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후, 온다연과 주희는 동교 묘지에 나타났다.온다연은 싱싱한 데이지 꽃다발을 주한의 묘비 앞에 놓고 그의 차가운 사진 위에 손을 놓고 살며시 쓰다듬었다.사진 속 소년은 주희와 닮은 꼴이었고 대략 열일곱, 열여덟 살의 나이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깔끔한 미간을 가진 그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자 주희는 다가가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누나, 슬퍼하지 마세요. 형님도 누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형님은 평소에 누나가 웃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어요.”온다연은 눈을 감고 그날 밤 유하령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그 빌어먹을 년은 분명 주한은 스스로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은 줄 알고 있을 거야. 그년은 그렇게 주한을 좋아했으니 주한의 진짜 사인을 알게 되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거야. 정말 그년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당시 주한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 나올 꺼야. 그 희생양들은 째지도록 가난해. 그때 가서 그들에게 돈을 좀 쥐여줘서 그년을 강간하게 하고 그년이 침대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그년은 이름 날리게 될 거야. 그때 가면 어느 학교에서 그런 년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온다연은 반드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려 했다. 그녀는 주한이 절대 헛되이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주희는 뒤에서 많은 말을 했는데 대체로 다 옛날얘기였다.주한과 온다연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후에 온다연이 이사를 하고 주한은 그녀를 한참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온다연이 다니고 있는 새 학교를 찾았다고 했다.하지만 후에 주한은 매번 온다연의 학교에 갈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온다연은 손톱이 살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주한의 묘비 앞에 한참 앉아 있다가 온다연은 또 다시 어머니의 묘비 앞으로 갔다.그녀는 어머니께 흰 장미 꽃다발을 가져왔다.어머니는
그러자 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낮춰서 차에 올랐다.유강후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 식탁 위에는 풍성한 점심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식탁의 가운데에 있는 옥으로 된 꽃병에는 은은한 향이 풍기는 흰 장미가 꽂혀 있었다.그 향기는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유강후는 지금 창가에 서서 전화를 치고 있었다.여전히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훤칠한 몸매에 차갑고 고귀한 기질을 뽐냈다.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고 하얗고 부드러운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유강후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갑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전화에 대고 뭐라 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몇 초 동안 쳐다보았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손등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차갑게 말했다.“집사가 넌 오전에 약도 안 먹고 떠났다고 했어.”온다연은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얇은 앞머리가 깔끔한 이마에서 펄럭이고 긴 속눈썹은 가볍게 떨렸다.온다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어머니 제삿날이 다가와서 묘지로 갔어요.”온다연은 유강후가 또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할 줄 알았는데 유강후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자.”온다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유강후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녀는 숨길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모든 것이 그에게 들통난 것 같았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짜 엄마 제삿날이라고요.”유강후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연아, 넌 내가 어머니께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여?”그 말을 들은 온다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이런 행동은 묵묵히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이때 집사가 가볍게 기침하고 말했다.“셋째 도련님, 몇몇 의류 브랜드의 사람들이 왔어요. 지금 저기
온다연은 한약을 먹는 게 너무 두려웠다. 게다가 눈앞의 이 약은 냄새가 고약했고 너무 쓰거웠으니 생각만 해도 위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꼭 이걸 먹어야 해요? 알약으로 바꿀 수는 없어요?”유강후는 약 그릇을 그녀 앞에 놓고 곶감 한 조각을 꺼내어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며 말했다.“말 들어. 이걸 입에 물고 약을 먹어.”이건 강요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곶감을 입게 물었다.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이 무심코 그의 손끝에 닿았다. 가볍게 순간이었지만 손끝 위에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몸이 굳어졌고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이권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러자 이권은 깜짝 놀랐고 이내 뭔가 알아차렸다. 그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바로 식당을 떠났다.달콤한 곶감은 계화 향이 강했고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달콤했다. 그래서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그러자 유강후는 갑자기 온다연을 안아서 자기 다리 위에 앉게 했다.온다연은 깜짝 놀랐고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삼촌?”유강후는 어두운 눈빛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다연이 반응하기도 전에 팔을 벌려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잘록한 허리는 푹신푹신했고 한 손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유강후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았다.온다연의 발은 정말 작았다. 어제 보았을 때도 엄청나게 작다고 느꼈지만 직접 쥐어보니 더 작게 느껴졌다. 너무 작은 나머지 막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충격과 당황에 휩싸인 온다연은 망연자실했고 마치 망망대해에 있는 작은 돛배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강후가 그녀를 꽉 안고 있자 온다연은 몸부림치는 것도 잊었다.차츰 몸이 약간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입은 옷 너머로 온다연은 유강후의 신체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안 돼요. 삼촌,
“삼촌, 제발요. 안 돼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치마로 들어가면서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착한 다연아. 겁낼 필요가 없어. 넌 내 사람이야.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거야. 내가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게...”그는 약간 거칠어 보이는 손으로 그녀의 몸 위를 헤엄쳤고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유강후는 그녀의 풋풋한 반응에 매우 만족해하며 온다연의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우리 다연이는 정말 말 잘 듣네. 이따가 보상을 줄게.”“전... 저는 보상이 필요 없어요. 빨리 내려주세요...”하지만 온다연을 놓아 줄 유강후가 아니었다. 그는 패기 넘치게 입술과 혀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감싸고 있었고 그녀는 숨이 막혔다.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셋째 도련님...”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며 온다연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그 사람의 방향에서는 털이 보송보송한 작은 머리만 보였다.그 사람도 얼떨떨해져서 입구에 서서 들어갈지 물러설지 어쩔 바를 몰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꾹 누르면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꺼져!”그 사람은 놀라서 몸을 떨며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온다연은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유강후의 옷을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저 사람은 누구예요. 방금 저를 보았어요...”유강후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야.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온다연은 심장이 빨리 뛰었고 놀랍고 두려웠기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혹시 유씨 가문 사람인가요? 혹시...”그녀의 이런 반응에 유강후는 속이 뜨끔했고 순간적으로 냉정을 되찾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아니야. 유씨 가문 사람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거야.”온다연의 몸은 여전히 떨렸고 그의 품에 웅크린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혹시 유민준 씨에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온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곱슬곱슬한 속눈썹은 가볍게 떨렸다. 그 모습은 마치 새끼손가락으로 유강후를 톡톡 치며 유혹하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그윽한 눈으로 온다연은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가자.”작은 거실 쪽에는 이미 서너 명이 앉아 있었다. 말이 작은 거실이지 사실 작지 않았다. 무려 70, 80평 미터에 달하는 심플한 한옥 다실 디자인에 설명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세 중년 남자는 어색하게 서 있었고 그들 옆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은 새 옷들이 놓여 있었다.이 세 사람은 모두 경원시 패션계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대리 판매하고 있는 브랜드는 시중에 나와 있는 국내외의 거의 모든 브랜드를 망라할 정도로 풍부했다. 비록 그런 대단한 인물들이지만 유씨 가문 앞에서는 그저 옷 장수일 뿐이다.유강후가 그들이 대리하고 있는 여성복 브랜드 몇 개를 고르려고 하자 세 사람은 들떠서 잠을 설쳤다고 한다.경원시에서 유씨 가문과 친해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기도 하다.오래 기다린 끝에 유강후가 도착했다.원래는 유씨 가문 아가씨가 옷을 고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소녀일 줄이야.소녀는 17, 18살 정도 돼 보였고 검은 머리에 빨간 입술 덕에 미모가 더 돋보였다. 남자의 혼을 쏙 빼놓을 법한 비주얼에 쓸쓸하고 수줍음이 많은 눈을 가졌다.유강후를 모시기 쉽지 않을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존귀하고 도도해 보이는 유강후는 별로 까다롭지 않았다. 그는 많은 옷을 골랐고 소녀는 싫었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삼촌. 충분해요.”소녀는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애간장을 태웠다.그러자 유강후는 마치 흉악한 늑대가 어린 양을 보듯이 탐욕스럽고 거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고 그녀를 당장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몇몇 대리상들은 속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그들은 유씨 집안에 아가씨라곤 유하령만 있다는 것
유강후는 온다연이 아주 피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주무르며 물었다.“피곤해?”온다연은 고개를 들지 않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유강후가 고개를 숙이자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작은 발이 보였고 하얀 발가락이 밖으로 튀어나온 모습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졌다.“신발도 아직 고르지 않았는데.”대리상은 그 말을 듣자 비서에게 눈치를 줬다. 비서는 곧 신발을 안고 뛰어 들어와 재빨리 가지런히 전시했다.운동화부터 낮은 굽까지 그리고 하얀색, 은은한 파랑과 핑크색까지 모두 있었다. 신발 끈에도 하얀 진주가 박혔다. 모든 신발은 소녀다운 디자인이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걸상에 앉히고 한 켤레씩 신어보라고 했다.그녀의 발은 작고 발목은 특히 가늘었다. 발가락의 모양마저도 예뻐서 대리상 중 한 명은 그녀를 몇 번을 보고도 눈을 뗄 수 없었다.잠시 후 그는 재빨리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유강후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강후의 눈에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고 언제든지 그를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자 대리상은 깜짝 놀랐다. 유씨 가문 셋째 도련님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유강후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독하다는 소문 말이다. 대리상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고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온다연은 두 켤레를 신어보고는 더 이상 시도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발가락을 슬리퍼에 걸치고 발을 동동 굴렀다.“삼촌, 다 너무 커요.”대리상은 그 말을 듣자 얼른 말했다.“225사이즈인데도 커요? 장 집사님이 분명 225라고 했는데...”그러자 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220밖에 못 신어요. 어떤 신발은 215도 신을 수 있고요...”그러자 대리상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렵게 얻은 미래 그룹과의 협력 기회를 놓칠까 봐 조마조마해했다.“당장 220 사이즈를 찾아와...”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안은 채 거실로 걸어갔다.“일단 다 필요 없어요. 다음에
온다연은 유강후가 또 이상한 행동을 할까 봐 몸을 뒤로 움츠리고 옆에 있는 의사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저 사람들은 누구예요?”유강후는 그제야 돌아서서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발라주세요.”이 의사는 딱 봐도 소양이 아주 뛰어났고 약을 바르는 과정에도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 묻지 않았고 온다연의 정체에 관해 묻지도 않고 조용히 치료에 집중했다.그리고 파상풍 주사를 맞고 물을 다치면 안 된다고 귀띔하고 떠났다.의사가 떠난 후 온다연은 다시 유강후를 마주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졌다.오늘은 분명히 주말이 아닌데 유강후는 출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미래 그룹을 인수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한가할까? 분명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처럼 쌓여야 하는 게 아닌가?유강후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오늘 오후에는 집에 있을 거야. 너도 푹 쉬어. 나는 서재에서 일할 거고 저녁에는 모임이 있으니 나랑 함께 가자.”온다연은 가기 싫다고 차마 말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사실 잠시도 이 방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아침에 도망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강후는 분명히 다시는 자신을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방에서 자는 것밖에 없다.온다연은 겨우 반나절 밖에 있었는데 방 안에는 몇 가지 물건이 더 늘었다. 그녀는 이런 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작은 베란다에 있는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리고 나서 임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임혜린은 매달 며칠 동안은 전화도 안 되고 메시지도 답장을 안 하는 수상한 버릇이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6, 7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다.온다연은 너무 지루해서 침대에 누워 뒹굴 수밖에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유강후가 방금 뽀뽀한 장면이었다.생각할수록 끔찍했다. 온다연은 자기 입술을 만지면서 입술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서서히 유강후가 만졌던 모든 피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이때 마침 공기 중에서 은은한 장미향이 풍기
유강후는 멈칫거리더니 천천히 말했다.“유씨 가문 사람들은 없어.”마치 무슨 설명이라도 하는 듯하여 온다연은 더 긴장되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다.하지만 이 말을 감히 내뱉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입 옆에 있던 점은 피가 날듯 말듯 한 빨갛게 되었고 그녀의 입술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유강후는 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과 옆에 있는 점을 어루만졌다.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예전에 뽀뽀해 본 적이 있어?”안 그래도 긴장한 온다연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받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눈빛에는 막막함과 당혹감이 느껴졌다.유강후는 그녀의 풋풋한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넌 내꺼야. 알겠어?”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경고하는 듯 말했다. 무서운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말이다.온다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유강후를 바라보았고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삼촌은...”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렸다.“겁이나?”그의 눈빛은 매섭고 차가웠으며 온다연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악함도 있었다.마치 온다연이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것처럼 말이다.온다연은 몸을 떨며 눈을 내리깔고 감히 유강후를 쳐다보지 못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싫은 거야 아니면 겁이 나는 거야?”온다연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파요.”온다연은 고의로 아프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팠다. 유강후는 마치 통제 불능이 된 듯 그녀의 턱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리고 미소가 사라졌고 온다연의 턱을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빠지지 않았으며 공기 중의 냉기가 더욱 짙어진 것 같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