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기다리던 종강이 왔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재희와 저녁을 함께 먹은 뒤 간단히 티타임을 가졌다.
“엄마, 나도 알바해 볼까?”
“좋지. '모스 문' 엄마가 자주 가는 카페 있잖아. 거기서 구인하더라. 한번 가 봐. 가까우면 좋잖아?"
버스 정류장 조금 지나 있는 모스 문(Moss Moon)은 우드엔 화이트로 모던한 스타일의 카페였다. 이수가 두어 번 테이크 아웃으로 들렸던 곳이었다. 카페 인테리어가 상당히 근사했다. 그곳에서 일할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내일 면접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
“카페 아르바이트 경험 있나요? 이거 꽤 힘들어요. 그냥 시간 때우며 음료만 만드는 게 아니거든.”
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던 카페 사장은 면접이 시작되자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수의 손끝은 잘게 떨렸다.
“아... 경험은 없지만, 전 본래 한가로운 일보단 빡빡한 일이 좋아요. 돈 받으며 가만히 시간 보내는 건… 제게 맞지 않아요. 레시피도 잘 외울 자신 있어요!”
사장은 이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혹시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곧 그만두는데 그전에 인수인계받았으면 해서요. 우리 카페 에이스였던 친구에게 이수 씨가 잘 배워줬음 좋겠네, 잘 부탁해요!”
첫 5일은 연속으로 출근해 교육을 받기로 했다.
다음 날, 카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카페 바(bar)에 있는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게 인사했다. 선임은 이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거짓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시작된 교육은 생각보다 숙지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사장의 말대로 몇 번의 시범만으로 그녀가 카페의 에이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이 없는 이수는 간단한 음료 제조부터 차근차근 배우기로 했다. 청소부터 제조까지 그녀의 손끝에 벤 꼼꼼함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수학 공식처럼 레시피의 정확도에 따라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제조에 재능이 있어 보였다. 스무해 만에 처음 발견한 숨은 능력 같았다.
이곳에서 오래 일할 수도 있겠다, 란 기대가 생겼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마치 길었던 터널을 버텨온 보상과도 같이 느껴졌다. 퇴근하는 이수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셋째 날, 예상보다 빠른 이별이 찾아왔다.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게 사정이 생겨 퇴사가 앞당겨졌다. 선임 대신 다른 요일을 담당하던 친구가 이수를 맡기로 했다.
싫었다. 이수는 지금의 친절한 선임이 좋았다.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 주는 게 쉽지 않았던 이수였다.
“아! 이수 씨랑 동갑이야. 굉장히 괜찮은 친구니까 너무 걱정 마요! 분명 나보다 더 잘 알려줄 거야!”
그 사람도 선임 아르바이트 생처럼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알바 시작 15분 전이었다. 처음으로 연일 풀타임 일을 하니 몸이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망할! 카페까지 걸어서 15분인데...!!
이수는 서둘러 씻고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걸쳐 입었다. 초고속으로 준비를 끝내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마에서 뜨끈한 땀이 사선으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땀 냄새 나겠다.
5-4-3-2-1, 세이브!
“헉,헉… 하... 한녕… 하세횻… 하학…”
이수는 모스 문의 한쪽 벽을 짚고 고개를 숙여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어서 와, 홍이수!”
엄습하는 불길함에 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에 미역처럼 들러붙은 긴 머리 사이로 바(bar)를 쳐다봤다.
잠. 깐. 만. 새로운 트레이너가 그… 자, 잘생긴, 아니 그…똥, 아니 그 남자?!!
뭐야, 오늘 왜 더 잘생긴 건데.
나는 왜 오늘 더 거지 같은 건데?!
늦잠 잔 나, 자려거든 죽어서나 자라!
이수는 영혼이 가출한 듯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다. 잇새로 자조 섞인 헛웃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남자는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자신을 소개했다. 환히 웃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건치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마저도 너무 눈부셨다.
“현준, 남현준이야. 나도 XXX 고등학교 출신.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널 알아.”
제발 고등학교 얘기만 하지 않기를. 이수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현준님, 이거 주문 입력 어떻게 해요…?”
“아, 이건 새로 추가된 메뉴라, 여기 노란 버튼 누르고 가격을 직접 입력해야 해.”
현준의 손끝이 포스기로 향할 때 이수의 손등을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묘한 열감이 올라왔다. 살짝 스친 게 뭐라고 신경 쓰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이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정신을 차렸다.
홍이수, 잘 단속해, 악몽 다시 꾸고 싶지 않거든!
“이수! 이거 모카 시럽 넣었어? 주문서는 모카 라테 일 텐데!”
“이수! 주문 나가고 난 다음에는 바로 툴 씻고 바로 정리!”
“이수! 손님 가고 나시면 바로 테이블 정리 잊지 말고!”
이수! 이수! 이수! 몰아치는 그의 교육 방식에 정신이 찢기듯 너덜너덜해졌다.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 낚인 기분이었다. 이수는 속으로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걸 후회했다.
점심 피크가 지나가고 모스 문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컵을 정리하던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현준을 의식했다. 아름다운 조각상에 눈길이 가듯 자꾸 그에게 시선을 뺏겼다.
원두 정리를 하던 그를 훔쳐보던 순간,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놀란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컵을 발아래로 떨어뜨렸다.
쨍그랑!
기다리던 종강이 왔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재희와 저녁을 함께 먹은 뒤 간단히 티타임을 가졌다.“엄마, 나도 알바해 볼까?”“좋지. '모스 문' 엄마가 자주 가는 카페 있잖아. 거기서 구인하더라. 한번 가 봐. 가까우면 좋잖아?"버스 정류장 조금 지나 있는 모스 문(Moss Moon)은 우드엔 화이트로 모던한 스타일의 카페였다. 이수가 두어 번 테이크 아웃으로 들렸던 곳이었다. 카페 인테리어가 상당히 근사했다. 그곳에서 일할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내일 면접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카페 아르바이트 경험 있나요? 이거 꽤 힘들어요. 그냥 시간 때우며 음료만 만드는 게 아니거든.”웃는 얼굴로 반겨 주었던 카페 사장은 면접이 시작되자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수의 손끝은 잘게 떨렸다.“아... 경험은 없지만, 전 본래 한가로운 일보단 빡빡한 일이 좋아요. 돈 받으며 가만히 시간 보내는 건… 제게 맞지 않아요. 레시피도 잘 외울 자신 있어요!”사장은 이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래요, 혹시 바로 일 시작할 수 있어요?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곧 그만두는데 그전에 인수인계받았으면 해서요. 우리 카페 에이스였던 친구에게 이수 씨가 잘 배워줬음 좋겠네, 잘 부탁해요!”첫 5일은 연속으로 출근해 교육을 받기로 했다.다음 날, 카페 문을 조심스레 열고 카페 바(bar)에 있는 선임 아르바이트 생에게 인사했다. 선임은 이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거짓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시작된 교육은 생각보다 숙지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사장의 말대로 몇 번의 시범만으로 그녀가 카페의 에이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바리스타 자격증이 없는 이수는 간단한 음료 제조부터 차근차근 배우기로 했다. 청소부터 제조까지 그녀의 손끝에 벤 꼼꼼함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수학 공식처럼 레시피의 정확도에 따라
*이번 화는 ‘학폭‘과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련 트라우마가 있으시거나 정서적으로 힘드신 독자님들께서는 감상에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역시 홍이수! 너희들 이수 좀 본받아! 수업 시간에 졸. 지. 않. 고 집중하면 너희들 중 절반은 성적 오를 거야! 사교육 자랑 아니다! 너희들이 깎아먹는 성적, 이수가 채워서 반 평균이 유지되는 거다! 꼴지반이라는 타이틀, 들으면 기분 좋니? 눈 깜빡일 새, 금방 고3 된다! 잘하자!”선생님의 그 ‘칭찬’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다.“졸라 부럽네, 뭘 해도 이쁨 받고.”“공부 잘하는 누구 때문에 누구는 등급 떨어진다며? 하, 짜증.”이수의 평화롭던 고등학교 생활은 그날로 끝이었다.“이수야, 괜찮아. 신경 쓰지 마…”역시 해리뿐이야. 너와 같은 반이란 게 참 감사해.“…근데... 너 정말 학원 하나도 안 다녀...? ““어...? 무슨 뜻이야…?”“아... 아니야, 우리 매점이나 가자, 떡볶이 먹어야지.”해리의 태도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하지만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로 이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웅성—웅성—“아이고, 어떡해? 교과서가 다 찢어졌네? 사교육도 안 한다면서, 이제 공부는 어쩔?”“존나 불쌍, 쩔.”“박핼! 어째 홍이수 친구는 이름까지도 hell이냐? 크크크 야, 쟤 교과서 빌려줄 거야?”“우리 반 성적 골로 나락 가지 않으려면, 박핼이 책 양보해야지. 홍이수는 학원 하나 안 다닌다던데, 안 그래?”“학원 안 간다는 거, 다 개 구라 아냐?”어깨를 한 번 끌어올리며 무리들은 이수를 향해 조소를 터트렸다.휴우… 쉽지 않다. 정말. 대꾸할 가치가 없다. 이수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야자 할 사람은 남고, 집에 갈 사람은 싸게싸게 가라! 반장 인사해!”이수는 지옥 같은 교실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님의 종례 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해리야, 집에 같이 갈까?”항상 집에 같이 가던 해리에게 이수가 물
5년 전, 3월.“이수야, 오늘 입학식, 우리 안 가도 되지?”기대하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재희는 아침부터 질문을 가장한 결정을 툭 던졌다. 누가 봐도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말이었다. 그 말에 아빠 상열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수는 상열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한 번 꽉 끌어안았다.“아빠 딸, 홍이수. 이제 더 이상 중학생 소녀가 아니니까, 괜찮아. 오늘도 잘 다녀오겠습니다!”상열은 한숨을 한 번 훅 내쉬며 이수의 어깨를 꽉 잡았다.“이수야, 이수 뒤엔 늘 아빠, 엄마가 있어! 오늘도 화이팅이야!”상열은 언제나 아빠 엄마 순으로, ‘아빠‘ 에 강세를 넣었다. 딸을 향한 애정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성실한 딸 바보, 홍상열 파파와 따뜻하지만 똑 부러진 김재희 여사. 이수는 맞벌이였던 부모님에게 언제나 우선순위 일 번이었다.학교를 가기 위해 이수는 집을 나섰다. 입춘이 지난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입김이 몽글몽글 꽃처럼 피어올랐다. 친한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학교에 배정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지만,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건너건너 아는 친구 몇은 있겠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이수는 입김에 희망을 담아 공기 중에 날려 보냈다. 하늘에 닿기를 기원하면서.중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커다란 강당의 공기가 차가웠다. 낯선 환경은 익숙했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위축되었다. 아는 얼굴이 혹 있을까, 이수는 이리저리 둘러봤다.같은 중학교 출신은 이수와 박해리, 둘뿐이었다. 마치 신이 작정하고 이수에게 장난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됐다. 수많은 졸업생 중 단 두 명만 같은 학교로 배정받는 확률이라니.관상을 믿지 않지만, 인상은 좀 본 달까.물론 인상이 그 사람의 인성을 모두 말해주진 않지만, 어느 정도 맞지 않나?이수는 자신만의 뇌피셜임을 인정하면서도 해리의 얼굴 곳곳을 살펴봤다. 나쁜 친구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반이 된 이수는 이것이 천운
이수의 첫 로맨스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대학 신입 때였다.대부분 중고등학교 때 첫사랑을 만나지만, 이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비참했다. 친구였던 모두가 손바닥 뒤집듯이 적이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한 명마저 이수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첫사랑은 뒤로하고 친구조차 남질 않았다.이수는 완벽한 외톨이였다.남들은 대학교만 들어가면 해봐야 하는 버킷리스트들이 가득했지만, 이수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오히려 암담했던 시절이 이어진 것 같아 정을 붙이기 싫었다.참 지루하고 따분한 대학 생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순간에 180도 뒤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최대한 외부인을 차단하고 지켜낸 자신만의 세계였다.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공간에 어느 순간, 눈부신 불청객이 등장했다. 남현준. 이수의 첫사랑이다. 그 불청객은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현준을 처음 봤던 순간이 이수에게 아직도 선명했다. 봄이 막 끝나갈 무렵, 한창이었던 벚꽃잎이 다 떨어진 직후였다.긴 세월 고요하고 잔잔했던 호수 위로 마치 작은 돌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정적을 깼던 신선한 충격이었다.그 당시 이수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길만 골라 다녔다.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던 기억이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사람들과 불필요하게 엮이는 게 싫어졌다. 쓸데없이 에너지와 감정을 소비하게 될 테니까.그날도 평소처럼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작은 벌레 하나가 이수의 눈에 들어갔다. 안경을 머리에 살짝 얹은 채로 눈을 비비며 걸어갔다.쿵—!“아야…”단단한 무언가와 꽤 세게 부딪혔다. 키가 커다란 남자의 등이 이수의 시선을 가렸다.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누군가 시간의 마법을 부린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영화 속 미장센처럼 배경들이 흐릿해지고 오직 이수의 눈에 남자만 화사하게 빛났다. 살면서 이렇게 빛이 나는 사람을 성별 통틀어 처음 봤다.윤기가 흐르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홍이수! 진짜 혼자 가도 돼? 일본에서 필요한 거 제대로 사 올 수 있는 거지?”엄마, 재희는 앞으로 혼자 지낼 이수의 일본 생활이 조금 걱정되었다. 이수 역시 작은 걱정 하나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왕 결정한 거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앞만 보기로 했다.이수는 일주일 뒤 대한민국 서울이 아닌, 일본 오키나와에서 살아갈 예정이다.일 년짜리 워킹 홀리데이.국내 여행도 혼자 해본 적 없던 이수지만, 용기를 내어 1년 살기를 시도해 본다.충동적으로 시작된 계획이었다. 이수는 익숙한 울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었었다. 그럼에도 가야했다. 완벽히 낯선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서라도 해야할 일이 있었다.그와의 로맨스를 모두 새로고침하는 것.이제는 그 유효기간이 끝나버렸다. 빛바랜 마음이 되어 쓸쓸하게 이수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버리는 편이 나았다.모조리 그곳에 던져 버리고 새로고침할 것이다, 나 혼자.바다를 좋아했던 네가 가고 싶어 했던 오키나와 바다.내가 가서 널 그 바다에 버려줄게.실컷 즐기도록 바라.그리고, 다신 내 마음속에 찾아오지 마.안녕.그와의 추억을 모두 삭제하려는 이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들어간 로드숍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9291X의 .그가 정말 좋아하던 노래였다. 이수에게 알려준 이 노래는 두 사람의 로맨스를 열어줬다. 그리고, 이제는 새드 엔딩 스토리의 마침표가 되어 줄 차례다.그를 잊고 산다는 착각이 무색하게 노래 하나에 다시 그와의 추억들이 소환됐다.이수는 진열된 소품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숍을 나와 버렸다. 맥이 빠진 채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울컥 올라오는 부아를 긴 호흡으로 차분히 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미련한 걸까. 정말, 밉다. 휴우…혼자 씩씩하게 다녀와야지.일도 열심히 하고 재밌게 놀다 올 거야.증명해 낼 거야, 이젠 다 괜찮다고. “하… 날씨 장난 없네....”제법 시원하게 입고 나왔음에도 한낮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초인종을 앞에 두고 이수의 검지는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주변은 한여름의 습도 가득한 진득한 날씨인데도 말이다.이수는 다른 손을 가슴 위에 올려 힘을 주었다. 손가락만큼이나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려 애 쓰는 중이었다.후….우…….내뱉는 긴 숨의 끝은 입술을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정확히 일 년하고도 반 년 전, 바로 이 곳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 이수에게 일어났다. 그것은 묵직한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의 발목을 늘어지게 잡아 끌었다.시야를 가린 눈꺼풀 뒤로 그 날의 일이 선명하게 피어올랐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고막을 찢을 듯 두드리는 절박한 외침과 함께. “현준아!! 아니야! 이러지마, 제발!!!!!” “끼아아아악!! 이러지마!” “정신 차려, 남현준!!!!!”느린 이수를 위해 걸음을 맞춰주던 다정한 사내였다. 항상 이수가 그에게 첫 번째였다. 언제나 온마음 다해 이수를 대했던 그였다. 그러나 인생을 처참히 뒤흔든 시련 앞에 그런 사내는 간데없이 사라졌다.처음 마주하는 건장한 성인 남자의 힘이었다. 이수의 몸 위에 올라타 그녀를 강하게 짓누르던 현준은 자기혐오와 죄책감으로 무너져있었다. 자신은 본능에 충실한 추잡한 괴물이어야만 한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더럽혔다.그날의 충격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던 이수의 첫 경험을 무참히 찢어버리고 짖밟아버렸다.이수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달리는 그를 밀어냈지만, 현준을 향한 갈망까진 지워내지 못했다. 마음을 외면할수록 도리어 감정이 켜켜이 쌓였다. 지독하게 묵직했다.끝내 어긋나는 타이밍과 계속 되는 오해로 처참히 무너졌다. 이수는 다시는 마음을 펼쳐보지 못하도록 실로 칭칭 감아 저 멀리 던져버렸다.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며칠 전 우연히 평상에 찾아온 그의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이수의 귀에 어디선가 뚝- 하고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오래 묶여 있던 감정의 매듭이 그렇게 풀렸다.지독한 첫사랑 남현준. 지금 그의 집 앞에 서 있다.이수는 이제