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준보다도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신씨 집안에 더 화가 나 있었다.온다연에게 친구 두 명이 생긴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저 유치한 어린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신씨 집안은 꽤 순종적이었다. 그의 앞에서도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 집안에서 나온 친구 정도는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온다연이 위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부딪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회의 중이었다. 신씨 집안의 책임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자칫 상대를 회의실에서 죽여버릴 뻔했다. 사람들은 그가 유민준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났는 줄 알았다. 만약 수술실에 있는 사람이 온다연이었다면 신씨 집안의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을 것이다.유민준이 온다연을 밀어냈다는 말을 듣고는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그는 신씨 집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 중 핏빛으로 물들지 않은 것은 없었다.유강후는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작은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데, 내가 널 남겨둬서 뭐 하지?”그는 몸을 흠칫 떨면서 말했다.“제 착오입니다.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해 내겠습니다. 신씨 집안은 이런 일을 저지를 위인이 못 됩니다. 뒤에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그는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신씨 집안과 나씨 집안은 먼 친척 사이라고 합니다. 나씨 집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이때 문이 열리고 나은별이 들어왔다. 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민준이 얘기 나도 들었어. 신씨 집안에서 그렇게 됐다며... 나랑 진수를 봐서라도 한 번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신씨 집안의 안주인이 내 어머니 사촌 동생이야... 내가 다 알아봤어. 그냥 단순 사고래. 재원이가 다연 씨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준다고 꽃을 사 왔는데,
온다연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달려가서 유강후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아저씨, 저 무서워서 못 자겠어요...”이제야 분노의 기운이 줄어든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온다연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꼭 잡고 있었다.“저 자꾸만 화분이 떨어지는 꿈을 꿔요. 피가 사방에 흐르고 너무 아팠어요...”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제가 아저씨 곁에 있어서 미움을 사게 된 걸까요?”유강후는 손을 우뚝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누가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장화연도 뒤이어 들어왔다. 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보고 나서 유강후에게 말했다.“다연 씨가 악몽을 꾸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이러다 또 아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주 선생한테 연락해 줘.”그는 손을 들어 온다연의 이마를 만져봤다.“내가 곁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니까 안심하고 자. 내일이면 다 해결될 거야.”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눈만 감으면 민준 오빠가 쓰러진 모습으로 가득해요. 저 무서워요. 하루코 씨도 자꾸 생각나요.”이다 하루코의 자살을 목격한 온다연은 심각한 충격을 받아서 며칠이나 실명했다.이 일은 유강후에게도 큰 교훈이었다. 그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다연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번 사고를 막지 못했다.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온다연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끝까지 조사할 거야. 다연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널 힘들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봐주지 않겠다고 했었잖아.”나은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았다.‘아까 그냥 확 죽여버려야 했는데...’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 씨
온다연은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모습으로 나은별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침에 화분 던진 사람 은별 씨 맞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받아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나 똑똑히 봤는데. 설마 발뺌할 생각이에요?”나은별은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말했다.“다연 씨 미쳤어요?”“내 앞에서 연기할 거 없어요. 나랑 아저씨가 어떤 사인지 발견하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요. 아니에요?”나은별은 잠깐 침묵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나약함은 완전히 사라졌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맞으면 어떡할 건데요? 나랑 강후 씨가 어떤 사인지 몰라요? 강후 씨는 다연 씨 말을 안 믿을 거예요.”“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나한테 더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은별 씨랑 결혼 안 하게 할 재주는 있다는 말이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나대지 마요. 이건 나랑 강후 씨 사이의 일을 넘어선 집안끼리의 약속이니까요. 시간 때우는데 쓰는 장난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강후 씨가 밖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거 반대 안 해요. 자주 있는 일이잖아요. 유씨 집안에서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걸 다 아니까요.”온다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나은별을 바라봤다.“혹시 연서라고 알아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연서라는 분이에요. 은별 씨랑 결혼한다고 해도 연서의 대용품으로 여겼을 뿐이에요. 그렇게 보면 은별 씨도 반려동물과 다름없지 않나요?”나은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설마 연서가 누군지 몰라요? 하, 아니다. 다연 씨 말이 맞아요. 강후 씨는 연서를 제일 좋아해요. 버림받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그 이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씨 집안사람 앞에서도요.”‘유연서를 강후 씨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지?’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재수 없는 년, 내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거야?”심미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시 한번 온다연의 뺨을 때렸다.“얼마나 지났다고 하령이를 이어서 민준이까지 이렇게 만들어?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네가 이러면 내 처지가 어떻게 돼?”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온다연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온다연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심미진 씨가 언제 저를 키워줬다고 그래요? 심미진 씨는 잘 알잖아요. 알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양심에 찔리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유씨 집안에서 어떤 취급 받으며 살았는지 잊었어요? 유민준이랑 유하령이 저를 괴롭힐 때, 심미진 씨는 어디에 있었죠?”심미진은 순간 멍해졌다. 이게 정말 온다연인가 싶었다. 온다연이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온다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온다연은 심미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에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인연을 끊었어요. 심미진 씨는 더 이상 제 이모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심미진 씨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제 앞에서 예의 좀 지켜요.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으니까요.”나은별 앞에서 면박을 당한 심미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없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길가에서 굶어 죽었을 거라고! 내가 널 숨겨주지 않았다면, 네 도박꾼 아버지가 진작 널 팔아버렸을 거야!”그녀는 말하다 말고 문득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죠? 제 아버지요?”그녀의 아버지 온준용은 10년 전 첩과 첩의 아들도 함께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했다.심미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내 뜻은... 너희 엄마가 죽고 나서 팔아넘기
온다연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된 건 유강후의 잘못도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던 유강후의 말만 아니었어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유강후를 포함한 유씨 집안사람 모두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온다연은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름다운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연약한 몸집으로 가만히 서서 대화를 거절했다.오늘은 동짓날이다. 주한이 있을 때는 항상 양갈비를 사서 고소한 국물을 만들었다. 그녀와 주희는 곁에 서서 군침을 흘리고는 했다.주한은 국물에 당근과 상추도 넣었다. 그녀의 그릇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고추 양념도 넣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겨울과 연상 되는 맛이었다.거위 털 같은 눈은 겨울바람과 함께 마구 휘날렸다. 이 세상 전부 하얗게 뒤덮을 기세였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온다연이 계속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장화연은 양털 카디건을 걸쳐줬다.“오늘 저녁 폭우가 내린답니다. 기온은 영하 20도로 떨어집니다. 따듯한 거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준비시키겠습니다.”온다연은 이제야 몸을 움직이며 구월이를 내려놓았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갔어요?”“네, 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에 들어올 리는 절대 없습니다.”“유민준은요?”“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셋째 도련님이 아직 안 돌아오신 걸 봐서는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말없이 구월이를 쓰다듬었다.“집사님은 혹시 연서가 누군지 알아요?”장화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몸이 굳었다. 유연서와 유강후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아이들이다.그녀는 10대 때부터 두 사람을 보살펴왔다. 기억 속의 천재 소녀 유연서는 그녀를 화연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좋은 것이 생기면 항상 그녀부터 챙겨주고는 했다.그러던 10년 전, 천재 소녀는 한낱 독감 때문에 비 오는 날 생을 마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너무나도 아픈 일이라 유씨 집안사람도, 강씨 집안사람도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정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렸다. 유강후는 마침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눈보라가 거셌는지 그의 어깨에는 눈꽃이 쌓여 있었다. 그는 냉기를 뿜어내며 무거운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구월이를 내려놓고 그의 코트를 벗겨서 걸어놓았다. 그러고는 따듯한 차를 따라주면서 물었다.“민준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입을 맞췄다.“아직 혼절 상태야.”“아저씨도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목이 완전히 드러나는 스웨터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뽀얀 목선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은 아주 유혹적이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예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고 침실에 가려고 했다. 그의 변화를 느낀 온다연은 황급히 말했다.“안 돼요. 저녁 먹을 시간 다 됐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내가 더 급해.”걱정거리가 많았던 온다연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세게 반항하면서 말했다.“싫어요. 지금 그럴 기분 아니에요. 억지로 이러는 거 싫어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민준 때문에 그래?”“...네.”“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저니까요.”유강후는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걔가 좋다는 거야, 뭐야?”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말도 안 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친구 얘기 꺼내지 마. 네가 이상한 친구를 사귀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친구는 필요 없어, 알았지?”유강후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저녁 식사를 끝낸 장화연은 침실 문에 노크하려고 했다. 그러나 침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신음과 온다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거
이렇게 3, 4일 동안 난리를 치다 보니, 유씨 집안사람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새엄마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했던 심미진도 사흘 밤낮을 새운 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었다.유자성은 창가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돌아서며 말했다.“제가 온다연을 데려올게요.”이 말을 들은 강해숙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안 돼! 난 그년을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은 계속해서 말했다.“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민준이 아무도 가까이 오게 하지 않아서 의사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온다연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온다연을 불러서 며칠간 돌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바꾸거나 검사를 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심미진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그건 강후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강해숙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 민준이는 그년 때문에 다친 거니까, 와서 며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 참 지독한 년이지. 민준이가 이렇게 다쳤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네. 천성이 나쁜 건 역시 어쩔 수 없어. 저건 집안 내력이야.”말을 마친 강해숙은 또 심미진을 흘겨봤다. 심미진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당장 강후한테 전화해서 그년을 데려오라고 해. 친조카를 놔두고 왜 남을 싸고돈단 말이냐! 강후 걔 유씨 집안사람이 맞기는 한지, 전화해서 물어봐!”유자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제가 전화해 볼게요.”유강후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온다연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월이와 놀고 있었다.유자성의 말을 듣고 유강후는 가볍게 응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온다연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으며 말했다.“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민준이 좀 보자.”온다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자 유강후가 다시 물었다.“넌 가고 싶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안 가도 죽지
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유민준을 보았다.그는 키가 컸고, 또 유민준은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었던지라 유강후가 그를 내려다볼 때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유민준은 어릴 때부터 그를 두려워했었다. 비록 어릴 때 일과 만났던 사람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강후를 보며 느끼는 두려움은 뼛속까지 새겨진 두려움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그가 내려다보니 유민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다만 유민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온다연의 손을 잡은 유강후의 손으로 갔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유강후에 대한 두려움마저 이겨버렸다.“그 손 놓으세요! 다연이는 제 여자친구예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유민준, 정말로 기억 상실이어야 할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당장 아프리카 정글 같은 곳에 던져 버렸을 거니까.”지금 유민준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오직 온다연만 남았다.온다연을 보았을 때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령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온다연에 관한 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그는 머리가 아팠다.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 얼른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그러나 유민준은 미쳐버린 사람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공격했고 심지어 병원 의료 기계마저 밀쳐 망가뜨렸다.그는 고통스러운 눈길로 온다연을 보았다.“다연아, 내가 잘 못 했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나한테서 그만 멀어지면 안 돼?”온다연은 이성을 잃은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유강후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자신을 무서워하며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숨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그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링거 줄을 확 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르겠지만 유강후를 밀어낸 뒤 뒤에 있던 온다연을 꽉 끌어안았다.그리곤 다급하고 불안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다연아, 예전의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한테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