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주말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의 대건 그룹은 평소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블라인드에서도, 로비에서도 보이는 얼굴마다 서로 소문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택 안의 사람들은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놨는데 또 어디서 소문이 샌 건지.
태건의 비서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느긋하게 걸어본 적 없던 지훈은, 오늘도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부장님 아기 생겼다는 게 사실이에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머릿속에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던 순간 옆에 있던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인사는 한 번 제대로 나눈 적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낯선 남자였다. 사실상 일면식도 없는 인간인데,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성격인가 보다.
아침부터 귀찮게. 지훈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형식상 쓰는 안경을 고쳐 올렸다.
“글쎄요. 제가 본부장님 사생활까지 간섭하진 않아서.”
“장 비서님이 본부장님 사생활도 관리하지 않아요?”꽤 예리한 질문에 지훈은 가볍게 그를 노려봤다.
그의 말이 맞긴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이름도 잘 모르는 직원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대체 이 직원들이 그런 걸 알아서 뭐에 써먹는지 의문도 들었다.
다들 주식이라도 하나씩 사뒀나?
“아무리 비서여도 선이라는 게 있죠. 본부장님은 어디 가서 본인 얘기하고 다니는 걸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거 신경 쓰실 시간에 본인 업무나 챙기시는 게 더 나을 듯싶네요.”
지훈은 냉정하게 답하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남자는 구석에 자리 잡고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깟 거, 국가기밀 사항도 아니고 알려준다고 회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유난 떨 건 또 뭐란 말인가.
누가 강태건 본부장 비서 아니랄까 봐, 성격까지 빼다 박았다. 어디서 저런 똑같은 인간을 구해서 비서로 쓰고 있는 건지.
뒤에서 느껴지는 눈총과 작게 들리는 볼멘소리가 은근히 지훈의 신경을 긁었다.
다 들린다고 경고라도 날릴까. 아니, 그러면 오히려 더 꿍얼거리는 목소리가 거슬리지 않을까. 그냥 지금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다른 걸로 갈아탈까. 그것보다 이 소문은 또 어떻게 잠재울지가 우선인데.
소음 속에서 머리를 굴리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안녕하십니까.”
열린 문틈 사이로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지훈은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직원의 볼멘소리를 듣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장 비서님이네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여유롭게 서 있던 유건이 지훈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지훈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딱딱하게 예의를 차리는 그를 보며 유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안녕하십니까! ESG 전략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오근혁 대리입니다!”
그때 뒤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러운 그의 목소리에 지훈과 유건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음? 나 알아요?”
경직된 자세로 서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유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날 아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걸까. 지훈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흘깃 그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유건의 질문에 남자는 꽤 많이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 당연하죠! 회, 회장님 둘째 아드님이신 강유건…….”
주먹까지 바르르 떨며 답하던 그가 말끝을 흐렸다. 지훈은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강유건. 지금 대건그룹에 퍼진 또 다른 소문의 주인공. 경영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해외에서 떠돌아다니기만 하면서 SNS에서 잘난 얼굴이나 보여주던 사생아.
나름 인플루언서 급으로 살던 그가 갑자기 회사에 출근한다는 건 가히 파격적인 소문이었다. 늘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던 후계자 싸움이 드디어 시작된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새로 출근하게 된 강유건의 직급이었다.
“근데 난 인턴인데?”
당연히 출근하게 된다면 태건과 비등한 조건의 직급을 받을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강 회장은 유건에게 인턴부터 시작할 것을 명했다. 어쩌면 그동안 해외나 돌아다니며 SNS만 한 대가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오너 일가의 둘째 아들을 인턴이라고 막 부를 수 있겠는가.
그의 직급을 알면서도 차마 그렇게 부를 수 없는 일개 직원의 처지를 그가 알기나 할까. 그저 어버버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가 지훈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유건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에이, 뭘 그렇게 겁먹고 그래요? 어차피 난 친아들도 아니고 직급도 인턴인데. 대리면 나보다 윗사람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해맑은 얼굴로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유건에 남자는 죽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여기서 대화가 더 이어졌다가는 곧 거품 물고 기절할 것 같았다. 결국 뒤에서 지켜보던 지훈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대화를 끊었다.
“신사업 팀은 15층입니다. 이 엘리베이터는 짝수 층만 운행하는 거라 잘못 타셨어요.”
지훈의 말에 고개를 돌린 유건이 당황한 소리를 내며 버튼을 바라봤다.
“엑! 진짜요? 헐, 왜 아무도 안 알려줬지?”
그야 아무나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지훈은 속마음을 삼키며 어깨만 으쓱였다.
지훈이 제일 가깝게 도착하는 층수를 누르자, 얼마 안 가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유건은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유유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문이 닫히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자 남자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아……. 진짜 소문대로 보통 성격 아니네…….”
다 들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남자에 지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올라가는 숫자만 바라봤다.
여전히 성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 전엔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에 조금 감동을 받은 건지, 남자는 아까보다 조금 풀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 비서님도 힘드시겠네요. 형제간에 기싸움도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그 사이에서 고생 좀 하시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지훈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금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해도 좀처럼 틈을 주지 않는 성격에 남자는 다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내릴 때까지 그의 볼멘소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지훈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엔, 그의 인생도 그렇게 평탄대로는 아니었다.
* * * 차라리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는 인생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지훈은 자신의 사고회로가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미세한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태건은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 소문. 내가 낸 거라고.”
적군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은 눈을 두어 번 정도 깜빡거리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던질만한 것을 찾는 그의 행동에 태건은 슬쩍 팔을 뻗어 책상 위 자신의 명패를 잡았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먼저 들어보는 건 어때?”
“유언이라면 들어드리죠.”살벌한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를 만들었다. 평소보다 더 화가 많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유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태건은 가장 먼저 쥐고 있던 명패를 책상 아래에 감췄다.
“아니, 장 비서님? 좀 들어봐. 듣고 생각해도 나쁘진 않아.”
“닥쳐. 너는 옛날부터 그 혓바닥이 문제였어.”진즉에 잘라버려야 했던 건데. 살벌하게 뜬 눈으로 가장 위협이 될 무기를 찾는 모습은 누가 봐도 진심이었다.
태건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아니, 아니. 이게 다 윤채원을 위해서야!”
태건의 말에 지훈의 손이 멈칫했다.
윤채원을 위해서? 그래서 윤채원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랑 강유건이 인턴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내?
살벌하게 뜬 눈이 매섭게 그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 설명을 똑바로 해야 할 거야.”
만일 조금도 상관관계가 없다면 즉시 저 망할 혓바닥을 뽑아버릴 것이다. 말은 못 해도 일만 잘하면 회장님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해주시겠지.
“윤채원이 이혼을 요구했어.”
살벌하던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임신, 거짓말, 가족 모임, 소문, 강유건…… 그리고 이혼?
뚝 끊어졌던 사고회로가 다시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씩 퍼즐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던 그가 당황한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그, 그럼 어제 했던 얘기가 진짜야?”
“임신은 아니야.” “그건 당연히 아니겠지! 네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쓰레기 새끼가 아닌 이상!”그 말은 어느 정도는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태건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작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왜? 아니, 아니지. 갑자기는 아닐 수 있겠다. 그래, 솔직히 5년이면 오래 버티긴 했어.”
“그 5년을 윤채원 혼자 보낸 건 아닐 텐데.” “그게 혼자 보낸 거지, 둘이 보낸 거냐? 솔직히 둘이 아무런 감정 없이 결혼한 건 알고 있었지만, 5년을 그렇게 남처럼 지낼 줄은 진짜 몰랐다.” “나름의 배려였어. 부부보단 룸메이트로 두는 게 낫지 않나?” “그건 아무도 룸메이트라고 부르지 않아.”냉정한 지훈의 말에 태건은 반박하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룸메이트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사이였다.
지훈은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차다 이내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협박이란 건 뭔데? 그냥 깔끔하게 이혼해도 되잖아.”
“할 거야.”예상과 전혀 다른 답변에 지훈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이렇게 순순히 할 거라는 답이 나온다고?
“…… 뭐야? 그럼, 임신이니 그딴 거짓말은 왜 했어?”
“그래야 그쪽에서 움직일 테니까.”진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아, 혹시 개X끼라 개소리만 하는 건가?
“나는 그냥 실시간으로 네가 개X끼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조금의 필터도 거치지 않고 생각을 내뱉는 지훈에 태건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 이중적인 모습을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오직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게 가끔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윤채원이랑 이혼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왜?”굳이 시간 끌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는 유예기간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훈을 보며 태건은 어느새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윤채원이 원하는 게 아니니까.”
“……?” “윤채원 본인이 원할 때, 그때 이혼할 거야.”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어두운 얼굴로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정인 재단 홈페이지 속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여성과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정인 재단 이사장, 백재연’
채원은 언젠가는 자신도 이 방을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8살이 되어도, 시간이 더 지나도 채원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언젠가 채원은 왜 자신은 유연과 달리 학교에 갈 수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백재연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날 채원은 하루 종일 방에 갇혀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채원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작은 손으로 아무리 두드리고 외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대꾸도 하지 마. 먹을 것도 주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여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쯧.”문 너머로 차가운 백재연과 남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채원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나는 욕심을 내면 안 되는 아이구나.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채원은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윤유연이라는 빛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기 위한 어둠. 그게 채원의 역할이었다. 그 어둠을 나오려는 건 그녀의 욕심이었고,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다.그렇게 빛도 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채원은 어쩌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일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건, 12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 *며칠째 집 안은 조용했다.정확히는, 채원의 방만 조용했다.복도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밤낮없이 울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들이 집을 드나들었다.늦은 밤이면 백재연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날은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유리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도 났다.그럴 때면 채원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요즘 들어 계속 무서운 소리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무서웠고 외로웠다.하지만 아무도 채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
정인 재단 이사장과 정인대병원 병원장 사이에는 완벽한 딸이 하나 있었다.신생아 시절부터 완벽한 외모를 갖췄던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출중한 외모를 뽐냈다. 길거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연예기획사, 모델 에이전시, 방송사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던 건지 그녀는 두뇌까지 부모를 닮아 명석했다.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며, 예체능까지 교내외를 모두 섭렵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였다. 집안, 인맥, 재력, 외모, 성적,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부부는 그런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모두가 이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모두가 하나같이 ‘완벽한 가족’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그들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이었다.윤채원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완벽하다고.그 가족사진에 채원은 없었다.* * *가족사진 촬영이 있던 날. 거실엔 사진작가와 보조 스태프들이 조명과 구도를 세팅하느라 분주했고, 한쪽에서는 메이크업 수정이 진행되고 있었다.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사진작가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준비 다 되셨을까요?”사진작가의 물음에 백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작하죠. 가자, 유연아.”백재연이 옆에 있던 딸을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그녀의 부름에 메이크업 수정이 끝난 유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와 크고 선명한 눈, 작고 오똑한 코. 아직 10살이라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성인이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사진작가의 안내에 맞춰 세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가장 가운데 자리는 유연의 자리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착석하고, 그 뒤에 백재연과 윤 원장이 나란히 섰다. 백재연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윤 원장은 한 손 백재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 손은 유연이 앉은 의자를 잡았다.고급스러운 저택 안에서 미소 짓는 세 사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가족의 이상적인
“실례합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흘러들었다.채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태건 씨?”채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린 듯 태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태건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아, 아니……. 여긴 어떻게…….”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채원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재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문객에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강 본부장.”금방 표정을 바꾼 재연이 온화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태건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장모님. 또 뵙네요.”“그러게. 또 보네.”백재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말투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태건은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유롭게 채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 그가 그녀가 잘라 두었던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서, 일어선 상태로, 타인이 쓰던 포크로 음식을 먹는다니.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채원은 태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와 달리 태건은 마치 음미라도 하듯 천천히 고기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며 감탄을 내뱉었다.“와, 이렇게 맛있는 거 사주시는 거면 저도 불러주시지.”“…….”“저한테는 커피 한 잔 안 주시더니. 저 이러면 조금 서운해집니다.”능청스럽게 말하던 태건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와인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도무지 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채원은 벙찐 얼굴로 태건을 바라봤다. 혹시 드디어 정말로 미친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재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강 본부장.”“네, 장모님.”“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 태건은 더 능청스럽게
“그럼 내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면 나랑 일할래요?”유건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지훈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이건 진심인가, 혹은 실험인가. 회장님도 아시는 건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가. 짧은 시간 동안 지훈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계산을 해야 하지만 절대 오래 걸려서는 안 됐다.최대한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켜 계산을 마친 그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아뇨.”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유건은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내가 동생이라서?”투정 부리듯 묻는 유건에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만한 돈이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지훈을 바라봤다.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은 이내 유건의 웃음소리에 깨졌다.“푸하하하!”호탕한 웃음소리에, 레스토랑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바라봤다. 지훈은 흘깃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의식했지만, 유건의 웃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한참을 웃고 나서야 그는 여운이 가득 남은 얼굴로 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아아, 진짜……. 장 비서님 유머 감각은 정말 최고예요.”“칭찬 감사합니다.”별로 감사한 마음은 없지만 지훈은 무심하게 말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그런 지훈을 보며 유건은 여운이 가득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잠시 내려놨던 포크를 집어 들고, 웃으며 지훈에게 식사를 마저 권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지훈도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갔지만,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먹는 샐러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채원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6시까지 여기로 와.]핸드폰에는 메시지와 함께 레스토랑 위치가 함께 찍혀 있
정신없는 오전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그래서 관련 미팅은 모레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점심은 어떻게 하실까요?”업무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지훈이 태건을 보며 물었다.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태건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바라봤다.“간단하게 먹죠. 별로 입맛이 없네요.”태건의 대답에 지훈은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려 주변 식당을 생각했다. “그러면 근처에 샌드위치 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샌드위치로 준비할까요?”“네, 좋네요. 장 비서님은 나가서 식사하고 오세요.”무심하게 말하고 태건의 시선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지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일이 늘어났다고 해도 굳이 식사까지 대충 챙기면서 몰두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이내 깊게 관여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지훈이 본부장실을 나오자, 앞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식사하러 가시나요?”그녀가 아까부터 쳐다보던 거울을 몰래 옆으로 슬쩍 치우며 물었다.“네. 식사 안 하십니까?”“아, 저는 도시락이요. 늘 챙겨 오거든요.”“아아, 네에.”별로 궁금하진 않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성의는 없었지만, 여직원은 수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본부장님이랑 같이 안 하시나요?”“본부장님은 샌드위치만 드시겠다고 해서요. 그거 챙기고 나서 밥 먹어야죠.”“그럼 제가 갔다 올까요?”여직원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녀를 보는 표정에 괜찮겠냐는 말이 묻어 있었다.“뭐,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데…….”굳이? 지훈이 조금 떨떠름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여직원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제가 다녀올게요. 장 비서님 요즘에 밥도 잘 못 챙겨 드셨잖아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주문은 제가 해놓을게요.”“네! 맡겨만 주세요!”여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지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
“흠흠~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콧노래와 함께 웃음기 가득한 유건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직원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수많은 소문을 안고 대건그룹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2주. 그 2주 동안 유건은 이틀에 한 번은 꼭 전략기획실을 찾았다.그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건을 만나겠다는 것. 하지만 귀신같이 유건이 찾아올 때면 꼭 태건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팅이 있거나 외근이 있거나, 혹은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거나.그렇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음에도, 유건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안녕하세요~”오늘도 역시나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오는 유건에 여직원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장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오늘도 본부장님 만나러 오셨을까요?”“네! 오늘은 안에 있을까요?”유건이 굳게 닫힌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늘은 제발 열리길 바라는 그의 기대와 다르게 여직원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뇨. 안 계십니다.”“에엥? 아니, 이 사람은 맨날 일 안 하고 어딜 그렇게 다녀요?”여직원의 말에 유건이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러는 너야말로 일은 안 하고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직원은 애써 미소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글쎄요. 보통 저한테는 어디 간다고 말씀을 잘 안 해주셔서요.”“맨날 장 비서님한테만 얘기하죠? 에휴, 장 비서님도 피곤하겠다.”유건의 말에 여직원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아아,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뭐 다른 말도 없었어요? 진짜 하나도?”유건의 물음에 여직원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끈질겼다. 무슨 대답이라도 꼭 듣고 가겠다는 확고한 고집이 담긴 눈이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여직원이었다. 계속 이렇게 상대하고 있어봤자 더 힘든 건 본인 쪽이었다.“장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