돌려 그녀 몸 위로 덮쳤다.침대는 오랫동안 흔들렸고 낮은 오열 소리와 빠른 숨소리도 오래 이어졌다.하룻밤으로는 부족했다.다음날 온다연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일어났을 때 유강후가 이미 식탁 옆에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한 손으로 새하얀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방금 배달된 신문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늘 그렇듯 새하얀 줄무늬 셔츠에 검은색 슈트 바지를 입었는데 차갑고 귀 티 나게 보였다. 그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등등하였다.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사람과 눈앞의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생각하면서 말이다.어젯밤의 유강후는 더없이 거칠었다.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눈 밑에 붉은 핏발이 가득 섰다.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은 거리감 있고 존귀한 느낌이 있었다.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마저도 귀 티 나고 우아했다.이게 한 사람이라니, 정말 놀라웠다. 온다연의 시선을 느낀 유강후는 들고 있던 찻잔
유강후가 온다연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귀 뒤에 넘기며 말했다.“점심까지 자고 가도 돼.”온다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뜨거워 나는 작은 그릇을 쥐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유강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온다연의 손을 당겨다가 보니 하얀 손바닥은 이미 뜨거워서 빨개 났다.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온다연, 너 이제 또 뜨거운 거 손에 쥐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보여줄게.”온다연은 잘못을 한 소학생처럼 작은 소리로 변명을 했다.“안 아파요.”유강후는 이 소리를 듣고 가슴팍에 내려가지 않는 화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저번 일은 유강후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줬다.지금 온다연이 아프지 않다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에 힘들다.온다연의 이런 극도의 참을성은 유강후를 난감하게 했다.손바닥이 찔리던, 아니면 새끼손가락이 끊어져도 참고 울고불고하지 않는다.더 무서운 것은 당시 갈비뼈가 부딪쳐 부러져 죽기 직전이었는데 유강후가 찾아가지 않아도 조용히 죽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온다연은 죽음을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이 세상에 여념할 곳이 없고 지금 당장 죽더라도 별로 큰 일이 아닌 듯 했다.이런 조용함과 인내심은 유강후에게 온다연은 틈이 없는 동그라미 같았다. 이렇게 오래됐지만 유강후는 조금도 온다연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했다.사실 며칠 전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필요하면 달라고 하고 싫으면 거절을 하게 하려고 기회를 줬다.어떨 땐 사람을 빡치게 하지만 귀엽다고 생각했다.유강후가 모든 것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실수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여기까지 생각을 하니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는 다친 손을 손바닥에 놓고 새끼손가락을 살살 눌렀다.“아직도 아파?”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손가락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안 아파요. 아무 감각도 없어요.”사실 여전히 아프다. 특히 밖에 나갔을 때 새끼손가락이 아파
온다연의 시선을 느끼고 유강후는 손을 멈추더니 말했다.“어젯밤에 제대로 못 봤어?”온다연은 멈칫하더니 순간 귀까지 빨개졌다.온다연은 얼굴을 붉히고 유강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그런 말을 그렇게 막 내뱉지 마요...”유강후는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일까.유강후는 온다연이 얼굴을 붉히고 놀란 모습을 제일 좋아한다. 이럴 때만 온다연의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온다연의 눈을 쳐다보며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말을 막하다니? 어젯밤 누가 보겠다고 한 거더라?”온다연은 얼굴이 뜨거워 터질 것 같았다.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유강후의 눈빛은 평소보다 부드러워졌다.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안아 들고 귀 옆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말해도 괜찮아. 다연이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다고 했잖아.”뜨겁고 습한 기체가 귀에 닿자 온다연의 마음도 간지러운 것 같았다.머릿속에는 유강후의 어젯밤 모습이 가득했다.그땐 온다연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비록 아프지만 또 다른 이상한 느낌, 그리고 부끄러움과 무력감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온다연의 얼굴은 타오를 것 같았다. 빨리 머리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만 말해요.”온다연의 귀가 빨개 피라도 떨어질것 같은 모습을 보고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서 차에 태웠다.이곳에서 영원시까지 세 시간 정도 시간이 걸린다.차가 얼마 동안 움직였으면 온다연도 얼마 동안 잤다.온다연은 너무 힘들었다.어젯밤 너무 늦게 잠에 들었고 오늘 아침 또 일찍이 일어나서 너무 피곤해 유강후의 다리에 누워 영원시까시 자면서 왔다.영원시에 도착했을 때 유강후가 안아서 내리려고 했을 때 온다연은 서서히 잠에서 깼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정신이 말짱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상자에서 보온 그릇을 꺼내어 온다연에게 건네주었다.“아직 뜨거우니까 좀 마셔.”온다연은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흐리멍덩한 상태로 몇 모금 마셨다.“도착했어요?”아까 마실 때 입에
오늘 경원시에 가서 일을 처리하라고 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정리하고는 외투를 걸쳐주고 말했다.“좀 있다가 난 회의해야 하니까 먼저 내 사무실에 가서 놀고 있어. 안에 네가 좋아하는 간식도 가져다 놨고 졸리면 휴식실에서 자고 회의가 끝나면 밖에 나가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저씨 고마워요.”유강후는 또 한 번 창문 밖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유민준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려고 했다.유강후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목돌이를 온다연에게 둘러주고 말했다.“내려가자.’차 문을 여니 찬 공기와 놀래 하는 시선이 느껴졌다.유민준은 온다연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앞으로 나가서 안을 뻔했다.하지만 이효진이 옆에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다연아, 여긴 왜 왔어?”온다연은 옆에 표정이 좋지 않은 이효진을 쳐다봤다.고개를 떨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일하는 곳에 와보고 싶어서요.”이효진은 안 그래도 화가 났다.온다연의 연약한 모습을 보니 앞으로 가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하지만 유강후와 유민준 두 사람이 다 있으니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다연이가 오늘 손님으로 왔으니 작은아버지하고 민준 씨가 회의하는 동안 내가 데리고 둘러볼까요? 여긴 경원시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곳이 꽤 많아.”여주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유민준하고 결혼 한 지 몇 년이 되고 본가의 대권이 자신의 손에 잡고 있는 듯했다.온다연이 앞으로 가 유강후의 팔을 안으며 말했다.“괜찮아. 아저씨가 나보고 상관없는 사람하고는 또 모함을 당하면 골치 아프니까 말을 하지 말라고 했어.”이 말에 유민준과 이효진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유민준의 낯빛이 더 좋지 않았는데 요즘 온다연하고 카카오톡을 하면서 점점 더 온다연이 철이 들고 귀여워 이씨 가문의 혼약을 받아들인 게 후회됐다.온다연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을 탓하는 줄 알고 말했다.“그날 일은 오해야.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