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도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라 차가 많진 않았지만, 자칫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차선을 바꿔 사고를 면한 뒤차는 경고와 분노가 담긴 클락션을 계속해서 울려댔다. 어떤 차는 창문을 내리고 운전석을 향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얼마나 살벌한지 혹시나 싸움이라도 발생하는 건 아닐까, 채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다르게 옆자리에 있는 태건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급정거할 때 앞으로 쏠리면서 구겨진 옷 주름을 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럴 수가 있나 한편으론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죠?”
그가 태건이 아닌 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임신이라는 말도 웃기는데, 뭐? 이혼?
틀림없이 제 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다르게 굳게 다물린 채원의 입술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눈치만 보는 그녀의 옆에 있던 태건이 픽 웃으며 말했다.
“왜 말을 못 해?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줄 알겠네.”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투에 채원의 눈이 매섭게 그를 쏘아봤다.
제 딴엔 매섭게 쏘아봤다고 생각했지만, 태건의 눈엔 그저 작은 새끼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운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사모님.”
그때 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얼렁뚱땅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진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에, 어쩌면 그 이상의 사이에 어떠한 일이 오갔던 것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도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비를 하거나 수습을 할 수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묵직한 한마디에 채원은 다시 꼬리를 내리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올라갔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남편은 저인데, 외간 남자 앞에서 눈치만 보면서 할 말도 못 하는 모습이 꽤 불쾌하게 다가왔다.
아니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태건이 결국 한숨을 내뱉으며 대신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장 비서님도 알잖아요. 회장님이랑 신 여사가 손주 타령을 얼마나 하는지.”
태건의 말에 지훈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귀찮다는 듯 말하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표정만 봐서는 거짓말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란 확신이 서진 않았다.
“…… 진짜입니까?”
지훈의 물음에 태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지훈이 되물었다.
“그럼, 이혼 얘기는 뭡니까?”
지훈의 물음에 태건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말했잖아요. 회장님이랑 신 여사, 손주 타령이 심하다고. 그거에 윤채원이 나름대로 압박을 좀 많이 받았던 건지 나한테 묻더라고. 혹시 계속 이런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거냐고.”
태건이 미간을 좁히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태건을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돌려 채원을 바라봤다.
“…… 정말입니까?”
지훈의 물음에 채원은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묘하게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혼을 요구한 건 결국 이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말이고, 아이가 없는 것도 이혼의 정당성으로 쓸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했으니까.
지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궜다.
“제발, 부탁인데. 저 간 떨어지는 일은 만들지 마십쇼.”
진심이 담긴 부탁에 태건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표정에 지훈은 저 잘난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을까 짧게 고민했지만 이내 멈췄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지가 우선이었다.
“일단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회장님이랑 여사님이 유독 손주 소식을 보채기는 하셨죠……. 문제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수습하냐는 건데…….”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던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일단 제가 방법을 생각하기 전까지 최대한 회장님이랑 마주하는 일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처럼 몸이 안 좋다고 핑계를 대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지훈의 말에 태건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알았으니까 일단 빨리 집으로 좀 가죠. 피곤한데.”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건데. 지훈은 다시 한번 저 잘난 면상을 창문 밖으로 날려버리고 싶단 충동이 일었지만, 간신히 꾹 참았다.
“…… 그럼, 일단 출발하겠습니다.”
분노가 꾹꾹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지훈이 다시 핸들을 잡았다.
멈춰있던 차가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건은 정말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지훈은 운전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하느라 바빠 보였다.
조용한 차 안에서 채원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손톱으로 여린 살을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 * *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고, 지훈은 피곤할 텐데 쉬라는 말을 남기며 집을 떠났다.지훈이 떠나고 두 사람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채원은 혹시나 태건이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는 말없이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도, 주차장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태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정적 속에서, 결국 먼저 입을 뗀 것은 채원이었다.
“얘기 좀 해요.”
채원의 말에 방으로 향하던 태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혹시 피곤하다며 그대로 들어가 버리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의 태건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태연한 그의 목소리에 채원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좀 알고 싶어요.”
“말했잖아. 회장님이랑 신 여사가-” “장 비서님한테 둘러댈 핑계라는 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채원의 말에 태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건 그저 그 잠깐의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였다. 채원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해서 만든 핑계와 거짓말.
태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핑계였어.”
“…….” “그럼, 네가 한 말도 그냥 핑계였어?”태건의 물음에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어느 정도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했어요.”
“합당한 이유…….”채원의 말을 반복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냥 내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으니까 버리려는 거 아니야?”
비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리는 태건의 말에 순간 그녀가 울컥했다.
“멋대로 그렇게 말하지 마요.”
“내가 뭘.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그나마 가능성 높은 장남이라 골랐더니 5년째 발전은 없고, 이젠 사생아한테까지 자리를 뺏길 것 같잖아.”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함부로 말하지 마요!”자조적인 태건의 모습에 순간 울컥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언성을 높이고 나서 자신도 조금 놀란 건지 채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렇게 큰소리를 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녀는 단 한 번도 태건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러한 이유로 이 결혼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채원의 언성에 태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도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뭘 함부로 말했다는 거예요?” “이혼하자며.”순간 올라갔던 온도가 차갑게 내려갔다.
요즘 들어 강태건은 계속해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혼하자고 한 게, 대체 어디가 함부로 한 말이란 것인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채원의 말에 태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러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무 어이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채원에 태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혼은 안 해.”
“대체 왜요?” “뭐 하나만 물어보자.”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채원은 말하려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말이 통할 상태는 아니었다.
“이혼하려는 이유가, 혹시 내가 싫어서야?”
이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인데.
채원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오히려 되묻고 싶어졌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지, 아니 애초에 우리 둘 사이에 좋고 싫고가 중요한 문제인지.
하지만 채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질문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어떤 단어도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채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건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대답 없는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보네.”
대체 어떻게 하면 그걸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제 멋대로 판단하는 해석 능력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쯤 되니 채원은 이 대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얘기 좀 하자며 대화의 물꼬를 텄던 자기 잘못이 아닐까, 자책도 들었다.
“이게 내가 이혼을 못하는 이유야.”
“……?” “내가 싫은 게 아니잖아.”아리송한 말에 채원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싫어지면 되는 건가? 깜빡거리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훤히 잘 보였다. 그 생각이 너무도 선명하게 읽혀서 태건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윤채원이 싫지는 않아.”
“…….”태건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올라간 입꼬리가 그린 호선이 꽤 부드러워서, 채원은 하마터면 이 순간이 달콤할 수도 있다는 착각을 느낄 뻔했다.
물론, 이건 헛된 망상이고 멍청한 생각이란 걸, 윤채원은 잘 알고 있었다.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