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인데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니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다.항상 풀메이크업을 하던 얼굴도 민낯 그대로라 어려 보이고 이목구비가 깨끗하면서도 화사해 보였다.하지만 얼굴이 눈물범벅인 것을 보니 조금 전에 울었던 것 같다.그녀는 유강후를 보고 황급한 기색을 띤 채 걸음을 멈추었다.“유 대표님...”유강후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들어가 봐요.”남하윤은 눈물을 닦더니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 유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아버지가 저를 풀어주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오늘에야 주희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어요...”“주희는 지금 좀 어때요?”유강후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을 말하듯 극히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4층에서 뛰어내려 장기를 다쳤는데, 응급 수술을 한 후에 한 달 동안 누워 있다가 오늘에야 깨어났어요.”남하윤은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졌다.“혹시 불구가 됐나요?”“아니요. 게다가 예전과 똑같이 성질이 더러워요. 들어가 보면 알아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하윤은 극히 복잡한 눈빛으로 유강후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온다연을 쳐다보았다.이를 발견한 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남하윤 씨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주희가 남하윤 씨랑 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남씨 집안 아가씨의 눈에 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데. 저 자식은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남의 것을 넘보고 있으니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없어.”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괴롭히지 마세요.”“나이가 어리다고? 나는 저 나이일 때 미래그룹 경영을 맡았어. 그리고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심리적 연령이 실제보다 높아. 연하남이 순진한 척, 거친 척하는 것은 다 수단일 뿐이야.”온다연은 잠자코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어쨌든 앞으로 자주 만나지 않을 테니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다물었다.위층에 올라가니
온다연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그동안의 불안과 걱정을 한순간에 보상받은 느낌이랄까.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조산했을 때 20주밖에 되지 않아 십중팔구 살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기적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의 작은 손을 살짝 건드렸다.아기는 잠들어 있었지만 손을 꼼지락거리며 반응을 보였고 가냘프게 옹알거렸다.그 부드러운 촉감이 온다연에게는 꿈만 같았다.그녀가 이렇게 자기 아이를 만진 것은 처음이다.이전에는 문밖에 멀찍이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이제 그녀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다.아직 안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살짝 만지고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굉장히 만족했다.그녀는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탐욕스럽게 훑어보았고, 그 진지한 모습은 마치 아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것 같았다.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영원히 그녀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그녀를 버리지 않을 아이가 생겼다.그녀는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함께할 것이다. 이렇게 조그마한 아기에서 점차 소년이 되고, 소년에서 아빠처럼 키 크고 듬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그녀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동요를 불러주며 눈이 올 때는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여름의 밤바람 속에서 함께 잠자리를 잡을 것이다.꽃이 만발한 산비탈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고상한 음악 연주를 듣기도 하며 함께 긴 거리를 거닐며 인간 세상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그녀의 모든 희망과 사랑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이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그녀가 눈시울을 붉히자, 유강후는 마음이 아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울지도 마. 이제는 정상적인 아기와 똑같아. 며칠 더 지나면 안을 수도 있어. 그때 실컷 안아주면 돼.”온다연은 여전히 뚫어져라 아기를 들여다보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너무 기뻐서 눈물이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보더니 말했다.“여기서 아기를 좀 더 보고 있어. 전화 좀 받고 올게.”아기에게 정신이 팔린 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그래요.”방에서 나온 유강후는 직접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남하윤은 주희의 병실에 없었다.주희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기대어 앉아 사람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이 날이 선 눈빛으로 유강후를 쏘아보았다.유강후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키가 큰 데다 카리스마가 있어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아도 상대방을 작아지게 한다.그런 그가 이렇게 내려다보면 상대방에게 한없이 비천한 느낌을 준다.주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강후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비천하고 어두운 생각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출신과 무능함이 싫었던 적은 없다.하지만 유강후에게 이런 생각을 들키면 안 된다.그는 일부러 경멸의 눈빛을 지었다.“당신은 나를 구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유강후, 나는 당신을 누나 곁에 두지 않을 거야.”유강후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떻게 막을 건데?”“스타인 너의 인지도로? 아니면 남씨 집안 아가씨의 재력으로?”그는 말하면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더니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워.”“그리고 남씨 집안은 절대 너를 위해 나와 맞서지 않을 거야.”“주희야, 좀 똑똑하게 굴어. 네 형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다연의 마음을 잘 이용하고 나랑 얘기할 때 예의를 갖추면 너한테 많은 득이 될 거야.”“스타가 아니라 엔터 회사를 차리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아.”그는 거들먹거리면서 주희를 힐끗 보았다.경멸에 찬 그 모습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안타깝군. 온다연의 관심을 끌려고 투신자살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주희는 화가 나서 이마에 핏줄이 섰지만 억지로 분노를 참으로 코웃음을 쳤다.“다른 사람의 존중 따위는
“3월 25일까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그날이 정말 기대되네.”“그날이 되면 누나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형을 그리워할 거야.”“그 스카프는 누나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형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누나는 정말 좋아했어. 그때는 아까워 매지 않았지만 형이 죽은 후 매년 그날이 되면 그 스카프를 매고 형을 추모했어.”유강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무척 기분 좋아진 주희는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누나가 입은 흰색 옷들은 당신이 골라준 거지? 불쌍하네. 이렇게 오래됐는데 누나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누나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해바라기색도 좋아해...”유강후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속에서 분노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온다연이 해바라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하지만 주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온다연은 확실히 빨간색 스카프를 가지고 있다.버들개지가 흩날리던 어느 날 저녁, 본가의 대문 밖에 온다연이 검은색 옷차림으로 서 있었는데, 평소에 본 적이 없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그때는 봄인데도 날씨가 추워서 스카프를 매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 스카프를 맸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날 저녁, 유강후가 차를 몰고 그녀의 곁을 지나갈 때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휘날렸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석양 아래서 먹물 같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옷차림 때문인지, 피부가 눈보다 더 흰 것 같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버들개지가 눈송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슬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그녀는 조금 전에 울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얌전히 거기 서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당시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었다.바로 그 순간, 유강후는 인내심을 잃고 앞당겨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
이때 밖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이권이 뛰어 들어와 유강후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말렸다.“셋째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이 사람이 죽으면 온다연 씨한테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유강후는 눈이 빨개지며 몸에서 독기를 내뿜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체형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 얼굴이 바꾸면 돼. 어차피 다연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알아보지 못할 거야.”그가 말하면서 손에 힘을 주자, 주희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조금 전까지 발버둥 치던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눈도 감았다.온다연이 만나기 싫어한다는 말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이권은 곧 큰일 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뭔가 하시더라도 여기서 하시면 안 돼요. 도련님, 손을 놓으세요.”이때 남하윤도 들어왔다.그녀도 이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달려와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팔을 잡아당겼다.“대표님, 제발 놔주세요. 주희가 성격이 안 좋아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을 거예요. 제가 즉시 데려가겠습니다.”하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움직일 수 없었다.엉겁결에 온다연이 생각난 남하윤이 즉시 소리쳤다.“대표님, 온다연 씨와 곧 결혼하실 텐데, 결혼 전에 인명 사고가 발생하는 건 좋지 않아요. 불길하잖아요.”“그리고 이곳은 병원이고, 온다연 씨가 바로 위층에 있어서 소동이 커지면 알게 될 거예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눈에 더욱 독기가 서렸지만 천천히 손을 놓았다.이를 본 남하윤이 급히 주희를 붙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이건 마지막 경고야. 또 한 번 나와 온다연의 일에 참견하면 그때는 남씨 가문도 너를 지키지 못해.”그는 남하윤을 힐끗 보았다.“데려가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요. 매번 선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음에는 남하윤 씨 체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잠깐 사이에 그는 차분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금 사람을
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주희야, 남하윤 씨는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도 잘하니까 잘 만나 봐. 더 이상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하지 말고. 뭐가 소중한지를 알아야 해.”주희는 눈을 내리깐 채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아요?”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주희야, 내게는 사랑하는 아기가 있어.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너도 앞으로 나아갈래?”조용히 웃는 주희, 웃는 모습이 우는 것 같았다.“누나, 예전에 우리 셋이 약속했잖아요. 누나가 집을 받으면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살기로. 이제 나는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 집을 받지 않아도 돼요. 나랑 함께 떠나는 게 어때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옛날 일을 가지고 역겹게 굴지 마. 나와 다연은 아이가 있고 곧 결혼도 할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어.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주희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유강후를 가리켰다.“누구나 다 되지만 저 사람은 안 돼요. 유강후는 유씨 집안 사람이잖아요.”“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요? 유씨 집안 사람한테 죽임을 당했잖아요. 누나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반대할 권리가 없지만 유씨 집안 사람은 안 돼요.”온다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주희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도 알잖아. 이제 아기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고, 내 아이의 아빠면 돼.”주희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는 우리 형과의 약속을 잊었네요. 스물다섯 살 때...”온다연이 직접 그의 말을 잘랐다.“그건 나와 네 형 사이의 일이니 너와 상관없어.”그녀는 주희 옆에 있는 남하윤을 쳐다보았다. 남하윤은 극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희야, 나는 앞으로 내 아이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거야.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니까
유강후는 몸이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쳐든 후 그의 턱에 뽀뽀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우리가 그 일은 하지 않았다고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들었고, 몇 걸음 만에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자주 묵던 방에 들어선 그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자기 다리에 올려놓은 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머리가 쭈뼛 섰다.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온다연은 어떻게 해야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몰라 가녀린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아저씨, 저, 저는 정말...”유강후는 굳은 얼굴로 젤리같이 매혹적인 그녀의 입술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뽀뽀한 적은 있어?”온다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연인도 아닌데 왜 뽀뽀를 하지?’하지만 이마에 뽀뽀한 적은 있다.그래서 그녀는 성실하게 대답했다.“이마에 뽀뽀한 적이 있어요.”그녀를 껴안은 유강후의 손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온다연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위를 맞추고 용서를 빌려는 의미가 다분했다.하지만 질투심에 불타는 유강후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응대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전에는 이 방법이 가장 잘 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뽀뽀해 주면 다 해결됐다.하지만 오늘은 뽀뽀해 줘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그녀를 서럽게 했다.온다연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저를 상대하기 싫어요? 그러면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유강후는 여전히 말없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더욱 서러워진 온다연은 천천히 그의 몸에서 내려
이권은 조금 놀랐다.“하지만 지금은 저녁인데요...”유강후는 코트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해서 나랑 같이 가.”유강후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이권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한 시간 뒤, 유강후와 이권은 온다연이 이전에 살던 옛집 맞은편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철거 예정이라 이곳의 도로와 담장은 보수되지 않은 상태였고, 비까지 내려 길이 매우 질퍽거렸다.가로등도 없고 근처의 고층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존했다.이권은 한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다른 한 손에 방금 매점에서 구매한 손전등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셋째 도련님, 길이 너무 형편없네요.”돌길에는 흙탕물이 넘쳐흘렀고, 양쪽의 집들은 비어 있는지 처마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유강후는 그의 손에서 손전등을 낚아채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이 길이 걷기 어려워? 권아, 넌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어.”이권은 유강후의 그 비싼 옷이 아까워서 한 말인데, 그가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전등을 비추며 골목 끝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들이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두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옆집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그들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이 집 사람을 찾아왔어요?”이권이 급히 담배 한 대를 건넸다.“형씨, 이 집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셔요?”그 사람은 담배를 받더니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몰라요. 저는 그냥 물건을 가지러 잠깐 들렀을 뿐이에요.”“이 집은 할머니와 남편분이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집인데, 곧 철거에 들어가요. 아들이 몇 번이나 모셔가려고 왔지만 한사코 버티고 있어 철거팀과 주민위원회도 방법이 없나 봐요. 이 시각에 문을 두드리면 쫓아내려고 그러는 줄 알고 문을 열지 않을 거예요.”이권이 웃으며 말했다.“혹시 할머니 아드님 전화번호를 받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