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윤을 향해 세상을 다 바칠 것처럼 미련하고 무모하게 구르고 있었다. 방법이 무역 회사 팀장에서 조폭 두목으로 바뀌었을 뿐, 도진의 세계는 여전히 이서윤이라는 단 하나의 태양을 축으로 돌고 있었다. “서윤아, 빨리 가야 돼! 저놈들 진짜 미친 자식들이야!” 주원이 서윤을 다그치며 뒷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서윤은 잡힌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안 가. 나 안 가, 주원아.” “뭐? 미쳤어? 저 남자가 누군지 방금 보고도 그래?” 서윤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빗속에서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고도 굳건히 식당 앞을 막아서서 싸우는 도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 때문에 피 흘리고 있잖아. 저 바보가… 또 나 때문에 저러고 있잖아.” 서윤은 깨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식당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주원이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서윤의 발걸음은 도진이 만들어낸 피와 비의 전쟁터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었다. 결말을 향해 폭주하는 전개 속에서, 두 사람을 묶고 있던 거짓말의 실은 끊어졌지만, 그보다 더 지독하고 붉은 진실의 실이 빗속에서 엉키기 시작했다. * 거짓말의 대가와 빗속의 고백 장대비가 아스팔트를 사정없이 때려눕히던 밤, 영춘식당 앞 골목은 아수라장이었다. 청룡파 최정예 요원들인 ‘청룡 무역 사원들’이 뒤늦게 들이닥치며 삼거리파 놈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조폭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하지만 널 다시 만나서, 네 곁에 있고 싶어서 평범한 남자인 척했던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거짓이 없었어." "오지 마! 끔찍해… 15년 만에 나타나서 이런 사기극을 벌여?" 서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뒤로 물러섰다. 도진은 다가가고 싶은 손을 간신히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그때, 식당 밖에서 수십 대의 차량이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삼거리파 용역들이 식당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한주원의 추격과 삼거리파의 기습이 동시에 맞물리며, 절체절명의 위기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도진은 서윤을 향해 등을 돌려 섰다. 그의 넓은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다. "한 변호사, 서윤이 데리고 주방 뒷문으로 나가. 여기는 내가 정리한다." 도진은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윤은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언뜻 보이는 거대한 호랑이 문신의 실루엣을 보며,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 등을 돌린 기사와 빗속의 붉은 실 미닫이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친 함성과 가로등 불빛이 영춘식당의 빛바랜 장판을 어지럽게 불태웠다. 삼거리파 용역 놈들이 몰고 온 트럭의 전조등이 강도진의 등을 무자비하게 비추고 있었다. 안경을 벗어 던진 그의 눈매는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예리했다. 서윤은 주방 문턱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 자신에게 부드럽게 물병을 건네고, 넥타이를 매만지며 얼굴을 붉히던 그 ‘강 팀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셔츠 깃 너머로 드러난 거대한 호랑이 문신과 사정없이 불거진 주먹의 핏줄.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식당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강도진! 이 사기꾼 새끼, 여기서 회사원 놀이 하느라 정신없었지?” 삼거리파의 행동대장이 쇠파이프를 바닥에 긁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칠이 벗겨진 문틀을 잡은 도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우드득, 하는 불길한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 좁혀오는 포위망과 숨 막히는 숨바꼭질청룡 무역의 가짜 팀장실. 강도진은 짙은 차콜 그레이 정장 재킷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이마를 짚었다.적들의 움직임과 한주원의 추격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박해졌기 때문이다."팀장님! 큰일 났습니다!"철구 대리가 사원증이 비뚤어진 것도 모른 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제이 건설과 삼거리파의 비밀 회동이 찍힌 사진들이 들려 있었다."삼거리파 놈들이 제이 건설 뒷돈을 받고 이번 주말에 영춘식당을 강제로 철거하겠다고 용역들을 대거 모집 중입니다. 게다가… 한주원 변호사가 그 정보망을 캐다가 우리 청룡 무역의 진짜 법인 등록 주소지를 캤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도진의 은테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주원의 집요함은 예상했지만, 설마 조직의 본거지 냄새까지 맡았을 줄이야. 조폭 두목이라는 정체가 서윤에게 들통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용역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주말까지 기다릴 것 없어. 그리고 한주원… 그 새끼가 서윤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내가 직접 서윤이의 안전을 확보해야 해."도진은 책상 위에 놓인 은테 안경을 고쳐 썼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서윤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같은 시각, 영춘식당 안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서윤은 테이블을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어제 도진이 했던 "서윤 씨를 지키는 데는 누구보다 철저하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리며 주원이 들이닥쳤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로움을 완전히 잃은 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서윤아, 당장 그 강도진이라는 남자랑 연락 끊어.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무역 회사 팀장이 아니야!"서윤은 찌푸린 얼굴로 걸레를 내려놓았다."주원아, 너 또 시작이야? 팀장님이 우리 얼마나 도와주셨는데 자꾸 그래?
도진은 담담하게 주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저희 보안팀은 해외 물류 보안 전문이라, 이런 동네 자잘한 분쟁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만… 서윤 씨의 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필요한 법적 절차가 있다면 저희 법무팀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지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법무팀이요? 중소 무역 회사에 법무팀까지 따로 있다니, 대단하네요.”주원이 서류를 툭툭 치며 도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에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주원아, 팀장님한테 무례하게 굴지 마. 어제도 나 도와주시려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서윤이 도진의 편을 들자, 도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승리감이 솟구쳤다. 도진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주원에게 결정타를 날렸다.“한 변호사님, 법으로 싸우는 것도 좋지만 현장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제이 건설의 배후 세력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비즈니스적’으로 그들의 자금줄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죠. 무역인의 시각에서는 그렇습니다.”도진은 어젯밤 밤새워 외운 금융 및 경제 용어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주원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도진을 그저 주먹 깨나 쓰는 무식한 조폭이나 사기꾼으로 의심했던 주원에게, 도진의 유창한 경제 지식은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그때, 주방에서 영춘 아주머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전골을 들고 나왔다.“자자, 다들 기운들 내고 밥부터 먹어! 한 변호사도 고생 많고, 우리 강 팀장님도 매일 와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둘 다 서윤이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멋진 청년들이네.”아주머니의 칭찬에 서윤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엄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주방이나 들어가!”식사가 시작되자, 두 남자의 자존심을 건 ‘매너 전쟁’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주원이 서윤에게 앞접시를 챙겨주면, 도진은 수저 밑에 깔 정갈한 휴지를 먼저 놓아주었다. 주원이 물을 따르면, 도진은 서윤이 매운 음식을 먹고 사레들리지 않도록 미리 부드러운 음료를 주문해 대기시켰다.“
주원도 지지 않고 도진의 눈을 노려보았다."이 손아귀 힘… 평범한 사무직 팀장의 힘은 아닌 것 같은데? 강 팀장님, 당신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팽팽한 정적 속에 서윤이 두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둘 다 그만해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팀장님,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주원이 너도 그만해. 나 먼저 갈게."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옥상을 내려갔다. 도진은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주원이 앞을 막아섰다."강도진. 내가 누군지 잊었나 본데, 나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야. 네가 서윤이 주변에서 서성이는 진짜 이유, 조만간 내가 다 밝혀내지."주원이 떠나고 난 뒤, 옥상에는 찬바람만 감돌았다. 도진은 난간을 내리치며 분노를 삭였다. 완벽하게 준비했던 파티가 한순간에 망가졌다."형님… 아니, 팀장님. 어떡할까요? 저 변호사 놈, 그냥 조용히…?"철구의 물음에 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저놈은 법을 다루는 놈이다. 함부로 건드리면 서윤이가 영원히 나를 떠날 거야. 정공법으로 간다. 내일 당장 우리 회사 진짜 실적 만들어내. 그리고 나도 공부 더 해야겠어. 저놈이 내 정체를 의심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팀장이 되어야 해."도진은 옥상 아래로 보이는 서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15년 만에 찾은 그녀의 곁이 이토록 가깝고도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서윤아, 미안해. 하지만 나는 절대로 너를 포기 못 해. 내가 어떤 괴물인지 알게 되더라도, 그때는 이미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거야.'도진은 주머니 속에서 서윤이 준 사탕 껍질을 만지작거렸다. 가짜 파티는 끝났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진짜 심장 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밤하늘의 달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도진의 가슴속에는 주원을 향한 질투와 서윤을 향한 애타는 갈망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조폭 두목의 위태로운 이중생활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도진은 다시 무테안경을 고쳐 썼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완벽한 팀장이 되어야 했다. 사랑
도진이 안내한 곳은 청룡 무역의 가짜 사무실 옥상이었다. 도진은 부하들을 시켜 이곳을 최고급 레스토랑처럼 꾸며놓았다. 화려한 조명과 클래식 음악, 그리고 강북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우와… 여기가 팀장님 사무실 옥상이라고요? 말도 안 돼, 너무 예뻐요!"서윤이 감탄사를 내뱉자, 웨이터 복장을 한 철구가 어설픈 동작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주었다."귀빈 서윤 님, 어서 오십시오. 청룡 무역의 김 대리입니다. 오늘 서빙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철구의 우렁찬 목소리에 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눈치를 줬다. 철구는 얼른 입을 다물고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식사가 시작되고, 도진은 서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주로 무역 회사 팀장으로서의 고충과 성공담(물론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였다)을 늘어놓았지만, 서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작 다른 것이었다."팀장님은 왜 무역 일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사실 팀장님 눈을 보면 가끔 되게 슬퍼 보일 때가 있거든요. 옛날에 그… 도진이랑 닮았다고 한 거 기억나시죠? 걔도 가끔 그런 눈을 했었거든요."도진은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글쎄요. 살다 보니 강해져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더군요.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면 사람은 누구나 변하게 마련이니까요."'서윤아, 내가 조폭이 된 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어. 하지만 너를 다시 만난 지금, 나는 진짜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도진은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작고 귀여운 오르골이었다. 태엽을 감자 15년 전 두 사람이 자주 듣던 동요가 흘러나왔다. 서윤의 눈이 커졌다."이 노래… 팀장님이 어떻게 아세요?"도진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무역 시장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빈티지 제품인데, 서윤 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마음에 드십니까?""네… 너무 좋아요. 정말 신기하네요."서윤이 오르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미소 짓는 순간, 도진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